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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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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기원
開國紀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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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ruby(光, ruby=광)][ruby(緖, ruby=서)][1] [ruby(建, ruby=건)][ruby(陽, ruby=양)]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원년 서기 1392년
표기 개국(開國)
사용 국가 조선
대한제국
사용 시작 공식 1894년(개국 503년) 6월 28일
( 갑오개혁)
비공식 1392년 8월 13일
( 조선 건국)
폐지 공식 1895년(개국 504년) 12월 31일
( 건양 연호 공포)
비공식 1910년(개국 518년) 8월 29일
( 대한제국 멸망)
사용 기간 공식 1년 6개월 4일
비공식 518년 16일
1. 개요2. 서기와의 환산 방법
[clearfix]

1. 개요

조선 고종 연간에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갑오개혁을 진행하면서 기존의 중국 연호 광서를 버리고, 조선 왕조가 개창된 해인 서기 1392년을 원년으로 하는 개국기원을 도입하였고, 서기 1894년(개국 503년)부터 전면적으로 사용하였다.

즉, 사실 개국기원은 동양의 전통적인 방식의 연호와는 다르고, 엄밀히 말하면 기년법의 일종이다. 둘 다 큰 틀에서 기년법이라는 점이 공통적이지만 전통적인 연호는 해당 연호를 제정한 임금 때에만 쓰고 그 임금이 다른 연호로 바꾸거나[2] 아예 사망, 퇴위한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쓸 수 없다. 그러나 개국기원은 지속적으로 사용 가능하다.[3] 즉, 서력기원 예수의 탄생으로 여겨지는 시점[4]을 기점으로 잡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연도를 표기할 수 있듯이. 개국기원을 사용하면 역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연도를 표기할 수 있다. 이에 조선에서도 중국식 연호를 버리고 신식 기년법을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서력기원 유교 사상이 강하던 조선에서 사용하는데 아무래도 거부감이 있었으므로, 그 대체재로 등장한 것이 개국기원이다.

더구나 사실 개국기원을 1894년 처음 사용한 것도 아니고, 이전에도 사용되었음이 문헌과 유물을 통하여 확인된다. 당장 1876년에도 청나라가 싫었는지 “대조선개국 485년”이라고 표기된 서한을 일본에 보낸 사실이 있고, 이때 이후로도 청나라를 제외한 외국을 상대로 한 외교문서에는 개국기원을 사용하여 연도를 표기하여 왔다. 심지어는 근대식 주화를 1888년(개국497년) 처음 발행할때부터 개국연호를 쓴 연도를 연호가 광무로 바뀔때까지 계속 찍어냈다. 1894년부터 개국기원을 썼다는 말은, 같은 해 7월 군국기무처에서 모든 공문서에 개국기원을 쓰자는 의안을 상신하고 고종이 이를 윤허하면서 본격적으로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에서 일제히 개국기원을 쓰기 시작하였다는 것일 뿐이고, 건양이나 광무와 같은 일세일원 방식의 중국식 연호를 도입하여 칭원하면서 이를 선포하거나 기념하는 성대한 의식을 치른 사실도 없다. 개국기원의 전면적인 도입은 청나라 연호를 버린다는 의미가 컸던 행정적 조치이자, 예전부터 자체적으로 써 오던 방식을 좀 더 공식화한 것일 뿐이다.

서기 1896년 양력을 도입하면서 '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도입하였으나, 이후에도 간혹 칙령 등에서 개국기원이 사용된 사실이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도 간간이 사용된 적이 있다. 덕혜옹주가 사망한 1989년, 경기도 남양주시[5] 금곡동의 홍유릉 능역에 세워진 덕혜옹주의 묘비에, "開國五百二十一年五月二十六日生 五百九十八年四月二十一日卒 全州李后李旺載謹書(개국 521년 5월 26일 생 598년 4월 21일 졸 전주 이씨 후손 이왕재[6] 삼가 씀)""라는 비명이 새겨지기도 했고,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이 기년법을 사용한다.

2. 서기와의 환산 방법

  • 서기 [math(x)]년은 개국 ([math(x-1391)])년이다.
  • 개국 [math(x)]년은 서기 ([math(x+1391)])년이다.

[1] 독자적인 연호가 아닌 청나라 덕종의 연호다. 연호는 황제국만 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사대관계를 가진 제후국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황제국의 연호를 사용했다. [2] 일세 일원제 도입 이전에는 한 임금이 여러 연호를 만들었다. 일세 일원제 도입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한 임금이 재위기간 중 하나의 연호만을 만들었다. [3] 개국기원의 원년 이전 시점의 경우에는 개국전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4] 디오니시우스가 예수의 탄생시점으로 추론한 때가 서력기원 원년인데, 예수는 실제로는 이 시점보다 4년 전쯤에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5] 당시로서는 미금시 [6] 1928~2001, 대한민국의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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