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유기의 등장인물
자세한 내용은 가트(최유기) 문서 참고하십시오.2. 전함소녀의 등장인물
자세한 내용은 가트(최유기) 문서 참고하십시오.3. 인도의 구조물
1812년에 세워져 바라나시의 랜드마크로 남아있는 문쉬 가트
힌디어 घाट
영어 Ghat
남아시아 힌두교 문화권에서 쓰이는 용어로, 물가의 계단 혹은 언덕을 뜻한다. 바라나시의 경우처럼 힌두 성지들은 대부분 물 (특히 갠지스 강)을 접하고 있고, 성지에서 목욕 제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가트는 목욕 후 제사를 지내거나 휴식하는 공간으로 여겨진다. 망자의 화장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한다. 한편 언덕이라는 본연의 의미도 여전히 자주 쓰이며, 산간 지방의 지명이나 도로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4. 리비아의 도시
아랍어 غات
영어 Ghat
리비아 서남부의 도시. 사브하에서 서남쪽으로 400여 km 떨어져 있다. 서쪽의 알제리와의 국경과는 불과 10km 떨어져 있고, 건너편 도시인 자네트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인구는 약 2만 2천명으로, 사브하와 쿠프라에 이어 리비아 남부의 주요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투아레그 족으로, 리비아 내전 이후 민병대가 결성되어 같은 처지인 투부 부족과 함께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다.[1]
남쪽 4km 지점의 이웃 도시 알 비르카 (우물이란 뜻)에는 아그람 나다리프라는 옛 도시 유적이 있다. 여담으로 상당히 오지에 속하는 곳임에도 국립병원 수준의 종합 병원이 있으며, 중국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북쪽 15km 지점에는 가트 국제공항이 있으나 내전 이후 폐쇄된 상태이다. 해발 70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음에도 사막 기후로 무더운 편이나, 겨울에는 0도 대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4.1. 역사
오스만 시기에 세워져 이탈리아 지배기에 보강된 가트 성채
전통적으로 사하라 횡단 교역로의 거점 중 하나였고, 페잔 지방의 중심지였다. 중세 시기 사브하- 가다메스-우바리 및 동부 알제리를 포함한 사하라 사막 중북부를 다스린 켈 아제르 투아레그 부족의 수도였고, 14세기 차드의 카넴 보르누에 속했다가 17-18세기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1845년 경에는 영국인 여행가 제임스 리처드슨이 방문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19세기 말엽 가트는 수피 세력인 세누시야 령이 되었고, 1910년대 이탈리아에 대한 저항 거점이 되었다가 1923년에야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병합되었다.
사막 유목민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이탈리아 당국은 가트의 쿠케멘 언덕에 요새를 세웠고, 현재까지 남아있다. 2차 대전 중인 1943년 프랑스령 알제리의 프랑스 군이 도시를 점령했고, 1949년 11월에야 유엔의 개입으로 이탈리아에 반환되었다. 카다피 정권 하에 가트는 국경 수비대가 주둔하는 요새 도시로 남았고, 21세기 들어 종종 알카에다와의 충돌이 벌어졌다. 1차 리비아 내전기에는 카다피 측이 마지막으로 점유한 도시들 중 하나로, 카다피 사살 한달 전인 2011년 9월 말에야 함락되었다. 2차 리비아 내전기에는 2015년 투아레그 민병대가 자립하였다가, 칼리파 하프타르의 리비아 국민군 (동부 토브룩 정부)이 사브하를 점령하자 트리폴리 정부 측과 연합하여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