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4 12:29:32

울리 회네스

울리 회네스의 수상 이력
{{{#!folding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72

}}} ||
FC 바이에른 뮌헨
Fußball-Club Bayern München e.V.
파일:attachment/울리 회네스/Uli02.jpg
<colbgcolor=#dc052d> 이름 울리 회네스
Uli Hoeneß
본명 울리히 "울리" 회네스
Ulrich "Uli" Hoeneß
출생 1952년 1월 5일 ([age(1952-01-05)]세)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울름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81cm
직업 축구선수 ( 공격형 미드필더, 공격수 / 은퇴)
축구경영인
소속 <colbgcolor=#dc052d> 선수 VfB 울름 (1959~1965 / 유스)
SSV 울름 1846 (1965~1970 / 유스)
FC 바이에른 뮌헨 (1970~1979)
1.FC 뉘른베르크 (1978~1979 / 임대)
스태프 바이에른 뮌헨(1979~2019 / 회장)[1]
바이에른 뮌헨 (2019~ / 명예회장)
바이에른 뮌헨 (2019~ / 부이사장)
국가대표 35경기 5골 ( 서독 / 1972~1976)

1. 개요2. 선수 경력3. 국가대표팀 경력4. 행정가 경력
4.1. FC 바이에른 뮌헨 회장
4.1.1. 탈세 사건4.1.2. 석방 이후
5. 기타6. 기록
6.1. 우승 기록6.2. 리그 기록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축구인. 친동생 디터 회네스와 함께 바이언의 레전드 공격수 중 하나로 추앙받는다. 현역 시절엔 주로 공격수였고, 100m를 11초에 주파해 "총알탄"이라 불리며 분데스리가에서도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선수 중 한 명이었고, 이런 주력과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파괴적인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다만, 이름값과는 별개로 득점 자체는 압도적으로 많지는 않은데, 당시 바이에른과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스코어링을 전담하는 "폭격기" 게르트 뮐러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득점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어도 그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짧은 현역 기간이었지만 107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끝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7세의 너무도 이른 나이에 은퇴한 비운의 재능이기도 했다.

은퇴 이후 행정가로 반평생을 바치며 팀의 재정적인 부분에서의 발전에 지대한 공언을 했고, 사실상 현재 바이에른 뮌헨을 직접 두 손으로 일군 장본인이다. 그러나 말년은 정말 좋지 못한데, 13-14 시즌 도중 개인 재산 탈세 의혹이 제기되었고, 회네스는 이를 자수했으나 공판에서는 실형이 선고되었다. 회네스는 항소를 포기하고 1심을 받아들여 바이에른 회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금고형에까지 처해졌다. 팀 업무를 위해 감옥 밖으로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거주 자유는 없어서 뮌헨 교도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2016년 2월 29일에 형기 만료로 석방되었고, 같은 해 11월 26일 부로 938일 만에 바이에른 회장직에 복귀하였다.

2. 선수 경력

1970-71시즌, 데뷔하자마자 31경기 8골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분데스리가 준우승과 DFB-포칼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8시즌간 바이에른 뮌헨과 함께하며 8개의 타이틀을 획득했는데, 그 중 72,73,74 분데스 3연패와 74,75,76 유러피언 컵(現 UEFA 챔피언스리그) 3연속 제패한다. 특히 바이에른의 첫 유럽 제패당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결승전 재경기에서 환상적인 역습으로 멀티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4대0 대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최고의 유망주의 현역시절은 매우 험난했다. 위의 프로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현역으로 뛴 기간이 굉장히 짧다. 74-75 유러피언컵 리즈 유나이티드 FC와의 결승전에서 전반 막판에 당한 무릎인대 파열로 선수생활에 치명적인 위기가 닥쳤다. 당시 회네스의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재활에 매진했으나 결국 끝끝내 기량을 되찾는데 실패하며 1. FC 뉘른베르크 임대를 끝으로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고 만다.

3. 국가대표팀 경력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에 1972년 A팀에 콜업되어 UEFA 유로 1972 1974 FIFA 월드컵 서독 우승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사실 그의 기량이 명백하게 뛰어났다기보다 당시 서독 국대에서 바이에른 뮌헨 멤버가 6명이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팀웍 차원에서 다른 경쟁자들 사이에서 선택받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국대에서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트롤짓을 하며 대표팀의 발목을 잡았다. 197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경기 시작 직후 요한 크루이프에게 무모한 태클을 걸어 패널티킥을 헌납한 인물이 바로 회네스였다. 역적이 될 뻔했으나 게르트 뮐러와 수비진의 맹활약으로 역전승을 거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며 그의 역적질은 묻혔다.

