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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라르트 보다시

파일:Gerard Wodarz.jpg
이름 게라르트 보다시
(Gerard Wodarz)
출생 1913년 8월 10일
사망 1982년 11월 8일 (향년 69세)
국적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인민 공화국
출신지 독일 제국 비스마르크휘테
포지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신체 171cm | 65kg
소속 구단 루흐 호주프 (1929-1939)
비스마르크휘터 SV (1939~1944)
RAF 뉴톤 노츠 (1945)
프레이저부르크 FC (1945~1946)
루흐 호주프 (1946~1947)
국가대표 28경기 9골 (1932~1939)
감독 라이메르 니에도브치체 (1948)
루흐 호주프 (1949)
피아스트 글리비체 (1950)
구르니크 자브제 (1950~1954)
구르니크 시비엥토흐워비체 (1957)
ŁTS 와벵디 (1959)
피아스트 글리비체 (1960)
루흐 호주프 (1961)
구르니크 09 미스워비체 (1967)

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4. 수상
4.1. 클럽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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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생애[1]

2.1. 어린 시절

보다시는 독일인 혈통으로 처음 그의 이름은 게르하르트였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제국군에서 복무하다가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전사했다. 보다시는 12살때부터 루흐 호주프(Ruch Chorzów) 유스팀에서 뛰게 되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4살 무렵 BBTS 비엘스코바이와(Bielsko-Biała) 성인팀을 상대로도 골을 뽑아낼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던 보다시는 15살부터 루흐 호주프의 성인팀에 소속되었다. 1군 등록 첫 경기에서 보다시는 자신의 주 포지션인 아웃사이드 포워드가 아닌 예비 골키퍼로 포함되었고 3주 후인 1929년 7월 7일에 바르샤비앙카(Warszawianka)와의 경기에 데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폴란드 리그는 만 16세의 나이 제한이 있었고 이 경기가 해당 시즌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이었으므로 일종의 쇼케이스성 출전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시즌부터 보다시는 정식 출전에 들어갔다. 1930년 5월 18일에 있었던 탄네리 크라쿠프(Tannery Kraków)와의 경기에서 첫 어시스트, 25일의 폴로니아 바르샤바전에서는 첫 골을 넣었다. 보다시는 1930 시즌 루흐 호주프의 유일한 리그 전경기 출장에 4골 득점으로 팀 내 득점 3위를 기록했다.

1931년과 1932년 시즌에도 보다시는 리그 전경기 출장에 6골을 넣었다. 하지만 팀 성적이 5위, 7위로 다소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1933년 시즌, 루흐 호주프에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가 입단했고 보다시는 20경기 출전 2득점으로 스탯은 다소 줄었다. 하지만 루흐 호주프는 엑스트라클라사 우승을 거뒀다. 그 후 루흐 호주프는 1938년까지 4차례나 더 엑스트라클라사 우승으로 전성기를 구가했고 보다시 역시 팀의 중심 선수였다. 하지만 협심증을 포함한 각종 건강 문제들이 조금씩 보다시의 발목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1936년 2월, 보다시는 군복무를 시작했지만 허가를 받고 루흐 호주프의 경기에 계속 뛸 수 있었다. 10월 18일의 탄네리 크라쿠프와의 경기에서 보다시는 해트 트릭을 기록했고 팀의 리그 4연패를 이끌었다. 이 해에 보다시는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활약으로 영국 진출의 기회를 얻었지만 결론적으론 가지 못했다.

1937년 9월에 군복무를 마친 보다시는 10월에 루흐 호주프 소속으로 프랑스 팀들과 친선 경기를 가졌고 여기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라싱 클뢰브와 루흐 호주프 선수들 간의 계약 스캔들이 터졌다. 이 사건은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와 빌헬름 구라가 술에 취한 채 폴란드 축구 협회 직원들이 있는 호텔에 들어오면서 밝혀졌다. 빌리모프스키의 주머니에서 보다시가 서명할 계약서가 발견된 것. 팀 동료들은 보다시가 프랑스로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안토니 가웨츠키가 보다시는 사실을 몰랐었다고 확인시켜주면서 언론은 팀 동료들의 장난에 보다시가 말려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이 일은 해프닝으로 마감되었다.

1938년에 루흐 호주프는 다섯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39년 시즌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다.
2.2.1.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나치 독일 폴란드 침공에 맞서 보다시도 전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보다시가 속해 있던 75연대는 9월 21일에 독일군에 항복했고 보다시도 다음날에 독일군에 체포되었다. 포로 수송 중 탈출한 보다시는 한동안 숨어지내다 글리비체(Gliwice)에서 구금되었다. 독일 당국은 보다시의 폴란드 국적을 문제 삼아 그의 일자리를 박탈하고 주당 9 마르크를 지급했다.

1939년 11월, 호주프 지방에 비스마르크휘테(Bismarckhütter) 클럽이 설치되었고 보다시를 포함한 루흐 호주프 선수들 선수 일부가 클럽에 합류했다. 보다시 역시 제철소에서 일하는 등 각종 혜택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19일에 데뷔 경기를 치렀지만 비스마르크휘테는 1대2로 패했고 1년 후 보다시는 제철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가우리가에 비스마르크휘테 소속으로 뛰던 보다시는 1942년 1월에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었고 알자스로렌의 팔스부르크에서 군사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혈통을 고깝게 본 한 장교에게 무릎을 걷어차여서 3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7월 12일부터 보다시는 비체(Bitche)를 거쳐 8월에는 앤트워프에, 11월에는 잠시 블리싱겐에 주둔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앤트워프로 다시 옮겨져 네 번째 회사 서기로 일했다.

