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22:06:43

The Sun Shining o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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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비추는 태양
The Sun Shining o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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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The Sun Shining on the World
유통
플랫폼 Microsoft Windows | macOS | Linux[본게임]
ESD Steam[본게임]
장르 대체역사, 대전략
정식 출시 2021년 4월 15일
한국어 지원 비공식 지원
심의 등급 파일:게관위_12세이용가.svg 12세 이용가[본게임]
관련 사이트 파일:스팀 아이콘.svg 창작마당 | 파일:스팀 아이콘.svg 한글화 모드 파일:레딧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X Corp 아이콘(화이트).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타임라인3. 세력4. 열강 국가
4.1. 독일국4.2. 이탈리아 왕국4.3.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4.4. 연합왕국4.5. 미합중국4.6. 미주연방4.7. 대일본제국4.8. 중화연방공화국
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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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세계태양지도.png

"중일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독일은 미국과 싸우지 않았으며, 대동아공영권과 추축국이 연합국을 상대로 승전하였다면?"을 주제로 제작된 하츠 오브 아이언 4 대체역사 모드이다. 비슷한 주제를 바탕으로 한 천주제국 TNO와 언뜻 보기엔 비슷하지만, 기본 로어부터 다르고 업데이트 속도도 빠르며 개발팀 크기를 고려하면 콘텐츠도 중수한 편이나, 개발팀이 소규모인 탓에 일부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모드이다.

2020년 후반부터 개발을 시작하였지만[4], 이후 설정 대개편을 거치면서 사실상 이전과는 다른 모드가 되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탈바꿈했다. 극초기에는 일본인들이 개발을 주도하였으나 현재는 외국인들도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다른 추축국 승리 모드들에 비하면 비교적 희망과 꿈이 가득한 편이지만, 역시 여러 막장 루트가 존재하므로 플레이어의 재량에 따라 세상을 국가사회주의로 덮을 수도, 아니면 자유주의가 중심이 되는 세계를 만들 수도 있다.

또한 타 대체역사 추축국 승리 모드와는 달리, 게임 시작 시엔 핵무기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핵 개발 레이스가 주요 콘텐츠 중 하나로 등장한다.

2. 타임라인

1936년 2월 26일, 2.26 사건
1936년 4월 4일, 일중불가침조약
1936년 12월 25일, 시안 사건
1937년 11월 7일, 쑤이위안 사건
1937년 11월 12일, 육해군의 압박으로 인한 우가키 내각의 총사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 항복
1940년 6월 14일, 프랑스 항복
1940년 6월 20일, 조르게 사건
1940년 6월 21일,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7월 10일, 일소전쟁 개전
1941년 10월 23일, 통킹만 사건
1941년 12월 5일, 미합중국과 대영제국에 선전포고
1942년 2월 26일, 브레스트 조약
1942년 5월 22일, 웨이크 섬 전투
1942년 12월 3일, 동인도양 해전
1942년 12월 15일, 마셜 제도 전투
1943년 5월 3일, 남태평양 해전
1944년 3월 24일, 소련 항복
1944년 4월 13일, 솔로몬 제도 전투
1944년 5월 3일, 트럭 환초 전투
1944년 7월 8일, 하와이 조약
1945년 11월 23일, 듀이 대통령 취임
1948년 11월 30일,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
1949년 1월 15일, 미주연방 건국
1949년 2월 2일, 미주연방의 대미합중국 선전포고
1949년 7월 14일,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에 포드와 GM, 크라이슬러, 3개의 대기업들이 모여 설립된 세계 최초의 기업국가 미자동차산업연맹의 탄생
1949년 10월 25일, 워싱턴 D.C. 함락
1949년 11월 23일, 장제스 탄핵

3. 세력

  • 게르마니아 협정
    독일국이 지도국인 세력으로, 시작 시점에서는 오스트란트, 우크라이네, 모소코비엔, 카우카지엔, 노르웨이와 발칸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을 시작으로 여러 악재가 겹치기 시작하며 영향권이 본격적으로 축소하기 시작한다. 회원국들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 불황에 대해 걱정하기 일쑤라고.
  • 로마 협상국
    이탈리아 왕국이 지도국인 세력으로, 이탈리아와 동맹국을 하나로 묶는 경제 및 군사 동맹이다. 무솔리니 히틀러의 사이가 틀어지면서[5] 이탈리아가 독자노선을 추구하자, 설립되었다.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중동과 불가리아를 포함한 일부 발칸반도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 중이며, 독일에서 난민들이 유입된다고 한다. 로마 협상국 회원국들은 이탈리아로부터 많은 혜택을 보장받지만,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력이 꾸준히 늘어나는 걸 방관하는 중이라 한다.
  • 영연방
    한때 대영제국의 일부였던 독립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는 세력으로, 패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 세계 면적 중 40%나 되는 거대한 영토[6]를 차지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통일되고 대서양 조약기구가 창설된 상태라면, 영연방도 가입할 수 있다.
  • 대동아공영권
    일본제국이 아시아 내 일본의 이익선을 방어하기 위해 설립한 경제 및 방위 동맹. 대동아공영권의 일원들은 이 협정이 일본에게 너무 유리하게 짜여 있고, 상호 협정이 일본에 유리하게 짜져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과의 경제적인 관계는 도움이 되나 다른 한편으로 이는 강대국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기에 크고 작은 문제가 많다고. 시작 시점에서는 인도차이나 반도, 러시아령 극동과 동인도를 지배 중이다.
  • 인터내셔널
    시베리아까지 밀린 소련이 주도하는 세력. 시작 시 유일한 가맹국은 몽골이 끝인 데다, 그마저도 내전으로 떨어져나간다.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국가들은 사회주의를 옹호하지만, 소련이 가맹국들에 은근슬쩍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름만 화려하지, 실상은 약소국들끼리 노는 집단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 난징 아시아 조약기구
    인게임 중점으로 설립되는 중국이 주도하는 군사 및 경제 동맹으로, 파키스탄과 인도차이나까지 영향력을 넓일 수 있다.
  • 대서양 조약기구
    미국을 통일한 미합중국이 창설하는 세력으로, 창설 즉시 파시스트나 공산주의 정권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가입한다. 이후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세력의 영향력을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넓힐 수 있다.