UEFA 유로 1976에도 참가했다.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했고, 그의 실축으로 서독은 우승에 실패했다. 서독의 메이저 대회 3연속 우승이라는 전대미문의 위업이 그의 실축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 경기는 승부차기에 강한 것으로 유명한 독일 대표팀이 유일하게 승부차기에서 패한 경기로 남아 있다.

당시 24세의 창창한 나이였지만 이 대회를 끝으로 더이상 국가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했다.

위에 서술된 국가대표팀에서의 트롤짓으로 인해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도 역적 이미지가 있는 듯 하다. 회네스와 사이가 안좋기로 유명한 로타어 마테우스도 베켄바워도 아니고 루메니게도 아닌 회네스 따위의 인물이 바이에른 뮌헨을 좌지우지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생각하는 듯.

4. 행정가 경력

4.1. FC 바이에른 뮌헨 회장

은퇴한 바로 그 해(1979년), 회네스는 구단 역사상 최연소인 27세의 나이로 바이에른의 이사 자리에 앉았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는데, 75-76 유러피언컵을 끝으로 유럽대항전에서도 힘을 점점 잃었고, 분데스리가의 패권도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함부르크 SV에게 내주고 있었다. 70년대 불의 시대를 함께한 멤버들도 속속 은퇴하거나 다른 팀으로 옮겨갔고, 구단은 750만 마르크에 달하는 빚더미에 앉아있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회네스는 미국의 스포츠 클럽들의 구단 운영을 벤치마킹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수입의 다변화였다. 당시 바이에른은 구단 수입의 85%를 관중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중석 절반정도가 지붕에 덮여있지 않은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의 구조 특성상 비라도 내리면 관중석이 텅텅 비었고, 이는 수익에 직격탄이었다.

회네스는 주변 기업들과의 스폰서쉽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구단 팬샵도 열었다. 이 또한 미국 스포츠 클럽들의 마케팅에서 배워온 것인데, 당시 회네스는 "바이에른이 우표나 엽서 쪼가리 팔던 조그만 매장을 갖추고 있던 시절, 미국 농구/야구 팀들은 구단 전용숍에서 티셔츠나 스카프, 모자, 가방 등을 팔고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회네스는 곧장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겼고, 구단 로고가 들어간 각종 스포츠 용품을 팔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어느 구단이나 흔히 갖추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유럽에선 매우 생소한 "팬샵"을 도입한 것이다.

1980년대에는 TV 중계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중계권료 확보에 힘썼으며, 여러 큰 기업들과 스폰서십 체결에도 앞장섰다. 이러한 노력으로 바이에른은 구장 입장료 수익이 전체 매출에서 갖는 비중을 15~20%대까지 낮추는데 성공했다. 재정 문제가 해결되자 바이에른의 성적도 차츰 상향되었고, 80년대에는 10번중 7번을 바이에른이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렸을 정도로 활약했다. 회네스가 현역시절에 들어올린 타이틀은 8개였지만[2], 그가 보드진이 된 후 바이에른은 40개가 넘는 타이틀을 들어올렸다. 유럽대항전에서의 부진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준우승 4회, UEFA 컵 우승 1회 등을 기록하며 차츰 씻어나갔다. 30여년을 넘게 재직하는 동안 구단 매출은 20배 이상 증가했고, 현재 전세계 브랜드 가치도 2013년 한때에는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2015년 현재 레알 마드리드 CF,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이어 3위를 기록중이다.

여타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조하면 여러 일화를 더 읽을 수 있다. #

4.1.1. 탈세 사건

그러던 2013년, 스위스 개인 비밀계좌에 엄청난 금액의 현금을 탈세중이라는 기사가 속속 퍼지기 시작했고, 마리오 괴체가 바이아웃으로 영입될때도 회네스의 이러한 탈세 기사를 덮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클럽 수뇌부 회의에서는 즉각 해명을 요구했고, 회네스는 420M이라는 엄청난 금액에 대해 세금을 지불하지 않은 것을 시인했다. 클럽의 자금을 빼돌린 것은 아니고 개인 사업을 하다 불어난 돈이었는데, 회네스는 이 미신고수입에 대해 자수하고 세금을 납부하면 벌금형에 머물 줄 알고 이를 실토했다. 하지만 검사의 생각은 달랐고, 결국 기소되어 2014년 3월 14일 뮌헨 지법 공판에서 3년 6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회네스는 이에 항소하지 않기로 하고 바이에른 회장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2015년 1월부터 교도소에서의 사회 봉사 차원에서 바이에른 유스 팀에서 일했다. 독일에는 'Freiganger' 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 제도는 낮에는 교도소 밖으로 나가서 일을 하고 저녁과 밤은 교도소로 돌아와야 하는 제도이다. 현재 바이에른 뮌헨은 35m 정도를 투자해 유스 팀을 완전히 개혁할 예정이다.

