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23:13:51

사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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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澄
767~822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에 활동한, 일본 밀교(불교)의 초석을 다진 두 승려 중 하나.[1]

속명(俗名)은 미츠노오비토 히로노([ruby(三,ruby=み)][ruby(津,ruby=つ)][ruby(首,ruby=ノおびと)][ruby(廣,ruby=ひろ)][ruby(野,ruby=の)])다.

지금의 시가현 오츠시출신으로 778년 고쿠분지(國分寺)에서 출가하였다. 법명을 사이초라 한건 780년의 일이다.

804년, 구카이(空海)와 함께 견당사(遣唐使)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留學)을 했다. 청룡사(靑龍寺)의 밀교 고승 혜과(惠果)로부터 금강계와 태장계를 한방에 받았던 구카이와 달리, 사이초는 천태산(天台山)의 사찰 여기저기에서 천태종의 학통을 배우고[2], 명주(明州)를 전전하며 선불교[3]와 밀교[4]를 배우는 등 (구카이에 비해) 다사다난한 유학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5] 두 사람은 유학자금의 조달방법도 상이했는데, 사이초가 국가장학금(...)을 받아 견당사에 오른 반면, 구카이는 사비를 털어 뱃길에 올랐다는 차이가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순서도 다른데, 사이초가 먼저 귀국(805년)하고 구카이는 그 다음해(806년)에 귀국하였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다소 협력하는 듯 보였으나, 끝내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았고, 기어코 사이초는 히에이산(比叡山)의 천태종(天台宗)[6], 구카이는 고야산(高野山)의 진언종(眞言宗)[7]으로 완전히 각자의 갈 길을 갔다.[8]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쓴 엔닌의 스승이다.

822년 히에이산에서 입적했다.

시호는 전교대사(傳敎大師)이다.

사이초가 천태종을 확립한 히에이산도 전국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의 공세로 완전 갈려 나갔다. 지금의 엔랴쿠지는 노부나가의 침공 이후 재건한 절이라고 한다.


[1] 다른 한명은 일본 밀교의 거장인 코보타이시(弘法大師). [2] 천태종 승려였던 도수(道邃)와 행만行満) [3] 사이초에게 선(禪)을 가르친 것은 소연(翛然)인데, 사이초가 명주 선림사(禪林寺)에서 우두선(牛頭禪, Oxhead School of Zen)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연은 명주 선림사에서 사이초에게 자신의 선통(우두선)을 가르친 것으로 추측된다. [4] 사이초에게 태장계를 전수한 것은 명주 봉산도장(峰山道場)의 밀교승이었던 순효(順暁)이라고 전해진다. 다만 당시 당나라 순밀(중기 밀교)의 종가집은 청룡사의 혜과(惠果)였고, 순효(順暁)는 밀교승 중에서도 방계에 가까웠다고 한다. 따라서 훗날 사이초는 혜과의 법통을 잇는 구카이에게 숙이고 들어가 학통을 나눠받을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5] 따라서 혜과 한명의 밀교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구카이와 달리, 사이초에겐 별개의 학풍을 가진 스승들이 많다. [6] 총본산은 히에이잔- 엔랴쿠지(延暦寺) [7] 총본산은 고야산-곤고부지(金剛峰寺). 하지만 진언종의 거대 사찰 중에는 (구카이의 스폰서였던) 사가 덴노가 하사한 헤이안쿄- 도지(東寺)가 있어 사실상의 (수도권) 총본산 역할도 수행한 듯 하다. [8] 예전에는 제자가 구카이에게 가도 오히려 구카이를 흠모하여 그에게 법을 배웠던 사이초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구카이의 경우 당시 실권자가 그의 법을 흠모한 인물이었고 사이초는 자신을 도와준 실권자가 이미 사망하여 후원자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평소 구카이를 흠모한 그는 그에게 불법 공부를 더 정진하고자 밀교서적을 빌려달라 했으나 구카이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서운함에 교류를 단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