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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챔피언스 리그/2011-12 시즌/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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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2010-11 시즌 2011-12 2012-13 시즌
파일:chelseaCLwinners.jpg
파일:첼시 FC 로고.svg
2011-12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
첼시 FC
Man of the Match 디디에 드록바
파일:Final2011.jpg
UCL Final Munich 2012

1. 개요2. 경기 전 예상3. 선발 라인업4. 경기 내용
4.1. 전반전4.2. 후반전4.3. 연장전4.4. 승부차기
5. 여담

[clearfix]

1. 개요

2012년 5월 19일 독일 뮌헨 푸스발 아레나 뮌헨에서 열린 2011-12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첼시 FC FC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승리하였으며, 유럽 축구 연맹(UEFA) 선정 Man of the Match 디디에 드록바가, 팬 선정 MoM을 페트르 체흐가 수상하였다. 국내 중계는 MBC SPORTS+가 맡았다.

2. 경기 전 예상

첼시는 전임 감독의 막장행각으로 프리미어 리그에서 죽을 쑤었음에도 불구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드라마틱한 행보를 보여주면서 결승에 올라왔다.[1] 하지만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 존 테리, 하미레스, 하울 메이렐레스 등 주전들이 경고누적으로 출장 정지를 당한 것은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나마 첼시는 FA컵 우승을 따냈지만 리그에서의 부진으로 챔스 진출 티켓과 창단 첫 챔스 우승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빅 이어가 필요했다.

한편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 DFB-포칼 모두 준우승인 상태여서, 홈에서 열리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이긴다면 모든 것을 만회하고 성공적인 시즌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2] 홀거 바트슈투버와 신성 데이비드 알라바, 그리고 루이즈 구스타보 등이 경고누적으로 결장해 아나톨리 티모슈크, 디에고 콘텐토 등으로 빈자리를 메워야 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라온 두 팀 중 한 팀의 홈 경기장에서 결승전이 열리는 것은 1984년 이후 28년 만의 일이다. 바이에른의 선수진에 공백이 몇명 있긴 했어도 그건 첼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독일의 저명인사들이 자리지켜보는 가운데 데이비드 가렛의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Ligue Des Champions를 부르기 시작했다.[3] 분위기도 완벽했고, 그 밖에 모든 지표 역시 바이에른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에른의 홈구장 푸스발 아레나 뮌헨에서 결승전이 시작되었다.[4]

양 팀 모두 홈 유니폼을 선택했고, 양말 또한 붉은색과 하얀색을 그대로 착용했다.[5]

3. 선발 라인업

2011-12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선발 명단
첼시 FC
FW
디디에 드로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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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버틀란드
MF
후안 마타
MF
살로몬 칼루
}}}
MF
프랭크 램파드파일:주장 아이콘.svg
MF
존 오비 미켈
DF
애슐리 콜
DF
게리 케이힐
DF
다비드 루이스
DF
조제 보싱와
GK
페트르 체흐
FC 바이에른 뮌헨
FW
마리오 고메스
{{{#!wiki style="margin: -16px -11px;" MF
프랑크 리베리
MF
토마스 뮐러
MF
아르옌 로벤
}}}
MF
토니 크로스
MF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DF
디에고 콘텐토
DF
아나톨리 티모슈크
DF
제롬 보아텡
DF
필립 람파일:주장 아이콘.svg
GK
마누엘 노이어

4. 경기 내용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2011-12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2012. 05. 20 / 푸스발 아레나 뮌헨 (독일, 뮌헨)
주심:
[[포르투갈|]][[틀:국기|]][[틀:국기|]] 페드로 프로엔사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2002~2017).svg

FC 바이에른 뮌헨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첼시 FC 로고.svg

첼시 FC
1 - 1
(3 PSO 4)
83' 토마스 뮐러 (A. 토니 크로스) 88' 디디에 드록바 (A. 후안 마타)
승부차기
FC 바이에른 뮌헨 첼시 FC
3 4
필립 람 O 후안 마타 X
마리오 고메스 O 다비드 루이스 O
마누엘 노이어 O 프랭크 램파드 O
이비차 올리치 X 애슐리 콜 O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X 디디에 드록바 O
파일:MBC SPORTS+ 로고.svg
캐스터 해설
신승대 서형욱