현재 울리 회네스가 물러난 바이에른 뮌헨 수뇌부는 카를 호프너 회장과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CEO가 사실상 권력을 잡고 있지만 오히려 이 둘은 얼굴 마담이며 아직 울리 회네스가 실세일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4.1.2. 석방 이후

석방된 이후 그는 다시 복귀를 추진했고 회장 선거에 단독 출마해 98.5%라는 득표율을 획득, 바이에른 회장직에 부임하였다.

석방된 이후의 행적은 바이에른 팬 입장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17-18 시즌이 끝나고는 거의 바이에른 팬들의 주적인 상태. 특히 오른쪽 윙어가 당장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는 유리몸 아르연 로번 한 명임에도 빅영입은 없다고 못박는 다거나 중원에서 빌드업을 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자원인 티아고를 팔려는 모습을 보이며 바이에른 팬들에게 노망난 것이 아니냐며 비난받고 있다.[3]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이 졸전 끝에 조별리그 탈락을 하자 그 원흉 중 하나로 지목된 외질에게 인신 공격에 가까운 망언을 퍼부어 논란이 되고 있다. 애초에 잘잘못을 떠나 한 클럽의 회장이라는 인물이 자국 대표팀에 헌신했던 선수에게 스파이라는 등[4] 사석에서나 할 법한 과격한 발언을 하며 비판받고 있다.

2018-19 시즌 도중 바이에른 뮌헨이 리가에서 2연패를 기록하며 6위까지 추락했을 때, 긴급 기자 회견을 열어 '우리 팀의 선수단을 향한 악의적인 보도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밝혔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뜬금없이 후안 베르나트에 대한 비난을 작렬하며 모순된 행동을 보였다.[5]

여담으로, 한국 내에서 기자들이나 축빠들이 바이에른 뮌헨 회장을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루메니게는 바이에른 뮌헨 사장이고, 회네스는 회장이다. 헌데, 한국 내에서 회네스의 실언 이후 루메니게가 비판을 받고 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임기가 종료되는 2019년 까지만 바이에른 뮌헨 회장직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그의 후임으로는 바이에른 뮌헨의 레전드이자 독일 축구 국가대표의 레전드 올리버 칸이 유력시 되고 있다. 2019년 7월 23일 울리 회네스 회장이 언론에 이번 11월 재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며 임기가 종료되는 즉시 은퇴할것이라 밝혔다. 이에 선수단은 충격을 받았으며 장장 47년간 있었던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는것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2019년 8월 30일 바이에른 공식 홈페이지에 오피셜이 나왔다. 울리 회네스는 11월 재선에 불출마 하며 후임으로는 허버트 하이너 전 아디다스 CEO를 추천했으며 감사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허버트 하이너를 추천했다. 이로서 47년간의 바이에른 회장직을 떠나게 되었다. #

2019년 FC 바이에른 뮌헨 연례 총회에서 울리 호네스는 작별인사를 고했다. 바이에른 인생 마지막인 그는 작별인사에서 6천여명의 바이에른 회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지난 47년간의 바이에른 인생의 끝을 고했다. 그리고 클럽 역사상 6번째 명예 회장에 임명되었다.