4. 열강 국가

4.1. 독일국

히틀러는 위대하고 빛나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그의 많은 재능은 의심할 바 없이 하늘이 그에게 부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독일 국민을 밝히는 불꽃이 되기를 원했고, 성공했습니다. 서부 전선에서 그의 지도력은 라이히가 조기 평화를 달성하고 소련과의 총력전을 준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44년에 그는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이 패배를 인정하게 했고, 그들에게서 모든 패권을 박탈한 뒤, 세계를 얻어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불꽃은 꺼지는 법이고. 이는 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총통의 재능은 마약에 삼켜졌고, 그의 지도력은 신기루처럼 사라졌습니다. 영향 있는 그의 부하들은 그의 운명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대조국의 후계자가 되는 자신의 꿈을 꿉니다.

이제부터 대조국은 어떻게 될까요? 그의 불꽃이 타오르면 순수한 어둠이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누구도 살 수 없는 법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유럽의 대국, 유럽의 지배자로서 위용을 떨쳐야 했지만 약한 베를린 지반으로 인한 게르마니아 건설 실패, 전후 찾아온 경제 위기,내부 불안과 민주화 세력의 부상, 동부 점령지에서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적자로 인해 사지가 짤린 신세다.

4.2. 이탈리아 왕국

거대한 제국은 내부로부터 무너진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지난 전쟁에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거둔 놀라운 전과로 한순간에 지중해의 맹주가 되었지만, 비대해진 군비를 감당하지 못한 경제가 붕괴해버리며 급격히 불안정한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무솔리니 정권이 약해지자 창설된 반무솔리니 연합의 주축인 이탈로 발보와 군주주의자 갈레아초 치아노는 신임 총리 자리를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방에 지지기반을 둔 기독교민주당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이탈리아 사회당이 눈에 띄게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부로는 스페인, 프랑스와 독일이 이탈리아 제국을 보며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고,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불가리아, 북아프리카, 중동에 영향을 투사하는 유사 열강, 전후 승리한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는 급격하게 냉각되었고, 이탈리아는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로마 협상국이란 자체 세력을 창설했다. 이후 이탈리아는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유럽의 열강으로서 자리잡았으며, 독일에서 이민도 올 정도로 부국으로서 성장했다.
그러나 1950년, 경제는 직선을 달리다 천천히 내려앉았고, 무솔리니의 인기는 점점 떨어졌다. 이에 무솔리니의 라이벌인 발보가 권력에 눈독을 들이면서 정치적 상황이 매우 불안한 상황.

4.3.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4.4. 연합왕국

4.5. 미합중국

제2차 세계 대전은 미국에게 정말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고, 미국 내 민권 운동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일본과 전쟁에 돌입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모든 미국인들은 전쟁이 미국의 압도적인 힘으로 끝나고 극동의 섬쪼가리 나라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전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대상과 장소, 심지어 대의명분까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닌 미국 그 자체였습니다. 미국의 오만함은 일본과 아시아에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미국은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참함 속에서도 많은 미국인들은 절망 대신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미국을 되찾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추진한 민권법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미국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은 미국의 또 다른 손실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 스스로를 향해서요. 민권법에 반대하는 연방주의자들과 펠리의 반란, 무너져가는 미군, 파시스트 폭정에 맞서겠다며 연방에서 탈퇴하는 주들의 속출. 그리고 악몽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였던 미국은 이제 대륙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며, 꿈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미국은 광기와 혼돈의 지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고문과 분열을 겪으면서도 국민들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빛나는 모범인 미국.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살아남는다면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941년 7월 10일, 일본군이 만-소 국경을 넘어섰을 때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취했다.
그해 12월, 일본은 석유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실시했으며, 대동아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첫 단계에서 괌이 함락된 이후, 중부태평양을 탈환하기 위해 기동부대를 파견해 "웨이크 섬 전투"와 "마셜-길버트 제도 전투"가 벌어졌으나 실패로 끝났다. 1943년에, 오스트레일리아와 협력해 남태평양에서의 우위를 유지하려 했으나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으며, 전선의 항공력 부족과 본토에서의 여론에 고통 받았다.
1944년,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징검다리 작전"을 실시했으나 "트럭 섬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전황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FDR의 반복되는 실패는 대일전에 대한 광범위한 염전주의를 가져왔으며, 군은 거의 위협적인 방법을 통해 휴전을 강요하던 와중 1944년 6월 14일, FDR은 의회에 평화협정을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마침내, 1944년 7월 30일 " 호놀룰루 조약"이 체결되면서 태평양 전쟁은 끝났다.

태평양 전쟁은 미 태평양 함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며, 그 결과 태평양과 중국의 이권에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 본토는 공격받지 않았으며, 그 강력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에서 독일의 패권이 확립되고 자존심이 상처입은 이들 사이에서 더 밝은 사회가 도래한 것을 기뻐할 수 있는 이들은 그렇게 많진 않았다.
이에 더해, FDR은 호놀룰루 조약이 채결된지 겨우 두달 뒤인 8월 11일 사망하였고, 민주당은 다음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데 바빴다.

민주당은 뉴딜의 지속을 옹호하였고, 정부의 지출만이 전후에 다가올 혼란에서 국가를 준비시킬 수 있다고 외쳤다. 민주당 대선 후보는 전시에 FDR의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공천되었으나, 전쟁이 민주당의 지지율을 깎아먹었고, 선거 전에도 공화당이 승리할 것이란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공화당은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주요 후보로는 매우 유명한 북부의 진보주의자인 뉴욕 주지사 토머스 듀이, 서부의 진보주의자인 캘리포니아 법무장관 출신 얼 워런, 보수주의자들, 특히 중부에서 지지를 받는 로버트 A. 테프트 상원의원이었다.

얼 워런은 법무장관으로서 전쟁 중 일본인을 수용소에 넣는 것을 승인했기에 전후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당에서 그를 지명한다면 재앙이었기에, 듀이와 테프트의 1대 1 대결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공화당 진보파는 당이 기본적으론 뉴딜 노선을 이어가며 전후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보수파는 규제 완화와 가격 통제법 완화, 공공사업 프로그램 대폭 삭감과 같은 것들을 통해 재정 건전화를 이루어 민주당과 큰 차이를 만들어 공화당만의 뚜렷한 전후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탈 뉴딜 노선은 많은 당 간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보수파들은 각 주의 후보 지명에서 약간 앞섰다.