4.1. 전반전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바이에른이 첼시를 상대로 거의 반코트 경기를 가져갔다. 징계로 빠진 선수들을 보면 첼시는 수비와 미드진에서 공백이 많았기 때문에 수비적인 전술로 경기를 진행하며 바이에른에게 점유율 6:4, 슈팅횟수 13:2로 열세에 처했으나 수비진과 골키퍼 페트르 체흐의 선방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경기 내내 첼시가 바이에른을 온더볼 상황에서 위협한 것은 살로몬 칼루의 돌파에 의한 딱 한 번이 전부였다.

4.2. 후반전

후반 70분에 들어서 첼시는 선수들을 교체하며 힘이 빠진 바이에른 선수들을 휘젓고 다니며 공격적인 전술로 바꿨다. 그러나 후반전까지 팽팽하게 버티다가 83분경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의 크로스를 받아 크로스의 크로스 헤더를 집어넣으며 선제골을 터뜨렸다.
파일:167170.jpg
바이에른 팬들은 우승을 자축하는 분위기가 돌았다. 바이에른은 선제골을 넣자마자 뮐러를 빼고 반 부이텐을 투입해 완전히 수비를 걸어잠그려고 시도했다.[6][7]
파일:167171.jpg
하지만, 첼시엔 디디에 드록바가 있었다. 페르난도 토레스가 측면에서 드리블 도중 볼이 끊기면서 코너킥을 얻어냈고 첼시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헛되게 할 생각이 없었던 드록바는[8] 88분경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비웃듯 코너킥 상황에서 앞으로 쇄도하며 90도 가까이 공의 방향을 꺾어 구석으로 빨려들어가는 환상적인 헤더를 집어넣으며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9] 참고로 이 코너킥이 이날 첼시가 얻은 유일한 코너킥이었다. 그리고 1:1 상황에서 더 이상 골이 터지지 않으며 게임은 연장전으로 들어갔다.

4.3. 연장전

연장전이 시작되고, 공격진까지 수비에 가담한 첼시는 93분 경 동점골의 영웅 드록바가 프랭크 리베리를 막으려다가 그만 PK를 주고 만다. 바르사와의 준결승 2차전에서 리오넬 메시가 골대를 맞추며 PK를 실축해 결승에 올라왔던 첼시는 다시 한번 체흐가 아르연 로번의 페널티 킥을 선방해내고, 98분 경에 부상당한 리베리가 교체되고 만다.[10] 연장전에서도 바이에른은 공격에 올인했으나 골이 터지지 않으면서 승부는 운명의 승부차기로 결정되게 된다.

4.4. 승부차기

승부차기는 바이에른이 선축, 첼시가 후축을 하는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중계 카메라 기준 우측 진영 골대에서 이루어졌다.
승부차기 골키퍼는 선발 라인업 그대로 바이에른은 마누엘 노이어, 첼시는 페트르 체흐가 맡았다. 아래 서술하는 킥의 방향은 모두 키커가 골대를 바라보는 기준이다.
  • 1순번

  • 바이에른은 지난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준결승에서 이케르 카시야스에게 승부차기를 막힌 주장 필립 람을 1번 키커로 내세운다. 왼쪽 방향으로 킥을 하며 실축했던 준결승전에서와 달리 오른쪽 중간 높이의 킥을 시도했고 페트르 체흐가 방향을 읽었지만 손에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공이 들어가게 된다.
    첼시는 이 당시 에이스였던 후안 마타를 1번 키커로 세웠다. 하지만 본인 기준 우측으로 찬 공이 준결승에서 무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카를 막아세운 노이어에게 가로 막히며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 2순번

  • 4강전 역시 2번째 키커로 나와 킥을 성공시킨 고메스는 이 경기에서도 2번째 키커로 나와 성공을 시킨다. 우측 땅볼 구석으로 깔아찬 킥은 골문을 통과했다. 체흐는 이번에도 방향을 읽었지만 역시나 구석으로 들어간 공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결승 당시 존 테리의 부재로 수비진의 큰 위험 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루이스는 예상 외로 안정적인 경기를 소화하며 승부차기 두 번째 키커로까지 나섰다. 기행이 취미인 선수라서 그런지 승부차기에서도 무려 페널티 박스 밖까지 나가며 매우 먼 거리의 페널티킥 도약을 시도했다. 많은 첼시팬들이 걱정했지만 그는 빠른 스피드로 공에 달려가 공을 우측 상단, 거의 골대의 꼭지점 부근에 차 넣으며 완벽한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11] 사실상 이 승부차기에서 가장 막기 어려운 킥을 만들어 내며 첼시의 첫 번째 승부차기 성공 주자가 되었다.

