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서하대전 一次西河大戰 The First Great War of Xi X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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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364년 | |
장소 | 위나라령 중천, 진나라 수도 약양 | |
원인 |
위의 관중경략, 위를 진나라령으로 유인해 포위섬멸을 계획한 영사습의 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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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위魏 | 진秦 |
지휘관 |
상방 공숙좌 서하태수 주창 |
진공 영사습 태자 영거량 대부 균개 서부군 사령관 |
병력 |
위나라 서부군 8만 5천 서하주둔군 5만 총합 13만 5천 |
진나라 중앙군 5만 별동대 1만6천 진나라 서부군 7천 대부 균개 사병 5천 총합 7만 8천 |
피해[1] | 위군 약 4만 7천여명 | 진군 약 3만여명 |
결과 | 위군 대패, 진군 수도 약양 방위 성공 | |
영향 |
진나라 영거량 후계구도 확정 위나라 위신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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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기원전 364년 위와 진이 맞붙은 전쟁으로 위군은 13만 5천의 대군을 동원하였고 이에 맞서 진나라는 7만 8천을 동원. 총합 20만 넘는 대군이 서하전역에서 맞붙은 대전이다.2. 배경
2.1. 위의 사정
기원전 365년 중천 전투에서 위나라는 승전하여 진공 영사습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게 되었다. 중천 전투의 패전으로 진나라는 서융과의 마찰로 한층 국력을 소모하였고, 이를 기회로 삼은 상방 공숙좌는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어 중앙군 8만 5천 서하주둔군 5만의 총합 13만 5천의 대군을 동원. 진나라의 수도 약양을 향해 진격하였다.2.2. 진의 사정
간신히 서융을 잠재운 진나라였지만 곧이어 위의 13만 대군이 진격한다는 첩보를 접하게 되었다. 영사습은 진의 국력으로는 위의 물량에 밀릴 수밖에 없으며,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해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담한 계책을 꾸미는데 사전에 정예군 1만 6천을 빈양에 숨겨두고, 위의 대군을 맞아 직접 5만을 이끌고 중천에서 맞붙어 일부러 패전한 이후 약양으로 유인, 숨겨둔 별동대가 공성중인 위군의 후방을 타격하여 포위섬멸하는 계획을 세운다.[2]3. 전투의 전개
3.1. 중천 전투
결국 중천에서 위군 13만 5천과 진군 5만이 회전을 벌이게 되었다. 영사습은 적당히 싸운후 패주한 척 하려고 하였으나, 상대는 그 오기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공숙좌였다. 진군은 연기가 아닌 진짜로 대패를 당했으며, 약 2만 8천이 전사하였고, 진공 영사습은 다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뽑고 치료할 틈도 없이 서둘러 약양으로 후퇴해야 했다.[3] 한편 진공이 중천에서 패전하고 약양으로 퇴각하며 영사습이 만약을 대비해 차출했던 서부군 7천, 그리고 측근 대부 균개의 사병 5천이 약양에 합류하였다. 합쳐서 약 1만 2천의 지원군이었지만 이를 합쳐도 13만 대군 앞에서는 삼분지 일도 안되는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영사습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자신이 숨겨놓은 비장의 칼날이 건재했기 때문이었다.3.2. 공숙좌의 번뜩임
한편 중천에서 대승을 거둔 공숙좌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상함의 이유는 너무나도 쉽게 이겼다는 점이었다. 상대는 전대 위무후 시절부터 자신들을 괴롭혀 온 그 영사습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끄는 진군이 너무나도 쉽게 패전했던 것이다.여타 평범한 지휘관이었다면 승전의 여세를 몰고 망설임 없이 진격하였겠지만, 공숙좌는 더욱 신중해졌다. 즉시 군사를 풀어 주변 일대를 샅샅히 뒤지라 명을 내렸고 이내 진군 1만6천이 빈양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1만 6천이라는 숫자는 많지는 않지만, 전투에 유의미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이에 서하태수 주창에게 서하군 4만8천을 동원하여, 빈양에 주둔한 진군을 견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3.3. 영거량의 임기응변
그러나 이러한 위의 의도를 태자 영거량이 한발 앞서 읽었다. 위의 정찰대에 위치를 들키자 지체없이 낙수방면으로 군을 이동시켰다. 위의 본대에 들키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나 놓치지도 않는 적당선의 거리를 유지한 채 약양으로 향하였다.한편 공숙좌의 명령을 받고 빈양으로 향한 주창은 빈양이 비어있는것을 보고, 대충 정찰을 마친후 서둘러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약양으로 향하였다.[4]
3.4. 약양 공방전
진의 수도 약양에서는 혈전이 벌어졌다. 위의 대군이 사정없이 성문과 성벽을 공격하였고 수에서 밀리는 진군은 이러한 맹공에 점차 지쳐갔다. 이윽고 성문이 거의 뚫리려는 순간......태자 영거량이 이끄는 별동대가 위군의 후방을 급습하였다.