그러나 경선 직전, 갑작스러운 테프트의 대선 불출마가 발표되자 보수파 지지층은 크게 분열되면서 진보파인 듀이가 최종적으론 대선 후보로 지명되고, 부통령 후보로는 보수파 중 테프트에 이어 두번째로 지지를 많이 얻었던 존 W. 브리커가 지명되었다.
듀이의 정책은 뉴딜 정책이 이룬 지속적인 성공의 결과였다. 듀이는 뉴딜 정책의 몇몇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전후 자신의 새로운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인종 평등을 약속했다. 비록 점진적이긴 해도, 듀이는 남부의 인종 문제를 다룬 매우 눈에 띄는 대선 후보였다. 이러한 정책은 인도주의적 측면 뿐 아니라, 그의 재건 정책이 시행될 때 까지 지지를 모으는 방법으로서도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 결과 1944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민주당을 486대 45의 차이로 이기고 듀이가 제34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당의 패배는 미국이 처음 경험한 패배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화당의 인종 평등 정책은 민주당의 태도를 '시험'했다. 민주당에게 뉴딜 정책의 지속은 인종 문제에 대한 남부 흑인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의 지속을 의미하기도 했다. 실제로 FDR 하에서 뉴딜 법안은 영향력 있는 남부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남부 흑인을 배제하는 최저임금법이 암묵적으로 승인되었다.

공화당은 이러한 인종적 ' 뉴딜 정책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고, 대공황과 전쟁으로 묶여 있던 남부의 취약하고 모순적인 민주당 기반, 노동조합, 백인 노동자들을 해체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은 흑인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했다. 어느 한쪽을 분리하는 것은 당의 해체를 의미했기 때문에 민주당은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북부 자유주의자들은 공화당을 지지한 반면 남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당 본부를 불신했고, 19세기 이후 거의 항상 민주당 후보를 선출했던 남부 주에서도 공화당이 주도권을 잡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따라서 지지층을 잃은 민주당은 애매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공화당의 자유주의 노선을 따라갔고, 남은 지지 기반이었던 남부 주와도 관계가 나빠졌다.

그러나 민주당은 뉴딜 정책과 새로운 민권 법안을 향한 움직임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민주당으로서는 어려운 선택이었다. 완전히 분열된 민주당에서 북부 민주당은 새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당 진보파를 추종했고, 남부 민주당은 가증스러운 북부 사람들과는 다른 새로운 파트너를 찾으려 했다. 윌리엄 더들리 펠리가 이끄는 미국 은빛군단(일명 은빛셔츠)과 찰스 코글린 신부, 독일인 협회, 쿠 클럭스 클랜 등 극우 세력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유럽의 독일 패권의 영향을 받아 빠르게 성장했지만 안정적인 지지 기반과 정치력이 부족했다. 반면 남부 정치인들은 행정부에서 더 넓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남부 외곽으로 지지를 확대하고 백인 우월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을 원했다. 1944년 당시 개별적이자 소규모로 활동했지만(전쟁으로 인해 애초에 활동이 금지된 단체도 포함), 그들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선거 결과를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자유주의 성향의 공화당 진보파와 북부 민주당,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보수파와 우파라는 대립축이 형성되었다.

듀이가 대통령직을 맡았던 1945년 1월부터 1948년까지의 전후 재건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조건에서 진행되었으며, 후에 이 기간은 "듀이의 4년"으로 알려졌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한 것은 "80일 의회"라 불리는 정책 결정 회의였다. 이 회의는 저명한 경제학자, 기업가, 정치인, 군 장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후 기본 정책을 급하게 수립한 회의였습니다. "80일 의회"는 FDR의 "100일 의회"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것이었으며, 더 줄어든 기간은 빠른 결정 과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매우 힘들게 열렸으며, 실제로 듀이가 결정 사항을 정리하고 발표했을 땐 이미 100일이 넘게 지나간 상황 이었다. 야당은 이를 기회삼아 듀이를 비판했으나, 그의 뉴딜 지향 정책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잘 이해되어 그들의 지지를 능숙히 흡수하는 효과를 냈다.

이전의 대공황을 맛보았던 대중들은 전후 또 다른 공황이 찾아올 것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국민들의 경제 활동을 보호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듀이는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발표하는 동시에 심화되는 파업에 있어 큰 양보를 했다. 그러나 정부는 뉴딜 정책 이후 계속된 막대한 재정 지출과 소련에 대한 부실채권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아무리 연방정부라 할지라도 추가 지출은 정부 재정의 건전성을 위협할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뉴딜 기간 동안 생겨난 막대한 공공사업들을 재검토하고 보다 효율적인 사업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1946년에는 로버트 M. 라플로테 주니어, 마이크 먼로니 상원의원이 주도한 입법 개편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도로, 하천, 항만, 공공시설과 같은 잡다한 위원회들을 공공사업위원회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포함하여 전시에 비대해지고 복잡해진 정부 역할을 간소화하기 위한 것 이었다. 듀이의 법안 통과로 정부는 간소화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상임위원회가 폐지되었고 의회에서 이권을 유지하고 있는 남부 주 의원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 밖에도 일본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태평양 함대를 재건하기 위해 해군에 더 많은 예산을 할당하고, 조선소를 준전시상태로 유지함으로서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사회"에서 듀이는 흑인이 소외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취임 직후, 미국노동연맹(CIO)은 FDR 시대에 설립된 공정노동위원회(EEPC)를 기반으로 하여 인종적 빈곤 해결을 위해 "남부 작전(딕시 작전)"을 실시했다. CIO의 노조 내 인종평등, 직장 내 인종통합이라는 CIO의 정가은 남부로 이어졌다. CIO는 노조 내 인종평등과 직장 내 인종통합을 정강으로 삼아 남부에 개입하고자 했다. 당연하게도 남부는 CIO의 개입에 대해 "모든 합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저항하였고, 결국 딕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듀이에게 있어 이 패배는 극도로 치명적이었으며, 그는 개입을 거부한 남부 주들에 대해 "저들은 분명히 미국 내에 보이지 않는 국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묘사했다. 또한 같은 기간 동안 공화당 내 보수파인 태프트 상원의원과 하틀리 상원의원은 노조에 대한 과도한 양보를 조정하고, 파업과 영업장 폐쇄를 제한하는 태프트-하틀리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듀이를 싫어하는 남부 민주당원들과 44대 하원선거에서 새로 당선된 많은 공화당 보수파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 듀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이렇게 의회에서 전개된 일들은 CIO에게 역풍이 되었다. 듀이의 경제 정책이 국가를 점점 다시 깨웠으나 남부 및 중부 지방의 농부들은 이러한 산업에 대한 이익으로부턴 많은 이익을 얻질 못했고, 점점 더 스스로를 "뒤쳐진 이들"이자 반대파로 여기게 되었다.