  • 3순번

  • 세 번째 키커가 공을 잡았을 때 국내와 해외 중계진은 매우 깜짝 놀란 목소리로 중계를 이어갔다. 바로 바이에른의 골키퍼 노이어가 승부차기 3번 키커로 나섰기 때문. 이 당시 바이에른 선수들 가운데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선수가 적어 노이어가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바이에른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설만한 선수 중 뮐러와 리베리는 교체로 아웃된 상황이었고 알라바는 경고 누적으로 출장 자체가 불가능. 로벤은 경기 중에 실축을 했고 크로스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4강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했던 탓에 본인이 고사했다고 한다. 키커로 나선 노이어는 좌측 하단에 킥을 하며 안전하게 성공시킨다. 그러나 체흐는 이번에도 방향을 읽어내며 다음 키커의 어깨에 엄청난 부담을 실어주기 시작한다.
    첼시의 평소 페널티킥 전담키커이자 주장 존 테리의 결장으로 인해 완장을 대신 차고 나온 프랭크 램파드가 첼시의 세 번째 키커로 나섰다. 평소에도 심리적인 수 싸움보다는 강하게 차 넣는 대담한 페널티킥 키커였던 램파드는 이 경기에서 역시 당시 최고 골키퍼 중 하나였던 노이어를 상대로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가운데 상단으로 강하게 꽂아 넣었고 노이어는 속수무책으로 골을 허용하고 만다.

  • 4순번

  • 어쩌면 바이에른 입장에서는 상당히 의외의 선수가 승부차기 주자로 올라왔다. 위에 노이어 문단에 서술한 대로 로벤과 크로스가 심리적인 부담이 컸던 탓인지 교체 투입으로 그라운드를 밟았던 이비차 올리치가 네 번째 키커로 나서게 된다. 그는 우측 구석으로 공을 차게 되지만 체흐는 이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날려 자신의 오른손으로 공을 막아낸다.[12] 킥의 강도, 공의 높이 등 여러모로 방향만 맞는다면 막아내기 쉬운 슛팅이었다. 바이에른의 첫 번째 실축. 체흐는 무려 네 명의 키커의 뱡향을 모두 맞추어 내며 기어코 하나를 막아내는 데에 성공한다.
    결승전에서 최고의 수비를 선보이며 로벤을 틀어막은 콜이 첼시의 네 번째 키커로 올라왔다. 그는 올리치와 똑같은 우측 구석으로 킥을 했다. 그러나 그 코스는 올리치의 슛팅보다 훨씬 깊고 빨랐고, 방향을 읽은 노이어가 손도 대지 못하며 결국 승부차기는 동점 상황에 서든 데스[13]로 접어들게 된다. 여담으로, 이 대회 후 개최된 UEFA 유로 2012에서 애슐리 콜은 8강전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똑같이 승부차기 4번 키커로 투입되었다. 그는 챔스 결승때와 똑같은 방향으로 킥을 했지만 이는 잔루이지 부폰에게 가로막혀 버리며 조국에게 8강 탈락이라는 아픔을 선사했다.

