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22:20:14

견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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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본의 견수사와 견당사
2.1. 역사
2.1.1. 견당사의 전신 견수사2.1.2. 견당사의 역사2.1.3. 그 밖에

1. 개요

견수사( 使) 및 견당사( 使)는 수나라의 중원 통일 및 당나라의 건국 이후 한국사 삼국, 그 중에서 특히 신라, 그리고 일본사에서는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에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파견한 사신단이다.

견당사 비율이 많지만 견당사의 전신인 견수사도 중요하므로 편의상 같이 언급한다.

2. 일본의 견수사와 견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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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견당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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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당사선 모형

2.1. 역사

2.1.1. 견당사의 전신 견수사

6세기 후반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여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구축하자 일본은 그런 수나라를 보며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일환으로 견수사를 꾸려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600년부터 618년까지 3회 및 5회 정도 파견되었다. 당시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 백제의 영향을 받아 국가적으로 불교 문화를 장려함과 동시에 일본의 정치,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서 급속적인 성장을 이루웠는데 그러한 드라이브는 바로 견수사였다. 견수사는 수나라의 율령 제도인 3성 6부제, 선거제( 과거제의 전신) 그리고 학문과 기술 등을 받아들여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그동안 일본은 중계지인 한반도를 거쳐서 중국의 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견수사로 더 이상 한반도에 의존하지 않고 수나라ㆍ당나라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2.1.2. 견당사의 역사

당나라와 일본이 처음 접촉한 것은 631년으로 일본의 당나라 입조 이후 일본은 당나라에 16차례 이상 사신을 파견했다. 견당사로 파견된 일본인은 당태종 정관지치를 보면서 이를 일본 사회에 전파하여 일본이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겐메이 천황이 수도를 헤이조쿄로 옮기면서 당나라의 장안성을 모방해 축조한 것도 바로 견당사의 영향이었다. 견당사는 단순히 사신만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당학을 익히기 위한 견당유학생이나 승려 등도 함께 당에 입조하였다. 대표적으로 헤이안 시대 승려 엔닌(円仁), 천태종 창시자 사이초(最澄), 진언종의 창시자 구카이(空海) 등이 있었다.

견당사는 주로 중국의 설날 행사 참석에 맞추기 위해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일본을 출발했다. 신라와 사이가 좋을 때는 한반도 전라도 해안을 돌아서 산동반도로 항해하는 루트를 주로 이용했지만 헤이안 시대 신라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나가사키 쪽에서 동중국해를 횡단하는 원양항해를 많이 시도했다.[1] 가끔 사신단이 발해 땅을 통과해서 동해로 항해하는 루트로 중국에 갔다오기도 했다.

그러나 9세기 중엽 당나라가 쇠퇴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수당의 율령체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이에 좌경대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는 견당대사에 부임되었음에도 당의 망국을 근거로 견당사 폐지를 건의해 894년 견당사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후 송나라 오대십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다시 통일하지만 이미 일본 내에서는 국풍 문화가 급진하여 한자를 간소화시켜 가나 문자를 만들게 되어 일정 부분 일본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더 이상 중국이나 고려와 직접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2.1.3. 그 밖에

일본은 견수사·견당사를 파견한 것을 수·당나라와의 조공-책봉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수·당에 입조를 하였고 이후 여러차례 사신을 보냈기 때문에 형식적으론 조공-책봉의 성격을 띠었다. 당나라로 가는 해로는 크게는 두가지로 나뉘는데 초기 견당사는 주로 북로(신라로)를 이용하다가 한반도의 정세 변화로 702년에 동중국해로 가로지르는 남로를 개척하여 이후 남로를 이용했다. 그런데 남로는 한반도를 피해서 남해바다 외해를 직통하는만큼 폭풍우가 몰아치는 등 잦은 기상 여건의 악화로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간에 제주도에 표류해서 신라 경주에 사신을 보내 살아남은 사람을 데려온 적도 있다. 그래서 기상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남도로라는 추가 해로를 개척해 이용하였다. 그리고 딱 한 차례에 발해로를 이용했는데 동해로 북상하여 동경용원부와 상경용천부를 경유한 뒤 유주로 입경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때는 759년으로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화북 지방이 전란으로 뒤덮여 있었다. 흠좀무 견당사는 2척에서 4척으로 편성되었고, 한 회에는 500명이 승선하기도 했으나 평상시에는 100명 내지는 130명까지 승선했다.

속일본기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은 견당사뿐 아니라 견신라사, 견발해사 등 주변 다른 국가로 보내는 사신단도 운영했고, 심지어 보덕국에 보내는 견고려사, 탐라국에 보내는 견탐라사도 보낸 적이 있다. 견신라사 같은 경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지도에 반해서 실제론 의외로 상당히 활발하게 교류했는데, 670년 이후로만 40여차례 보낼 정도라 견당사보다도 그 규모가 컸다.[2][3]그러나 현대 일본의 역사교육에서는 여러 이유로 견당사만을 부각시키고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당나라로 견당사를 보내는 바닷길 중간쯤에 탐라국이 있다보니, 견당사를 탐라인들이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측 사학자인 나카무라 신타로(中村新太郞)의 저서에서는 “일본이 당나라에 보내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가 상주(上奏)한 조건 중에 일본해에서 신라 해군에게 피습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견당사(遣唐使)를 폐지하여야 한다”고 까지 했다.[4] 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아마도 신라구나 탐라인들의 습격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 이 과정에서 중간쯤에 있는 제주도 해적에게 일본 견당사가 털려서, 신라 정부와 협의해 돌려받는 사건도 있었다. [2] 또한 후대의 비슷한 교류형태인 조선통신사와 비교하면, 견신라사가 횟수에서 넘사벽으로 잦고 활발했다. [3] 애초에 지리적으로 일본에서 한반도로 가는 게 일본에서 바로 중국대륙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가깝기 때문에 교류 횟수가 견신라사가 견당사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당연하다. [4] 日本と中國の2千年 260(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