이후 전시 군 작전을 조사하기 위한 전문위원회가 설립되면서 군내의 심각한 차별이 드러났다. 당시 육군의 9퍼센트, 해군의 2퍼센트가 흑인이었으나 이들 중 대다수는 부사관 이하 계급이었으며, 훈련 과정 또한 인종에 따라 달랐는데 이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NAACP의 밀턴 P. 웹스터가 이 상황을 지적했으며, 군 내 인종 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었다. 그러나 법안은 창당 이후 기세를 떨치던 연방당과 4군 장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민주당이 분열됨에 따라 의회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민주당 소속으로 남은 소수의 남부 의원 중 한명인 린든 존슨은 당이 분열된채로 남을 것을 우려하여 의회에서 행동에 나섰다. 그는 인종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는 온건파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여 법안의 조항들을 완화해 "무독성"으로 만듬으로서 이것이 통과될 수 있게 했다. 존슨은 10년 내로 육군 보병 훈련 과정을 통합하고 건설 및 기타 군수 작전에서 인종 차별을 끝내게끔 조항을 수정하도록 상원 법사위원회를 설득했다. 공화당 내 진보주의자들은 이 수정안에 크게 실망했으나, 남부 작전에서 실패한 듀이는 흑인들의 이목을 끌만한 "성과"에 굶주려 있었고, 그의 주 목표는 어찌 되었던 간에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남부 의원들은 법안 통과에 만족하지 못했으나, 그들은 성공적으로 법안을 약화시킬 수 있었고, 이는 의회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진정시키게 되었다. 존슨은 그 성공으로 "마지막 민주당원"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남부와 북부 의원 양측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듀이는 민권법 운동의 일환으로서 동시에 추진 중 이었던 하와이 준주의 주 승격을 고려하고 있었다. 표면상으로, 듀이의 의도는 실제로 일본에 대항하는 최전선이 될 하와이를 배려하고, 태평양에서 커져가는 일본의 영향력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의 배경에는 일본계 미국인이 다수 거주 중인 하와이가 다음 선거에서 민권법을 지지하고, 공화당에 투표할 것이란 기대가 있던 것도 분명했다. 연방당은 갑작스러운 이러한 행동에 분노하여 하와이 정계와 연방정부간의 비밀 거래가 이루어진다며 하와이를 비난했다. 이 논쟁은 전국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1946년 9월의 강제 투표로 하와이는 주로 승격되었다. 이는 46년 중간선거를 기점으로 남부를 중심으로 하여 창당된 연방당에 맞서기 위한 조치였으나, 하와이의 승격이 48년 대선의 운명을 좌우할 것 이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하와이와 함께 ([푸에르토리코]]를 주로 승격시키는 방안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이 대서양에서 방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섬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히스패닉계가 민권법을 지지할 것이란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틈타 원래 푸에르토리코에 있었던 독립운동이 더욱 더 심해졌으며, 1946년 6월 푸에르토리코 독립당의 테러로 인해 푸에르토리코의 주 승격이 연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8년 3월 푸에르토리코가 '연방주' 지위에 새로 편입되면서 당의 강한 열망이 반영되었다.

194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남부의 민주당원들은 공식적으로 민주당에서 탈당한 후 새로운 당인 연방당을 창당했다. 민주당엔 더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그들은 남부의 인종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악마와의 계약을 했다. 이들은 정치 집단으로, 극우 지지자들과 친독 정치집단이었다. 여기엔 은빛군단의 "사령관"으로서 악명을 떨친 윌리엄 더들리 펠리, 일시적으로 해산되었던 독일인 협회의 프리츠 쿤,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여 전국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은 선동가 찰스 코글린 신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쟁 전엔 두 거대 정당에 크게 뒤지지 않았지만, 이젠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을 잃어버린 대중들에게 FDR을 비판하며, 음모론을 통해 "위안"을 제공했다. 많은 보수 정치인들은 이들 단체를 "품위가 없다"고 싫어했으나 떡고물을 먹기 위해서라면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고, 새로운 우익 친구들의 도움 하에 연방당은 남부 밖으로 지지를 확대해 나가는데 성공했다. 인종차별을 표방하는 당의 위험성을 간파한 공화당원들도 연방당을 "파시스트"로 규정하며 선동에 또 다른 선동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하원 의석수로만 보았을 때 공화당은 과반을 지켜냈으나, 연방당이 100석 이상을 얻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은 예전엔 텃밭이었던 남부의 표가 그대로 연방당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대부분의 의석을 잃고야 말았다.

이 선거 결과는 많은 이들에게 미국의 양당제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한편 공화당은 과반 사수라는 목표를 당분간은 이뤄냈으나 여기에 안주해 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경쟁 정당인 연방당은 급속도로 세를 넓혀가고 있었고, 여기엔 구민주당보다 훨씬 위험한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파시스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번 선거 결과에선 동북부와 서부의 지지자들의 표는 성공적으로 확보했으나, 중부에 기반한 공화당 보수파 중 일부가 연방당으로 이적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1946년부터의 듀이의 정책은 더욱 더 농촌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는 중부에서의 일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수파에 구애를 보내는 것은 듀이의 원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의 자유주의자들의 탈당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그는 두 파벌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중간선거는 양당체제 하에 있던 민주당을 곤혹에 빠트렸고, 그들은 공화당에 맞서던 민주당의 방향을 전환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민주당은 공화당에 "합당"을 제안했다. 이것은 숙적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 결정을 내리는 데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별다른 저항이라고도 할 것도 없이 내려졌으며, 묘하게도 순조롭게 결실을 맺었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공공연하게 백인우월주의당이라 밝히는 연방당의 악마들에게 먹히느니 공화당에 영홍을 팔아넘겨서라도 미합중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민주당에 있어 이 결정은 그들이 남부의 지지를 완전히 잃음과 동시에 남부라는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이 제안은 1947년 2월 공화당 지도부에 전달되었고, 그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과 기본적인 사고의 틀을 공유하고는 있는 북부민주당의 힘을 얻는 것은 공화당의 표가 갈라지는 것을 막는데 매우 유용했으며, 계속해서 커져만 가는 연방당에 맞서기 위해선 꼭 필요한 조치였다. 이로써 공화당과 북부민주당은 "국민연합당"이라는 이름으로 합당하였고, 미국 정치계에서 79년만에 국민연합당이라는 명칭이 부활했다. 그러나 국민연합당의 창당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내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사회불안과 분열은 계속해서 가속되었다. 게다가 구공화당내에서도 진보적인 북부만주당의 합류에 보수파가 반발하고 있었으며, 테프트를 중심으로 랠프 O. 브루스터와 밀턴 영 등 몇몇 당원들이 연방당에 입당했다. 이 시점에서 듀이에겐 인종문제에 관해선 연방이라는 적과 경제 문제에 관해선 구공화당 보수파라는 두명의 적이 있었다.