  • 5순번

  • 그리고 바이에른의 다섯 번째 키커는 4강전 마지막 키커로 나와 성공을 시키며 팀을 결승으로 이끈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였다. 그러나 슈바이니는 이 경기에서 로벤의 페널티킥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는 등 내심 불안해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고, 그 모습은 결국 승부차기에서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슈바이니의 킥은 준결승전 키커로 나섰을때의 자신감있던 킥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킥은 우측 하단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며 방향을 읽은 체흐의 손끝을 지나[14] 골포스트에 맞고 튕겨 나가게 된다. 패배를 직감한 그는 유니폼에 얼굴을 묻으며 좌절하고 만다. 체흐는 무려 다섯 명의 키커의 방향을 읽으며 바이에른의 키커들을 지배했다. 비록 한 명의 킥만 온전히 막아냈지만 그가 방향을 읽을 때마다 바이에른 키커들에게 다가온 부담감은 상당했던 것 같다. 거기에 경기 중 나왔던 로번의 페널티킥 선방까지 합치면 무려 6번의 페널티킥 방향을 읽은 것.
    그리고 첼시의 5번째 키커, 어쩌면 마지막 키커가 될 수 있는 선수는 88분 기적의 동점골의 주인공, 디디에 드록바였다. 드록바는 제법 차분한 것 같으면서도 나름 긴장된 것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페널티 스팟을 훑었고, 공에서 몇 발 떼지 않은 채 승부차기를 준비했다. 그는 단 두 걸음만에 킥을 시도했고 그 공은 노이어가 몸을 날린 방향의 반대인 좌측 하단에 꽂히며 첼시의 챔스 첫 우승의 축포가 되었다.
파일:167172.jpg
He's done it! The greatest night in the history of Chelsea Football Club! European Champions! They've beaten Bayern in their own backyard! They've found the holy grail!
(가 해냅니다! 첼시 FC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입니다! 유럽의 챔피언! 그들이 바이에른을 그들의 홈에서 무너트립니다! 그들이 성배를 손에 넣습니다!)
마틴 타일러[15] SKY 스포츠 캐스터

5. 여담

  • 축구계 원조 오일머니 구단이었던 첼시 입장에서는 매우 뜻깊은 우승이었다. 이 시즌 첫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신흥 강호였던 첼시는 "돈으로 역사를 살 수 없다" 라고 말했던 수많은 언론과 타 구단들의 비판을 종식시켰다.
  • 어떻게 생각하면 알리안츠 아레나의 기적이라는, 기적 시리즈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로 첼시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적적이고 다른 어떤 구단의 챔스 우승보다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뜻깊은, 제3자 입장에서 보아도 적지 않은 인상을 준 우승이었다.
  • 이 경기에서 깜짝 선발 출전한 라이언 버트란드는 이 경기가 챔스 선발 데뷔전이었다. 챔스 데뷔를 챔스 결승에서 그것도 제 포지션이 아닌 윙어로 뛰었던 것. 버트란드의 주 포지션은 레프트백이다. 그가 선발 출전을 하게 된 것은 아래에 언급된 것처럼 스티브 홀랜드 코치가 전술적으로 결정한 것.
  • 첼시는 이 PK승 덕분에 리그 6위를 차지했음에도 토트넘을 유로파 리그로 밀어내고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차기 시즌 챔스 진출권을 획득했다. 챔스에 올인했던 로베르토 디 마테오 감독 대행의 선택이 적중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후 에덴 아자르 영입에도 성공했으니 아주 성공적인 선택이 되었다.[16]

