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륜
姜鎬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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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99FF><colcolor=#fff> 출생 | 1925년 4월 2일 |
서울특별시 | |
사망 | 1990년 3월 12일 |
미국 | |
복무 | 대한민국 공군 |
1948년 ~ 19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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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본관은 진주(晋州)[1].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망덕리 장재마을[2]에서 태어났다. #한국 공군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들 가운데 일원이다.
2. 초기 생애
광주 사범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가 당시 일제의 강제동원령에 따라서 비행훈련을 받고, 조종사가 되었다.[3][4][5][6]이후 포로로 잡혀있다가[7] 정부수립 이전에야 조국에 돌아와서 항공관련 사람들과 협력하여 한국 공군 창설에 노력하였고,[8] 1948년 육군 항공부대에서 교육을 받은 후, 48년 9월 미군으로부터 10대의 L-4항공기를 인수한 조종사였으며, 동 비행기를 이용해 9월 15일 서울상공을 시위비행한 최초의 공군조종사 10명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9] 이듬해 10월 1일 공군 독립과 함께 10월 25일 공군 소위(군번 50045)[10]로 임관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여순 10·19사건' 진압작전과 '제주 4·3사건' 진압작전 및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또한 50년 5월 초 도입이 완료된 T-6 항공기 10대의 조종사 중 하나로 5월 14일 오후 2시 여의도기지에서 편대 비행을 하기도 하였다.
3. 6.25 전쟁 시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초기인 50년 6월에는 수도권 방어를 위한 항공작전에 참가하여 T-6기에 국산 15㎏짜리 폭탄을 싣고 출격하여 적의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가운데 초저공으로 비행하면서 남진하는 적 전차와 차량 행렬에 공격을 가해 적 전차 및 트럭 수대와 병력 25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미 공군의 P-51 머스탱(F-51)를 인수한 조종사 10명 중에 1명으로 7월 3일부터 본격적인 출격작전을 감행하여[11] 8월 낙동강전선 방어작전, 10월 북한 미림기지 공격을 위한 출격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50년 겨울에 중공군의 2차 공세로 후퇴하게 되자 제주기지로 이동하여 비행훈련을 지도하였고, 다음해 5월 1일에 백구기지에 투입되어 7월 23일 지리산 전투전경찰부대로부터 항공지원 요청을 받아 8월~9월 단독 전투훈련[12]을 겸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13][14][15]에 참여하였다.1951년 10월부터 실시된 한국공군의 강릉기지 단독출격작전에서는 제10전투비행전대의 소속 비행대대장[16]으로 출격작전을 지휘하였고,[17] 52년 1월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18]에서는 강릉전진부대장인 김신 대령을 도와서 작전처장으로 출격 편대와 폭격작전을 계획하였으며, 52년 6월 16일부터 53년 1월 16일까지[19] 제10전투비행전대장을 역임하며 UN공군이 주도하는 평양대공습 작전[20][21]에 참가하는 등 총 78회의 전투출격 임무수행과 전대장 및 참모로써 후배들의 출격작전을 계획하고 지휘[22]하였다.
강호륜 장군은 공군의 독립과 함께 공군의 원로 멤버로 활약하며 6.25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전쟁 후에는 주미대사관 공군무관 #, 공군본부의 인사국장, 작전국장, 감찰감, 공군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연합참모본부에서 근무 #하며 공군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한국에서는 51년 9월 28일 을지무공훈장에, 52년 5월 5일 충무무공훈장에, 53년 9월 1일 을지무공훈장[23], 54년 7월5일 을지무공훈장 # #[24], 56년 4월 14일 화랑무공훈장[25]과 보통상이기장[26]에, 또한 미국에서는 비행훈장[27][28], 공로훈장[29][30]을 수여받았으며,[31][32] 61년 7월 4일 공군준장으로 군문을 나섰다.
4. 이후의 삶
이후에는 공직으로 나아가서 교통부 산하의 大韓航空公社, 運航理事, 교통부 항공국장과 관광국장 및 航空審議會委員[33], 기획관리실장 # #,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 #까지 되면서 민간항공관련 업무[34]를 담당하였다. 이에 63년 12월 17일 대통령 표창 # #과 72년 홍조근정훈장 #을 수여받았다.5. 자손들
손자 역시 할아버지를 따라 공군 조종사가 되었으며, 6.25 70주년을 기념하여 2020년 6월 25일 국군 유해 147구가 하와이 DPAA에서 감식을 마치고 귀환할때 손자인 강병준 대위가 엄호 비행에 나서 화제가 됐다. #아들 강주순은 2021년 4월 미 국무성 국제안보/비확산 부문 차관보가 되었다.