중간선거 결과를 계기로 하여 국민연합당은 중부에서 열성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한편, 미시간, 일리노이, 오하이오 등 의 중서부주에서는 연방당이 기세를 이어가질 못해 상황을 예측할 수 없었다. 각종 신문의 여론조사는 국민연합당의 승리를 예측하는 쪽과 연방당의 승리를 예측하는 쪽으로 나뉘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신만이 알게 되었다. 듀이는 심화되는 분열과 선동에 대해 "오늘날 민주적 삶의 방식은 전세계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전체주의의 공포에 대한 민주주의의 화답은 국민들에게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약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설에서 민주주의와 이성의 승리를 촉구했으나, 그 어떠한 말이라도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삼켜질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국민연합당 268표, 연방당 266표라는 역사적인 표차를 보였다. 우선 선거 결과 발표 전 여러 주에서 재검표와 다른 요인들이 발생하면서 개표가 중단되었다. 연방당은 즉각 법원에 재검표를 요청했고, 국민연합당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들은 거리에서 수많은 연설을 벌였다. 특히 은빛군단은 국민연합당이 승리한 주의 정부 시설물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습격했으며, 주방위군과의 충돌에도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이들의 주장은 주로 다음과 같았다.
- 사회당과 공산당은 국민연합당과 협력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인민전선을 구성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국민연합당은 빨갱이들과 협력했다!
- 이번 선거 결과에서의 2표 차는 다음 선거에서 3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하와이에서 있었으며(하와이에선 국민연합당이 승리했다), 국민연합당의 하와이에서의 승리는 하와이 정계와의 불법적인 정치적 거래에 따른 것이 분명하다!
- 많은 북부의 주에서는 많은 관료들이 연합당을 지지했으며, 연합당의 득표수는 지레짐작으로 계산된 날조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코글린 신부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연방당 지지자들 사이에선 공통된 견해가 되었다. 특히 양당이 서로 득표율 49%를 기록하며 팽팽한 접전을 벌였던 미시간과 델라웨어, 독일인 협회가 활발히 활동했던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에서는 싸움과 폭력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12월 2일,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선 흑인 노동자들이 주도한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다. 당초에 이 파업은 단순히 회사와 주 정부에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행동이었으나, 미국전진위원회(NAACP)는 이를 인종 해방을 위한 파업으로 규명하고는 "흑인 노동자" 권리 보호를 주장했으며, 노예제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이 1859년의 그날 처형되었기에 이를 " 존 브라운 파업"으로도 불렀다. 이로 인해 노동 문제에서 인종 문제로 행동의 초점이 옮겨졌으며, 상황은 빠르게 가열되었다. 통제를 잃은 흑인들이 도심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대응해 은빛군단은 디트로이트 지부를 중심으로 "의용군"을 결성해 백인 거주지역을 "수비" 했다. 또한 포드 자동차 고객응대부서의 해리 베넷은 사설 경비대를 결성해 노조를 공격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서는 사적인 처형이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철저한 린치를 감행해 디트로이트를 공포에 떨게 했다.

정부가 빠르게 주방위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하면서 며칠만에 폭력의 폭풍은 멈춰섰으나, 이는 미국 사회의 현재 분열을 확실히 미국인들에게 보여준 것 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노조가 흑인에 대해 더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반면, 연방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흑인과 공산주의자들간의 공모가 있었을 위험에 대해 추적하기 시작했다. 또한 온건한 백인들 사이에서도 흑인들의 과도한 폭동으로 인하여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분노로 바뀌었고, 사회분열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연방정부는 점차 늘어만 가는 사회적 혼란에 대응코자 민권법 제정을 시작했으며, 12월 중순까지 위원회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다. 여전히 민권법의 내용과 법적 형식은 주요 쟁점이었다. 국민연합당은 흑인의 투표권 보호 조항을 법의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나, 가장 큰 쟁점은 법안의 내용에서 흑인의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명시해야 하는 지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NAACP는 인종평등을 명시하기 위해 개헌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국민연합당은 상하원 모두 3분의 2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여 법률의 제정이나 해석을 바꾸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또한 일부 온건파는 인종 평등을 명시적으로 규정할 시, 흑인에게 특별한 보호를 제공하는 정책을 실시하기가 어려워진다고 주장함으로서 의회에서의 조율은 난항을 겪었다.