파일:7XSjnCQ.jpg
  • 하지만 이 기적을 장식하는 장면의 중심은 주장인 존 테리도, 부주장 프랭크 램파드도, MVP 디디에 드록바도, 수문장 페트르 체흐도 아닌 조제 보싱와가 되었다.[17][18] 참고로 드록바는 오랫동안 첼시를 지켜온 테리와 램파드가 정중앙에서 트로피를 동시에 들어올릴 수 있도록 선수들에게 길을 트라고 지시하였고, 보싱와가 앞에서 길을 막고 있자 드록바가 계속해서 비키라고 눈치를 줬는데도 이를 끝까지 무시하더니 이윽고 세레모니 시간이 되어 선수들의 환호 속에 테리와 램파드가 트로피를 들려고 하는데 보싱와가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트로피를 낚아채 들어올렸다. 보싱와의 행동에 당황한 동료들은 자연스럽게 테리와 램파드가 앞으로 나가서 들 수 있도록 시도했지만 이에 보싱와는 한 술 더 떠서 트로피를 아예 빼앗았다. 저 사진으로 인하여 만약 이루어졌다면 첼시 팬들에게는 영원한 전설로 남았을 법한, 프랭크 램파드 존 테리가 세레모니에서 동시에 컵을 드는 역대급 장면을 망쳐버렸다. 그렇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며 보싱와는 영원한 첼전드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리고 9년 뒤, 두 번째 우승을 거머쥐면서 이번엔 팀의 주장인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가 맛깔나게 센터에서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이때 첼시 커뮤니티에서는 일제히 "이제 보싱와 센터 사진 안 써도 된다!(...)"라며 환호했을 정도로 저 사진은 첼시 팬들에게 상당히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 경기 이후 체흐는 로벤의 PK에 대한 인터뷰를 했는데 "솔직히 로벤이 어디로 찰 지 몰랐다. 로벤은 반반의 확률로 왼쪽 코너와 오른쪽 코너로 페널티 킥을 처리한다. 페턴도 없었다. 다만 로벤이 연장까지 뛰느라 지쳐있을 시간대였고, 이로 인해 정확하게 차는 것보단 강하게 차는 걸 선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왼발잡이였다면 강하게 차기 위해선 오른쪽 코너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라고 답했다. 또한 바이에른의 골대 쪽으로 승부차기 방향이 정해져 걱정되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바이에른의 서포터들이 내 등 뒤로 욕을 퍼붓고 우리의 패배를 노래하고 있었지만 내 눈과 심장은 팬들과 동료들의 믿음만이 보일 뿐이었다."라고 답했다.
  • 바이에른 팬들에게는 199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게 선제골까지 넣고 경기 내내 우세한 운영을 하다가도 추가시간 코너킥에서 연속해서 두 골을 먹으며 믿을 수 없는 역전패를 당한 캄프 누의 비극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그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오죽하면 제4의 뮌헨 참사라고들 칭했을까. 더구나 이 결승전은 본인들의 홈 구장인 푸스발 아레나 뮌헨에서 펼쳐진 경기였다. 프란츠 베켄바워 명예회장도 이 경기가 캄프 누에서의 패배보다 더 쓰라린 상처였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이 시즌 바이에른은 이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밀려 분데스리가, DFB-포칼을 준우승하고 챔스마저 준우승해버렸던 것이다. 유럽 축구 역사상 유이한[19] 준우승 트레블의 비극을 겪은 것. 훗날 울리 회네스 바이에른 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날의 패배 이후 모든 선수단이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을 받아야만 했다고 밝혔다.