5. 기타

  • 디터 회네스와는 형제 관계이다. 형제가 나란히 한 팀의 레전드로 추앙받고 있는 셈.
  • 1982년 경비행기 추락으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뻔했다. 그는 뒷좌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천운으로 경상만 입었다. 사고 발생 후 약 한 시간이 지나서 공원 관리자가 그를 발견했을때 그는 춥다라는 말만 계속 했다고 한다. 회네스는 지금까지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사건 이후 알코올 중독으로 힘들어하던 게르트 뮐러를 비롯한 곤경에 빠진 다른 바이에른 선수들을 도왔다.
  • 1985년 동업으로 창업을 했다. 그리고 사업을 아들인 플로리안에게 물려주었다.
  • 2021년 한지 플릭 감독과 하산 살리하미지치 단장과의 불화가 발생하였을 때 살리하미지치 단장을 지지하였고 결국 플릭 감독이 파워게임에서 밀려서 사임을 하게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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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가를 즐겨피는 골초이다. 독일의 흡연법[6]상 실내/외에서 자유롭게 필 수 있는데, 프랑크 리베리의 집에서 여유롭게 시가를 물고 펴대거나, 경기장에서도 맘껏 펴대는 모습이 사진에 많이 찍혔다. 특히나 회네스의 시가를 피는 모습은 마피아 보스 같은 포스를 자랑한다.[7]
  • 독일 축구의 아이콘이자, FC 바이에른 뮌헨의 행정가 이미지가 크지만, 뉘른베르크의 소시지 공장을 운영하는 식품회사 사장이기도 하다. 독일 최대의 마트인 알디에 PB상품으로 납품도 하고, 옥토버페스트 행사 납품이나, 바이에른 뮌헨의 행사때 쓰이는 음식은 전부 회네스 회사의 소시지를 쓴다. 알디에서 본인이 직접 홍보를 하기도 했는데 소시지 회사 규모도 나름 중견기업수준으로 크게 키웠다. 탈세 사건 역시도 바이에른 뮌헨의 예산을 횡령한게 아니라 본인의 소시지 공장을 운영하며, 일부 수익을 스위스 은행 계좌로 빼돌린 사건이었다.
    여러모로 축구뿐만 아니라 사업쪽에서도 굉장히 성공한 편이다.
  • 2022년 1월 DFL의 회장으로 취임한 도나타 호펜이 분데스리가 플레이오프 도입을 언급하자 그녀를 까면서 "DFL 새 수장은 바이에른 뮌헨의 지배력을 깨는 방법만 고민하고 있다. 세계 어느 빅리그에도 플레이오프는 없다."고 인터뷰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8]
  • 교도소 복역시절 한 죄수가 카메라가 달린 볼펜으로 나체로 샤워하던 자신의 사진을 찍었고 언론사에 팔려고 했었다고 밝혔다. 2017년 그 죄수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사진은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6. 기록

6.1. 우승 기록

6.2. 리그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69/70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0 0 1 0 0 0
1970/71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31 6 6 0 7 0
1971/72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34 13 5 3 8 1
1972/73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34 17 6 3 6 2
1973/74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34 18 4 2 10 6
1974/75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28 8 3 1 7 3
1975/76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17 4 5 1 5 1
1976/77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27 9 4 4 8 0
1977/78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30 11 2 0 6 1
1978/79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분데스리가 4 0 2 0 - -
1978/79 1.FC 뉘른베르크 독일 분데스리가 11 0 1 0 - -

[1] 수감기간 제외 [2] 유러피언 컵 3연패, 분데스리가 3연패, DFB-포칼 1개, 인터컨티넨탈컵 1개 [3] 다만 티아고는 그 유리몸이라고 까이는 가레스 베일보다 출전 시간이 적었다. 이적료만 높다면 아주 못 이해할 상황은 아니다. 문제는 나오는 링크마다 60m 정도에 처분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 [4] 스파이 부분은 국내 기자의 오역이다. 이는 독일어 능력이 없는 기자들이 번역기로 소식을 전달하다가 종종 발생하는 문제이다. 문제의 단어는 spuk. 이는 독일어로 유령, 소동이라는 뜻이다. 즉, 회네스의 본래 발언은 '이 소동이 지나가서 기쁘다.'였다는 얘기. 이 단어를 번역기로 돌리면 spook가 나오는데 이는 유령, 스파이를 의미한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문맥상 유령보다는 스파이가 낫다고 판단해서 완전히 엉뚱한 오역을 하게 된 것. 물론 해당 오역과는 별개로 적절치 못한 내용 투성이인 것은 사실이다. [5] 세비아전 이후로 그를 팔아버릴거라고 결정했다고 했다. 덕분에 베르나트는 독일에서 유명한 밈이 됐다. [6] 독일은 나치 독일 시절 아돌프 히틀러가 금연법을 제정했다가 폐지해서, 21세기에도 금연구역에 대해서 나치 시절 법안이라고 상당히 꺼린다. [7] 동료였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도 시가를 즐겨 피는데, 루메니게의 시가를 피는 모습도 회네스 못지않게 엄청난 포스를 자랑한다. [8] 독일 내 현지 팬들도 플레이오프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결국 호펜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12월에 사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