한편, 연방당측은 꾸준히 투표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민권법 제정이 강행될 시 연방으로부터의 탈퇴도 감행하려 했다. 이들 중에서도 은빛군단과 독일인 협회는 1946년부터 나치 독일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을 해 왔으며, 유사시 독일로부터의 지원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1949년 1월 21일, 토머스 E. 듀이의 제 33대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전례없는 수준의 경비 하에 치러졌다. 듀이는 취임사에서 경제 회복과 함께 민권법 제정을 약속했으나 연방당은 이에 "불참석"으로 응답했다. 이런 가운데, 대다수의 대중들은 북부 주에서 연방당 극우파의 폭동에 가까운 활동들이 잠잠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보다는 걱정을 더 많이 했다. 신문과 라디오 방송국은 이를 "폭풍전야"라 부르며 X-데이가 가까워졌다고 선동했다. 게다가 FBI의 비밀 조사 결과 남부 주들이 주방위군을 동원해 보급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침내 백악관은 내전이 임박했다는 것을 깨닫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중장에게 반란의 규모와 예상되는 결과를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아이젠하워 보고서로 알려진 이 조사는 반란의 규모가 과거 남북 전쟁 당시의 미연합국의 규모보다 컸으며, 최악의 경우 독일이 개입할 것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듀이는 2월 14일,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인종 평등의 필요성과 흑인의 진정한 해방이 남부에 가져올 밝은 미래를 강조했다. 그러나 남부 주들의 라디오 방송국들이 이를 방송하는 것을 금지했기에 대통령의 목소리는 남부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사흘 뒤, 애틀랜타에서 헤브라이 자비의 사원 폭파 사건이 일어났고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ANP(미국 나치당)은 이 사건에 대해 성명을 냈다. 이로 인해 결국 연방정부는 대통령령에 의거해 주 정부에 대한 강제 개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는 사건에 대한 FBI 수사를 빙자하여 남부에서 발생한 반국민연합당 운동을 일제히 검거하려는 것으로, 명목상 이는 반유대주의 테러리스트를 체포하는 것이었기에 남부 주들이 저항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남부 주들은 연방 정부가 주 헌법을 위배하고 있다며 주장하면서 개입을 거부했다. 물론 남부민주당 출신 연방당 정치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고, 연방당 극우파 활동가들을 보호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남부의 주의 권리 이론을 지키기 위해선 연방정부의 개입을 절대적으로 피해야만 했으며, 이 시점에서 이들은 완전한 파멸을 맞이했다. 따라서 강제 개입을 위해 파견된 연방군이 노스캐롤라이나 주 경계를 향해 전진하던 와중, 주방위군이 이를 봉쇄함에 따라 이것이 막혔습니다. 현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나, 확실한 것은 12시간에 걸친 협상이 마침내 결렬되고 주방위군과 연방군간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2차 내전은 일시적일 것이며 남부가 곧 저항을 포기할 것이란 생각이 널리 퍼진 상태였고, 미합중국은 이들을 반군으로 규정하나 항복할 경우 관대하게 대우할 것을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낙관적인 전망은 독일 의용군이 온다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 의용군은 실제로는 의용군이 아닌 정규군이었다. 미합중국은 동부전선에서 싸웠던 독일 정예벙력들이 있음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합중국은 공화국군이 점차 세력이 확대담으로 인해 점점 더 초조해져 갔다. 또한 독일은 주로 해상을 통해 지원을 제공했으나, 의도치 않게 독일 선박을 공격함으로 인해 독일이 본격으로 개입할 구실을 줄 수 있어 미국 해군이 동원되긴 극도로 힘들었다. 미국의 위기에 대항하여 영국 해군도 대서양에 함대를 배치하였으나, 독일 선박을 완전히 막아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육군에선 많은 부대가 옛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탈영을 택했다. 이들은 특히 나이 많은 고급장교들로, 모슬리 장군이 그 예였다. 전직 참모장교로서의 인맥과 그 실력으로 미주연방군에 많은 병력과 보급품을 공급했던 마셜 장군은 모슬리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미주연방군에 합류하겠단 자신의 의지를 숨기지 않고 털어놓으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모슬리 장군의 옛 부하 중 미합중국에 남은 유일한 이는 아이젠하워였으며, 이는 미합중국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한편 해군은 육군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이탈이 적었으며, 어느 경우던 간에 내전에선 함대를 출항시키지 않고서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미합중국군이 점차 북쪽으로 후퇴하자 정부 충성파가 북쪽으로 점점 몰려들었고, 해군은 함대를 일시적으로 서해안으로 대피시키는 안을 고려했다. 그러나 문제는 전후 건조된 항공모함과 전함들이었는데, 이들은 핵심적인 통로인 파나마 운하 통과가 불가능했고, 본국이 내전에 빠진 가운데 남미를 우회한다는 무모한 책략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동해안에 배치된 대서양 함대와 서해안에 배치된 태평양 함대는 거의 바로 점령군에게 넘어가고야 말았다. 이러한 해군 장교들의 상황과 내전에서 귀중한 함선들을 잃을 순 없다는 이유로 양측 해군은 모든 출격 임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내전 발발의 여파는 곧 신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독립당의 테러가 일어났다. 게다가 카리브해의 섬들은 생필품이 더 이상 전달되지 않아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사건들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을 통솔하기 위했던 미주기구는 그 기능을 수행해보기도 전에 작동을 멈췄다. 미합중국 연방정부는 OAS 본부를 명목상 센프란시스코로 이전하였고, 가맹국들이 아직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맹국들의 재정지원 중지, 인플레이션의 도래, 미국의 국제적 위상의 감소로 그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되었다.

내전의 추는 점차 연방당 측으로 기울었으며, 6월 초가 되자 미주연방군은 이미 버지니아주의 주도인 리치먼드를 점령했다. 이러한 상황의 위험을 감지한 정부군은 대부분의 예비 병력을 버지니아 북부의 살러츠빌에 배치했다. 이들은 배수진을 쳤다는 생각 하에 이 전투에 참전했는데, 만약 이곳을 잃게된다면 워싱턴 D.C는 수주 내로 전장이 될 것이었다. 샬러츠빌 전투는 0800시에 시작했는데, 6월 11일 아침, 은빛군단 제 1 기갑사단 조지 워싱턴이 남부의 참호에 공격을 가해왔다. 그 뒤를 이어 1030시에 독일 의용사단이 서쪽에서 공세를 시도,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돌파해냈다.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저항을 시도한 학생들은 전원 학살당했으며, 미국 최고의 캠퍼스로 알려졌던 교정은 잔해 더미로 변했다. 전투는 시가전으로 이어졌으며, 각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군은 점차 압도당했다. 사령부에서는 위치 사수를 결정하고 방어병력들에게 사력을 다해 방어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로 인해 병력이 분산되고 낭비되면서 효과적인 지연전을 치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3일 1930시에 북쪽 교외에 있던 비행장 수비병력들이 항복하면서 조직적인 저항은 끝이 났다. 이 소식이 워싱턴 D.C로 전해지자 몇몇은 통곡했으며, 몇몇은 기도했으며, 또 몇몇은 아무 생각 없이 탈출을 준비했는데, 이것이 D.C를 가득 채우고 있던 대부분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택한 방법이었다. 미합중국 육군은 수도에서의 저항을 완전히 포기하고서 연방당의 세력이 약한 서부에서 방어할 것을 결정했다. 탈출의 혼란과 후퇴하는 지도부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동부해안의 미군 전선은 완전히 붕괴했고, 6월 21일 미주연방군은 버려진 수도를 점령했다.