  • 경기 내내 과한 욕심을 부리면서 흐름을 끊어먹고 PK까지 날린 로벤은 한동안 바이에른 팬들의 원성을 한몸에 받았다.[20] 결승전 직후 UEFA 유로 2012 대비 겸 친선 목적으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과 바이에른의 경기가 열렸는데 뿔난 바이에른 팬들이 시종일관 로벤에게 야유를 퍼부어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판 봄멜은 "로벤이 있어서 결승까지 갔던건데 바이에른 팬들은 배은망덕하다."라는 비판을 날리기도 했다.
  • FIFA 시리즈에서 앨런 스미스 해설위원이 이 경기 얘기를 아주 많이 한다...
  • 첼시 FC는 이 우승으로 인해 런던 연고의 클럽 중 최초로 빅 이어를 들어올린 클럽이 되었다. 또한 현재까지 유일하게 빅 이어를 들어올린 런던 연고의 클럽이기도 하다. 그리고 재벌이 인수한 클럽구단중에서는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한 팀으로 기록된다.
  • 2021년 1월에 후일담으로 당시 스티브 홀랜드 첼시 수석코치가 칼럼을 기고했는데, 그 칼럼에서 이 날 사용한 전술은 2011-12 시즌 DFB-포칼 결승전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사용한 전술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결승전 준비를 위해 이 경기를 통해 전력분석을 하던 중에 이 전술이 바이에른을 상당히 효율적으로 잘 막을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이 전술을 사용했고, 훈련 과정에서 라이언 버트란드가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였으며 측면에서 풀백과의 협력 수비에는 플로랑 말루다보다는 버트란드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어서 윙어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 준우승 트레블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인 바이에른은 차기 시즌인 2012-13 시즌에 절치부심하여 분데스리가 최단 기간 우승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고, DFB-포칼에서도 우승,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전도 다시 올라가 도르트문트를 2 대 1로 꺾고[21] 우승을 차지해 트레블을 달성했다. 후일담에 의하면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 모두 11-12 시즌의 비극이 트레블을 달성하는 원동력이자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한다.
  • 반면 첼시는 차기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조별예선에서 탈락(!)해 UEFA 유로파 리그로 떨어지는 등 부진했으나, 그 떨어진 유로파 리그에서 우승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사상 최초의 다운그레이드 우승이었다. 챔스 결승 상대 바이에른과 2013년 슈퍼컵에서 재회하게 된 건 덤.[22]
  • 첼시의 우승으로 1997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우승 이후 챔피언스 리그 첫 우승을 차지한 팀이 나오게 되었다. 이는 무려 15년이나 걸린 것이다. 참고로 그 전까지는 1~5년간의 간격을 두고 챔스 첫 우승팀이 나왔었다.
  • 해당 시즌 첼시의 우승 이후 2022-23 시즌 전까지는 챔피언스 리그 첫 우승을 차지한 팀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챔스 우승이 없는 여러 팀들이 챔스 첫 우승을 위해 결승전에 진출해왔으나[23] 모두 우승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24] 그리고 2022-23시즌, 2년 전 통한의 결승전 패배를 당했던 맨시티가 마침내 인터 밀란을 1:0으로 꺾고 창단 첫 빅 이어[25] 트레블을 달성했다.]를 들어올리면서 드디어 23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이 탄생하게 되었다.[26]