[1]
박사공파(博士公派) 27세손
[2]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3]
아마도 1943년 항공전력의 긴급확충을 담은 각의 결정 후 급조된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특조)에 따라서 조종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4]
김정렬 장군의 회고록인 <항공의 경종>에서는 공군 창설시 인원의 분류를 9가지로 나눴는데, 첫번째는 일본 육사출신, 두번째로는 소년비행학교 출신, 세번째로 일반 대학을 나와 항공분야 장교로 종사한 출신, 넷째로 지원병 출신, 다섯째로 중국군출신, 여섯째로 일본 항공대에서 군속으로 종사한 출신, 일곱째로 일본 민간항공출신, 여덟째로 한국인이 만든 항공회사나 항공관계기관 종사자, 아홉번째로 글라이더 분야 종사들이다. 강호륜 장군은 세번째인 경우로 보인다.
[5]
1939년 3월3일자 동아일보 기사
#에 따르면 이때 광주사범학교에 합격하였고,
이곳에 따르면 소년비행병12기(대략 41년 입학)라고 한다. 또한 이곳
#의 내용을 참조하면 앞서 나온 특조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시행되었지만, 지원률이 낮은 것에 40년
#부터는 점차 강제적인 동원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6]
1952년 9월 3일 조선일보 기사내용 중에는 하마마쓰 육군비행학교(浜松陸軍飛行学校)를 44년 졸업하였다라고 나오는데, 만약 41년에 비행관련 교육을 시작한 것이 옳다면 3년간 교육받은 것으로 단기교육으로 육성되던 카미카제를 위한 것이 아닌 정규 조종사출신이 된다.
[7]
일반적으로 육군항공대 소속이기에 중일전에 참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들을 선발한 이유가
가미카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였기에 대체로 동남아 지역에 배치되었다.
[8]
<항공징비록>에 따르면 46년 8월 10일, 항공관련 단체들을 통합한 한국항공건설협회이 창립에 참여했다고 한다.
[9]
비행부대장 김정렬 대위의 지휘 아래 편대비행했으며, 이때에 강호륜 준장은 육군 일등상사(현 상사)였다.
[10]
참고로 공군 군번 중 가장 빠른 군번은 50001,
김정렬 중장이다.
[11]
생전에 7월 3일 출격을 실질적인 공격 효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태극 마크를 단 우리 공군의 F-51D전투기를 국군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출격에 나섰던 겁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전쟁기념관 기록에서는 1950년 7월 3일부터 연일 시흥, 노량진, 안양 등지로 출격한 그는 남진하는 적 전차 4대와 트럭 5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라고 되어 있다.
[12]
단순한 전투훈련 차원이 아니라 한국공군이 단독적으로 출격작전을 할 능력을 가졌음을 미 5공군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였다. 그리고 승인 이후 한국공군의 정예병력들은 강릉기지로 이동하여 동부전선에서 적 후방의 보급로와 보급창고 폭격과 지상군의 작전을 공중에서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3]
전쟁발발 이전의 토벌과는 다르게 인천상륙작전 이후 경부축선으로 빠르게 북상하는 UN군에게 밀려서 북쪽으로 가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도망친 병력들로 지리산 이외에도 남한의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부대들이 존재하였다. 특히나 지리산은 그 산세가 험하고 지역이 넓어서 많은 숫자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이였고, 여순사건 직후 그곳으로 도망간 빨치산들도 존재하였던 만큼 공산당들에게는 투쟁의 근거지였다. 실질적으로 군대에 의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은 50년 10월~53년 5월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이전까지는 지리산 전투경찰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14]
51년 9월 6일 동아일보 기사
#에 따르면 웅석봉 부근에서 공비 토벌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15]
51년 9월 4일 동아일보 기사
#에 따르면 김영환 대령과 함께 해주와 사리원 사이의 적 보급로 공습작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봐서는 공비토벌뿐 아니고, 북한군과의 전투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
51년 11월 제1전투비행단 10전대 12비행대대장으로 요기와 함께 원산지역에 출격, 적기와 공중전을 전개하던 중 피탄되었으나 능숙한 조종술로 애기와 함께 귀환하는데 성공하였다.
[17]
51년 10월 11일 한국공군의 역사적인 단독출격작전은 8시 55분 강릉전진부대장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제1편대가, 9시 20분 김두만 대위가 이끄는 제2편대가, 오후 1시 5분 강호륜 소령이 끄는 제3편대가, 1시 35분에는 정영진 대위가 이끄는 제4편대가 북쪽으로 날아가서 임무를 담당하였다.
[18]
52년 1월 12일과 13일 및 15일에 3차례에 걸쳐서 시도되었으며, 미 공군의 계속된 실패와 2차례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세계 항공전 사상 초유의 초저고도 급강하 폭격으로 결국 성공하였다.
[19]
53년 2월 15일 제10전투비행전대를 근간으로 제10전투비행단을 창설하였고, 이에 초대 제10전투비행전대장이였던 김영환 대령이 단장에 임명되었다.
[20]
평양대공습 작전은 1952년 7월 11일 미 제5공군과 미 해군함재기 등 822대를 동원하여 프레셔 펌프 작전으로 명명된 제1차 평양 대공습과 뒤이어 8월 4일에 284대로 제2차 공습을, 그리고 8월 29일에 1,122대(한국 공군 36대 참가)로 제3차 평양 대공습을 말하는데, 이 작전은 폭격 전에 평양 시민에게 군사목표인 평양을 떠나라는 사전경고의 내용이 담긴 전단을 살포한 후 실시되어 많은 심리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이 작전으로, 폭격목표로 선정된 지휘소/보급품 집적소/생산공장/병사/철도시설/고사포 진지 등 30개 목표 중 93%에 달하는 군사목표가 복구 불능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유엔 공군은 전투기 3대가 격추되고 27대가 손상을 입었다.