미합중국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들고 일어선 연방당과 U.A.I.A는 첫 승리를 거둠으로서 거의 승리에 가까워졌으나, 둘 모두가 직면한 내부의 위협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구체적으로는 점령에 계속해서 저항 중인 합중국 정부 충성파 저항군과의 교전이 있었으며, U.A.i.A(미자동차산업연맹)의 경우 공산당과 사회당이 주도하는 노조와의 마찰이 있었다, 상황이 진정된 다음 연방당 내부에서는 민주당과 은빛군단, ANP(미국 나치당)간의 권력 투쟁이 재개되었다. 내부에 숨은 위협에 맞서 뭉치기 위해, U.A.I.A와 연방당은 이해관계의 완전한 일치를 보고서 임시 반공동맹을 결성했다. 이 연합전선은 U.A.I.A.측이 폭력적인 저항활동을 진행 중인 극좌 세력을 쓸어버리기 위해 베넷이 펠리를 칭찬하면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도 불구하고, U.A.I.A.는 여전히 많은 흑인들을 중요한 노동력으로서 보유 중 이었기에 연방당의 정책과는 결국 공존할 수 없었고, 베넷은 사회주의자들을 쓸어버린 은빛군단이 그 옆에 있는 자신들을 향해 시선을 돌릴 것이란 두려움에 빠졌다.

한편, 중서부 지역에서 대패를 겪은 극좌파는 자신들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무법지대인 로키 산맥 일대를 떠도는 " 대장정"을 시작했다.

이후 미국은 샌프란시스코를 임시 수도로 삼고 항쟁을 계속하고 있다.

4.6. 미주연방

4.7. 대일본제국

4.8. 중화연방공화국

중국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청 말기에, 중국은 외의 간섭으로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쑨원과 그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선통 3년(1911)의 신해혁명으로 제정이 폐지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곧 중국은 군벌 시대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지역 군벌 중 하나였던 장제스는 쑨원의 사후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어 북벌을 완수하며 1928년에 중원을 다시 통일했으나, 여전히 군벌들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1930년대가 되면서 수많은 역경이 몰아닥쳤는데,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 촉발된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은 개중 가장 치열했습니다. 이 상황을 틈타 고지를 점한 일본은 북동부를 점령해 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지도자로 하는 만주국을 건국했습니다.

당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던 히로타 코키는 외무대신 또한 겸하고 있었으며, 시게미츠 마모루를 대리인으로 삼았습니다. 헌정 질서하에서, 이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해나며 1936년 4월 12일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상호 불가침에는 서로 동의했으나, 당시 중국이 간도와 만주 조약을 비준하는 데에는 거부했기에 관동군이 반발했으나, 이는 당시 관동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던 토조 히데키 중장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장제스는 4월에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으나, 그의 고향인 만주를 관동군에게 빼앗긴 장쉐량은 이 결정에 매우 반대했습니다. 장쉐량이 공산당과 접촉하자, 장제스는 그를 위험분자로 분류하고 체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2월, 총통은 개인적으로 한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호위병 일부와 장쉐량이 있는 시안으로 향해 그를 체포했습니다. 이는 시안 사건으로 알려졌으며, 장쉐량은 장제스가 실각할 때까지 난징에 구금됐습니다.[7]

중일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고 시안 사건이 발발하자, 장제스는 최후의 초공작전을 재개했습니다. 마오쩌둥은 반일을 내세워 그를 막아내려 했으나, 곧 다른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지원만을 기다리며 저항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국민혁명군은 마오쩌둥과 그의 참모들의 군사력에 맞서야만 했고, 옌안을 1937년 말까지 점령하겠다는 목표는 달성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국민당이 압도적인 머릿수를 내세워 공격하자, 인민해방군은 나날이 지쳐만 갔고 소련의 지원으로도 보충할 수 없는 손실을 입어갔습니다. 마침내, 옌안이 함락됨에 따라 내전은 잠시간 중단되었습니다.

내전이 끝난 10년 동안, 중국의 경제는 극적인 성장률을 보였습니다. 세계가 전쟁에 휘말리는 동안, 중국은 평화를 유지하며 친연합국적인 태도를 보이며 군수품과 생필품 수출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습니다. 산업화도 진전되었고, 내전의 상처 또한 치유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군수산업이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과공급 문제 또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빠른 산업화로 인해, 최악의 노동 환경과 환경오염은 사회 공공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경제 정책이 실패하면서, 지지율 하락을 우려한 장제스는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신장에 있는 공산당과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는 군벌들을 토벌하기 시작했습니다. 반공 공세는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군벌들은 이 힘에 대해 두려워해 장제스를 납치, 자리에서 사임토록 했습니다. 전후, 중국은 사실상 다시 군벌 시대로 봐도 될 정도였으나 국민당에 양보로서 구주퉁을 임시 총통으로 임명했습니다. 군벌들은 이제 지방자치가 이루어지는 연방공화국을 만들려고 하지만, 국민당은 이를 쑨원과 그의 삼민주의에 대한 배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이러한 정치적 견해 차이는 해소되어야만 합니다.

중국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있으며, 여기엔 경제 통제를 위한 전투, 정치적 혼란, 일본과의 긴장 고조가 있습니다. 중국은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과연 중국은 이 모든 역경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구주퉁 총통이 지도하는 세계 냉전축을 자치하는 대국 중 하나.
중국은 중일불가침조약으로 인해 원역사와 같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때문에 공산당 토벌에도 반성공한 상황이다, 하지만 장제스의 과도한 중앙집권적인 태도로 인해 분노한 지역군벌들의 임시동맹으로 장제스가 실각하고 말만 연방이지 사실상 군벌연합체나 다름없는 중화연방공화국이 건국, 이후 연방주의자와 국민당간의 정치싸움으로 혼란할 뿐만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빠른 산업화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고, 군대의 질도 2차 대전 이후에서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특히 연방주의자와 국민당 간의 싸움은 더 심각한데, 중국정협회의소평의회 회의에서 국민당과 연방주의자들이 난투극을 벌여 경찰이 개입하고, 통일 중국을 외치는 국민당 시위대와 연방주의 시위대들이 서로 돌을 던져대서 경찰이 최루탄으로 둘 다 진압한다거나, 헌법을 정하는 날이 다가오자 국민당 정치인들에 대한 부패 고발이 전부 허위사실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언론사로 날아오고, 심지어 훈련 중 두 명의 군 교관이 연방주의와 국민당에 대해 말다툼을 하다 의견이 맞지 않자, 각자의 대대에 서로 상대의 대대와 전투를 하라고 명령했고, 이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역시 중일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대국이라서 그런지 베트남 북부를 한입하고 세계 강대국 중 하나인 독일과 비등한 수준의 무역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초반 국민당 총통 후보로는 구주퉁, 왕징웨이[8]가, 연방주의자 총통 후보로는 룽윈[9]이 존재한다.