[1] 조별리그에서는 바이어 04 레버쿠젠을 승점 1점차로 따돌리고, 16강 1차전에서 SSC 나폴리에게 1:3으로 패했지만, 홈에서 4:1로 기적적으로 역전한다. 8강에서 SL 벤피카를 여유있게 3:1로 이기고 나서, FC 바르셀로나를 홈에서 1:0, 원정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2:2라는 스코어를 만들어 3:2로 결승전에 올라왔다. [2]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1주일 전에 베를린에서 열렸던 포칼 결승전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5-2로 대패하면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상황이었다. [3] 컨디션 때문에 라이브가 아니라 립싱크를 했다. [4]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는 경기장에 명명권을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어서 알리안츠 아레나가 아니라 푸스발 아레나 뮌헨이라는 기존의 명칭으로 불렸다. [5] 바이에른 : 상의 빨간색, 하의 빨간색, 스타킹 빨간색 / 첼시 : 상의 파란색, 하의 파란색, 스타킹 하얀색 [6] 뮐러는 이날 로베리와 더불어 찬스를 많이 놓쳤지만 바이에른의 공격진 중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한 선수였다. 그러나 교체된 후 결과적으론 드록바에게 골을 먹히고 경기를 끌려가게 되면서 바이에른에게는 공격의 축 중 하나를 스스로 빼버린 최악의 악수가 되고말았다. [7] 득점 직후 슈바인슈타이거가 하인케스에게 직접 뮐러가 많이 지쳤다며 빼는 게 어떻겠느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뮐러 본인도 그때 자신은 완전히 지쳤다며 교체 결정 자체에는 동의했다. 게다가 대신 들어온 반 부이텐은 바이언에서 가장 공중볼에 강력한 선수였다. [8] 이때는 상하이 선화로의 이적이 확정되지는 않았어서 마지막 경기가 될줄은 대부분 몰랐다. 훗날 첼시로 다시 복귀하기는 하지만 다시 복귀할진 몰랐고 본인의 전성기때로 따져보면 첼시에서의 마지막 경기. [9] 헤딩할때의 공 파워가 워낙 강했는지 노이어가 쳐냈음에도 위로 솟구쳐서 들어갔다. [10] 드록바가 공을 막을려다가 발목을 찼는데 이때 부상당한듯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PK는 막혔고, 리베리에게 계속 위협받던 보싱와의 우측면은 올리치가 대신 들어옴으로 인해 안정되었으므로 오히려 첼시에게 전화위복이 된다. [11] 노이어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지만 설사 방향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막기 힘든 엄청난 페널티킥이었다. [12] 체흐는 왼손잡이임에도 올리치의 킥을 오른손으로 완벽하게 방어했다. [13] 한 순번에 결정되는 승부차기 룰. 같은 순번의 한 키커가 성공하고 다른 키커가 실축하면 경기가 바로 종료되는 것이다. 당시 4번 키커까지 동점 상황이었기에 5번 키커부터 서든 데스 룰이 바로 적용될 수 있었다. [14] 자세한 화면을 보면 체흐의 손가락 끝에 아주 살짝 맞아 공의 회전이 아주 조금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15] FIFA 시리즈의 캐스터이기도 하다. [16] 그리고 아자르는 드록바가 그랬던 것처럼 첼시에서의 마지막 경기인 유로파 리그 결승전에서 골을 넣고 맹활약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고 팀을 떠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자르가 떠난 뒤 우승 경쟁을 하기엔 부족해졌다는 평가를 들은 첼시는 한 광인의 등장으로 아자르와의 이별 후 2시즌 만에 챔스 우승을 하게 된다. 이 당시 많은 첼시 팬들이 우승에 감격함과 동시에 팀의 레전드 주축들이 챔스 우승을 맛본 것을 축하했음에도 또다른 레전드급의 가치를 지닌 아자르가 꿈에 그리던 레알 마드리드 이적을 선택하여 함께 챔스 우승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워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자르는 다음 시즌 레알 마드리드 CF의 우승으로 인해 커리어에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을 어찌어찌 추가하는 데에는 성공한다.그리고 레알 팬들은 분노했다. [17] 당시 해축갤에서는 30년 후 어린 해축팬들에게 보싱와가 첼시의 레전드로 기억될 것이다라는 자조섞인 농담까지 나왔다. [18] 실제로 2021년 현재 어린 축구팬들 중에서 사진 속의 보싱와를 드록바와 착각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MVP였다니까 중앙에서 컵을 들었겠지? 피부가 검네? 드록바인가보다. [19] 다른 한번은 2001-02 시즌의 바이어 04 레버쿠젠. 여담으로 이때 레버쿠젠의 주전 미하엘 발락 베른트 슈나이더 등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준우승하며 전무후무한 준우승 4관왕까지 달성해버렸다.(...) 이 경기에서 교체 명단에 있던 한스외르크 부트도 레버쿠젠 시절 달성한 콩레블을 이 시즌에서 또 겪고 은퇴했는데 정작 다음 시즌 바이에른은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20] 사실 단순히 이 경기 하나 말아먹은 것으로 욕을 먹은 건 아니고, 4월에는 분데스리가 1위 자리를 놓고 벌인 도르트문트와의 숙명의 일전에서도 PK를 실축했고,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에서는 리베리와 주먹다짐을 하는 등 시즌 내내 로벤을 둘러싼 온갖 사건이 많았다. [21] 이 때 결승골을 넣은 선수는 다름 아닌 1년 전 결승에서 그렇게 욕을 먹었던 로벤. [22] 이 경기는 반대로 바이에른이 추가시간에 극적인 동점골을 넣어 승부차기로 끌고 가서 우승했다. [23] 2014년 2016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차례대로 토트넘 홋스퍼 FC, 파리 생제르맹 FC, 맨체스터 시티 FC가 결승전에 진출했다. [24] 그 중에서 20-21 시즌 맨시티의 첫 챔스 우승을 저지한 팀은 다름아닌 첼시였다. 반면 유로파 리그에서는 그 다음 시즌에 첼시가 첫 우승을 차지한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비야레알 CF가 처음으로 유로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5] 동시에 처음으로 [26] 재밌게도 전력 면에서 이 시즌에 첫 우승을 차지한 첼시는 바이언보다 열세였던 반면에 2022-23 시즌에 첫 우승을 차지한 맨시티는 인테르보다 오히려 우세했었다. 맨시티는 최고 유망주였던 엘링 홀란드, 최고의 미드필더 케빈 더 브라위너, 우승의 주역 로드리 등 뛰어난 선수를 다수 보유했던 반면 인테르는 주목할만한 선수가 라우타로 마르티네스, 니콜로 바렐라 정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대회가 끝나고 선정한 베스트 11에서도 인테르는 두명밖에 들어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