1944년 2월 20일, 그는 게르마니아 쾨니히슈테(Germania Königshütte)에 1대2로 패배한 경기에서 게스트로 뛰었다. 당시 보다시는 군대에서 휴가 중이었고 동료들의 요청에 따라 1943-44 시즌에 가우리가 실레시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할 경기에 출전하기로 결정했지만 경기에서 패했다.

1944년 6월 1일부터 그는 제48보병사단 소속으로 서부전선에 참전했다. 48사단은 외스텐더(ooestende) 지역의 해안을 보호하는 역할이었지만 8월 27일 발랑스엉브리(Valence-en-Brie) 지역의 폭격 중에 그는 탈영했고 포로로 잡혔다. 보다시는 독일 제복을 입고 체포된 후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는 폴란드 여권과 1938년부터의 프랑스 비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 전쟁 포로로서 그는 자유 폴란드군에 자원입대하여 공군에 배치되었고 하사관 겸 체육 교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다 RAF 뉴톤 노츠에서 뛰면서 축구 선수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보다시는 스코틀랜드 팀 프레이저부르크(Fraserburgh FC)의 선수였다. 그는 폴란드 소대장과 영국 상사 계급으로 병역을 마쳤다.
2.2.1.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보다시는 1946년 1월에 친정팀 루흐 호주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3월 17일에 시에미아노비치앙카(Siemianowiczanka)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3대3으로 비길 때 득점을 기록했다. 4월에 그는 다시 제철소에 취업했다.

1946-47 시즌에 보다시는 10골을 넣었고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축구화를 벗었다.

2.2.2. 국가대표

보다시는 1932년 10월 2일에 루마니아를 상대로 하얀 독수리 유니폼을 처음 입었다. 비록 보다시는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폴란드는 루마니아를 5대0으로 대파했다.

보다시는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여 폴란드가 4위를 차지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보다시는 폴란드의 올림픽 대표팀 선발을 위한 4경기 중 2경기에 출전, 푀부스 부더페슈트(Phöbus Budapest)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했고 18인의 최종 스쿼드에 등록되었다. 올림픽 본선에서도 보다시는 4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전체 득점 랭킹 3위를 차지했고 대회 최고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평가받았다.

보다시는 유고슬라비아와의 지역예선전 2경기에 모두 출전했고, 폴란드는 유고슬라비아와 1승 1패를 거뒀지만 골득실로 이기고 역사상 최초로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브라질과 연장 혈투 끝에 5대6으로 패했고 보다시의 월드컵 나들이는 단 한 경기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A매치는 1939년 5월 27일에 열린 벨기에와의 홈경기였고 폴란드는 벨기에와 3대3으로 비겼다.

보다시는 폴란드 대표팀 외에도 실레시아 대표팀으로도 15경기에 출전했다.

2.3. 감독

2.3.1. 라이메르 니에도브치체

선수 생활을 그만둔지 얼마 되지 않아 보다시는 1948년 시즌 중반에 감독 없이 표류하던 라이메르 니에도브치체(Rymer Niedobczyce)의 감독이 되었다. 라이메르는 보다시가 감독일 때 14개 팀 중 11위로 강등권이었다.

보다시의 감독 데뷔전 상대는 KS 크라코비아. 하지만 라이메르는 0대4로 크라코비아에게 시원하게 털렸다. 보다시의 지휘하에 시즌이 끝났을 때 라이메르는 13경기에서 3승 2무 8패를 거뒀고 보다시의 데뷔 때보다 순위가 두 계단 더 내려간 13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렇게 라이메르는 강등된 4팀 중 하나가 되었고 보다시는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2.3.2. 루흐 호주프

1949년 시즌 10라운드 무렵, 보다시의 친정팀 루흐 호주프 역시 9위에 위치해 있었고 감독이 없었다.

보다시는 1949년 7월 3일 레흐 포즈난전에서 친정팀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호주프는 4대8로 깨졌다. 이번에는 다행히 보다시는 루흐 호주프를 8위에 올려놓아 팀의 강등을 피했다. 하지만 경질의 칼날은 피하지 못했다.

2.3.3. 피아스트 글리비체

1950년 정식으로 축구 감독 자격을 취득한 보다시는 당시 하부 리그 소속인 피아스트 글리비체에서 시즌 4위의 성적을 거뒀다.

2.3.4. 구르니크 자브제

1950년 10월, 보다시는 구르니크 자브제의 감독으로 취임했고 1951년 봄에 폴란드 리그는 2부 리그 개편으로 참가팀을 늘렸고 구르니크 자브제도 리그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보다시의 구르니크 공식 데뷔전은 1951년 4월 8일의 스크라 쳉스트호바(Skra Częstochowa)전이었고 구르니크의 5대1 승리로 끝났다. 구르니크는 2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구르니크 바우브슈흐(Górnik Wałbrzych)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 승격에는 실패했다.

1952년에 구르니크는 푸하르 폴스키 8강의 성적을 거뒀지만 리그에서는 개편으로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구르니크는 보다시가 1954년에 퇴임할 때까지 그 이상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기간은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하위 리그 감독직에서 폴란드 축구계로 한정하면 가장 긴 재임 기간이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보다시는 윙어에 필요한 능력을 고루 갖춘 선수로 30년대 폴란드 최고의 윙어로 평가 받았다.

4. 수상

4.1. 클럽

5. 여담

  • 보다시는 우치아 네에 조르지츠카(Łucja née Zorzycka)와 결혼해서 네 아이를 두었다.
  • 당시의 많은 축구 선수와는 다르게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