주요 플레이 요소는 산업화와 각 루트 간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자체적인 세력을 만들며, 이후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으로 결국 발발하고야 마는 대아대전에 대처하여 두 태양의 싸움에서 백일이 승리하게끔 하는 것이다.
{{{#!folding-국민당 루트
저우포하이의 헌법 개정 조언을 따르고, 헌법 개정에서 국민당이 승리할 경우, 왕징웨이가 국민당의 지도자가 된다.
왕징웨이 루트
왕징웨이는 부의 재분배를 실시하고 국민당 지부를 확장하며, 토지 개혁을 실시하는 등 좌파적인 행보를 보이는 동시에 지역 군벌들의 영향력을 걷어낸다. 이후 연방당을 폐지, 일당제 국가로서 중화민국을 단결시키지만, 2차 국민대회 이후 암살당하고야 만다. 암살 이후엔 임시 총통직을 천궁보가 물러받고, 중국 내부에선 구주퉁vs 장제스, 다이리, 장췬의 '3인방'이라는 대결 구도가 성립된다.

{{{#!folding-구주퉁의 재선
다시 돌아온 구주퉁은 국민당과 공화당 모두를 설득하고, 삼민주의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눈치를 보지 않고 정부를 이끌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시골 지역까지 민주주의 사상을 퍼뜨리며, 사회복지를 필두로 하는 개혁을 진행한다. 이후 쑨원에 비하는 '두번째 국부'로서 각성하며 쑨원의 길을 잇는 이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여러모로 연방주의와 국민당 하나를 택하지 않고 서로 조화되도록 묶는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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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3인방의 승리
3인방은 상황해결을 위해 계엄령을 선언하고, 군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한 뒤 좌파에 모든 책임을 몰아간다. 이후 다이리는 남의사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장제스는 이전 자신의 지지자들을 다시 한번 규합하며, 장췬은 시골 지역과 좌파 지도자들에게 헌정을 약속하며 3인방은 서로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기 시작한다.
-장제스
쫓겨난 자리에 다시 앉게 된 장제스는 이번에야말론 이 자리를 뺏기지 않겠다는 사명으로 공산당을 박멸하기 위한 운동을 게시하고, 천궁보와 장췬을 국민당 내에서 억제하고 주도권을 쥔다, 이후 자신의 개인숭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천궁보, 쿵샹시가 모두 자신과 협력하도록 '제안'하며, 미국 내전으로 망명해온 미국인 망명자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유럽의 천년제국. 독일과의 관계를 증진한다. 이후 자신의 아내인 쑹메이링과 함께 '타의 주종을 불허하는 위대하신 지도자'로서 중국의 독재자로 군림하는 것으로 마무리.

-다이리
남의사의 영향력으로 승리한 다이리는 엄격하게 감시되고 통제되는 국가를 만들고자 한다. 독일의 유겐트와 비슷한 삼민주의 청년단을 창설하고, 국가 전체에 남의사로 이루어진 강력한 감시망을 구축하며, 국가 내 자산을 국유화하고, 세계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를 강조, 남의사가 구상 중인 이상 사회 그 자체인 독일과 이탈리아의 국가체제를 중국에 이식한다.
이후 모든 출판물에 다이리와 남의사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도록 하는 법을 재정하고, 소수민족을 중국인으로 만들기 위해 철저히 짖밟으며, 최종적으로는 모두가 남의사 아래 푸른 셔츠를 입고 다이리와 남의사에 충성하는, 푸른 공화국을 만들고야 만다.

-장췬
일부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승리한 장췬은 삼민주의 '민권'을 위한 정책을 실시한다. 보편적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실시하고 개헌을 포함한 선거도 개혁하며, 이전의 정적들과 화해하고, 언론 검열을 완화하고 시민권을 보장함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중국인들이 누리게 할 수 있도록 한다.
가장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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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주의 루트
작성예정

{{{#!folding -구국의 결단 루트
이후 벌어지는 대아대전에서, 중국의 항복도가 일정 이상으로 높아졌을 경우, 복수귀로 각성한 장쉐량이 군사를 이끌고 총통관저를 습격하며 자신이 대신 총통으로 취임한다. 이후 국명을 중화구국정부로 바꾸고 일본인 포로들을 학살하고 돌격대를 편성하는 등 중국이라는 나라 하나를 그야말로 일본인들을 죽이기 위한 국가로 만들어버린다.
이후 난징을 탈환하면, 난징에 있던 한간들과 일본군, 포로들을 도시째로 모조리 불태워 죽임으로서 난징 대학살을 역으로 저지른다.
대아대전 이후에도 운명이 갈리는데, 계속해서 중국의 아버지로서 권력을 잡거나, 자신도 쿠데타에 당해 자신이 구하려고 했던 이들에게 처형되기도 한다.
원역사에서 보여준 개그 캐릭터스러운 행보가 아닌 스탈린과 TNO 룽윈 뺨치는 미친 복수귀가 되어버린 모습에 많은 플레이어가 충격을 먹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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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 TNO 모드의 짭이라 불리지만 의외로 쌍둥이격이다.
  • 파일:스팀 아이콘.svg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모드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SSW와 다른 점이라면 일본만 승리하고 독일은 패배했다는 점.
  • 개발자 왈 미국을 재밌게 만들 방법이 없어서 쪼갰다고, 하지만 이것도 미국 컨텐츠가 기획조차 안되었을 시점의 이야기지 미국 업데이트가 된 현재 시점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다.
  • 고유 GUI들의 퀄리티면에서 대호평을 받고 있다.

6. 관련 문서



[본게임] 본 게임인 Hearts of Iron IV의 플랫폼/ESD/심의 등급이다. [본게임] [본게임] [4] 의외로 TNO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 [5] 원 역사에서도 임시 동맹의 느낌이 강했고 많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독일 나치가 사람을 함부로 죽여대는 미개인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반대로 나치는 이탈리아가 약골이라고 생각했다. [6] 3천만 평방킬로미터 [7] 원 역사에서의 시안 사건과는 많이 다른 양상을 보여, 이후 복수귀이자 반일주의자가 된 장쉐량은 중화구국당을 결성하고 반일활동을 벌인다. [8] 왕징웨이 루트를 탈 경우 중간에 왕징웨이는 병으로 죽게 되며, 왕징웨이의 후계자를 새로이 결정한다 [9] 룽윈 루트의 경우 극도로 연방화된 중국을 추구하며, 신강과 몽골, 운남등의 성들을 자치구로 분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