<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고광만(高光晩) |
호 | 청봉(靑峰) |
본관 | 제주 고씨[1] |
출생 | 1911년 4월 10일 |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창평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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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4년 8월 24일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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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전직 펜싱 선수 고영태는 그의 9촌 삼종증손(三從曾孫)이다.
2. 생애
1911년 4월 10일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창평리(현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에서 아버지 고형주(高亨柱, 1873. 3. 15 ~ 1942. 1. 30)와 어머니 전주 이씨(1873 ~ 1950. 1. 30) 효령대군파 이우일(李遇日)의 딸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32년 6월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서 공산주의자 협의회 소속 청년회원 70여 명과 소작권 이동 방지를 협의한 후, 덕진면 운암리·백계리 방면에 거주하는 소작인들의 집에 들어가 소작권 이전의 부당함을 꾸짖고 응징했다. 그리고 나와서는 '소작쟁의 만세', '노동가' 등을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구금되었다가 1933년 6월 2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가택침입,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그해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가택침입,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벌금형 30원, 벌금을 납부치 않을 시 30일간 구금되는 판결을 선고받았다. 이에 벌금을 납부치 않고 30일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2004년 8월 24일 별세했다.
202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1]
장흥백파-의열공파(毅烈公派)-진위공파(振威公派) 22세 광(光)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