[21]
승호리 철교 폭파 성공 이후 제10전투비행전대의 전투 능력을 인정 받아 UN공군의 단위부대로 합동출격 할 수 있게 되었고, 평양대공습 작전에서 제10전투비행전대는 대동강철교 서쪽에 위치한 금속공장과 곡산공장을 목표로 지정받았다. 이때 강호륜 당시 소령은 52년 8월 29일 제1편대군장으로 출격하여 제2편대군장 전봉희 소령과 제3편대군장 오춘목 소령과 교대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급강화 폭격을 하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교대를 하였던 것은 당시 투입된 편대군은 강릉기지가 보유한 전투기 숫자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1952년 9월 3일 조선일보 기사
#
[22]
1951년 10월 11일부터 동부전선의 원산지구 및 서부전선 일대에 대한 보급로차단을 시작하였고, 서남지구 공비토벌 및 적 후방보급로차단작전을 계속 수행하면서 전투능력을 향상시켜 이듬해 10월 28일부터는 공지합동작전을 수행하였다.
[23]
국방홍보원 영상자료실에 있는 <국방뉴스 제7호>
#에 따르면 제10전투비행전대 1주년 기념식(영상은 9월 10일 뉴스라고 하면서 기념식은 8월1일 거행되었다고 하는데, 전대장이였던 강호륜 중령이 훈장을 수여받는 것을 보면 8월 29일에 실시된 3차 평양대폭격 이후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52년 8월 4일 동아일보
#에서 동일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기사에는 강호륜 준장의 이름이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참석자와 내용상 영상의 내용과 같다.})에서 동평양 폭격 공로로 당시 참모부장이였던
최용덕님께서 대리로 훈장을 달아주는 것을 볼 수 있다.
[24]
전쟁기념관에는 53년과 54년의 을지무공훈장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데, 53년의 을지무공훈장은
이곳에서 기록되어 있고, 54년은 신문기사에 나와 있다. 기존에 국방뉴스 영상은 전쟁기념관의 훈장 수여받았다라는 것을 토대로 52년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라고 생각되었으나, 대한민국 상훈-상훈업무관리에 나와 있는 소속을 보면 52년 충무무공훈장은 공군본부비행단에서 받았다고 하며, 53년 을지무공훈장이 10전비에서 받은 것이기에 영상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52년 충무무공훈장은 10전대 작전처장으로 승호리 철교폭파 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수여된 것으로 생각된다.
[25]
다른 공군관련자들을 살펴보면 無星花郎武功勳章인 것으로 보인다.
[26]
국가기록원 국방부일반명령 제81호
[27]
<국방뉴스 제9호>(52.11.6)에 10월 1일 사천공군기지에서 공군창립4주년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미5공군 사령관으로부터 표창받았다라는 내용이 있다.
[28]
52년 10월 3일 동아일보 기사
#에서 5공군사령관이 십자항공훈장(비행십자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을 수여하였다라고 나옴
[29]
국가기록원 일반명령 제169호
[30]
정확한 것은 아닌데, 58년 11월 6일 동아일보 기사
#에 나오는 주미대사가 수여하는 미국 지휘공로훈장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31]
이외에
김영환장군과 김신 장군의 경우를 보면 공비토벌기장, 한국전쟁 종군기장, 유엔종군기장, 대통령수장을 수여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32]
그러나 1952년 9월 3일 조선일보 기사
#에 따르면 이때 이미 미국 비행훈장 1개, 미공군기장 2개, 한국훈장 4개(앞서 연도별 훈장을 생각해보면 을지무공 2회, 충무무공 1회는 확인되지만, 1개는 확인불가)를 받았다라고 되어 있다.
[33]
1967년 7월 21일
안경모 교통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12명의 위원(교통부/경제기획원/외무부/재무부차관, 국제관광공사총재, 공군참모총장이 포함)을 위촉
1967년 7월 26일 매일경제
[34]
대표적인 중요한 업무로써 1967년 2월 9일 발효된The ROK-US Agreement on Status of Force in Korea, 韓美行政協定로 설치되는 한미합동위원회의 한국측 교통분과위원장
1966년 12월 23일 조선일보 기사
1967년 2월 9일 동아일보 기사과 유엔군이 담당하던 한국전역의 空域관리권 이관협정 조인
1965년 3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국제선 취항확장
1967년 1월 18일 동아일보 韓英航空협정(홍콩 경유 국제선) 기사
1967년 2월 10일 동아일보 韓日航空협정(일본 경유 국제선) 기사
1970년 2월 10일 경향신문 韓美航空협정 수정협상(미국 노선 확장),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대회참석
1964년 12월 25일 경향신문 기사
1965년 6월 17일 경향신문 기사등을 뽑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