공성을 위하여 대부분의 군사들이 성문과 성벽에 몰려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지휘부는 그대로 노출되었다.
후방의 진군이 위군을 덮쳐 진을 흐트리는 것과 동시에, 약양성의 문이 열렸고 진공 영사습을 필두로 수비군 역시 위군의 요격에 나섰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던 위군은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3만 6천이라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공숙좌는 눈앞에서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절규하였지만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병력을 수습해서 퇴각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기의 수제자답게 혼란에 빠진 위군을 재정비하여 간신히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하였지만, 자신에게 전권을 믿고 맡겨준 위앵의 기대를 배신한 것에 실의에 빠져 가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3.5. 빈양 전투
대승을 거둔 영거량이었지만 그녀는 안심하지 않았다. 공숙좌가 영거량의 별동대를 견제할 목적으로 분리된 서하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거량은 즉시 병사를 재편하여 자신의 별동대와 수성군 중 싸울 수 있는 군사를 추려 요격에 나섰다.이윽고 양군은 빈양에서 조우하였는데 진군과 위군 모두 예상치 못한 경로에서 만난 탓에 당황하였다. 그러나 정예로 구성된 진나라군이 먼저 전투태세를 마쳤을 때 위군은 아직도 행군대형에서 전투대형으로 변환 도중이었다. 결과는 위군의 대패였다. 서하군 4만 8천중 약 1만1천이 전사하였고 군을 지휘하던 지휘관 주창은 영거량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 포로로 잡힌 주창이 영거량에게 욕보이지 말고 죽일 것을 종용하였지만 영거량은 휴전 교섭의 팻감을 죽이지는 않는다 말하면서 혹 교섭이 실패할 시에는 자신의 후궁이 될 것이라고 조롱하였다.
4. 결말
4.1. 위진 휴전성립
그렇게 진나라 측에서 보낸 휴전 사절이 안읍에 도착하였고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위앵은 13만이 대패하였고 서하 태수 주창은 포로로 잡혔다는 비보에 망연자실한 상황이었다. 진나라 사절은 위앵에게 위의 침공에 대한 보상과 서하 장성지대의 경계지역 원리를 요구하였다. 이때 위앵은 인생 처음의 도박에 나섰다. 사절의 요구에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아직 위나라에는 7만의 군사가 남아있고, 자신의 명령만 떨어지면 재차 약양을 향할 것이라는 허풍을 친 것이었다. 물론 실제 위군에 그러한 여력은 없었지만, 위앵의 필사적인 도박수가 먹혀들어 사절은 원리를 요구조건에서 제외시켰다.그렇게 양측의 휴전이 성립되어 1차 서하대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전후처리
5.1. 진나라
태자 영거량이 시험삼아 맡게 된 별동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기에 진공 영사습은 대전이 끝을 맺기도 전에 그 자질에 만족하였으나, 이 대전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이전처럼 전장에 나설수 없는 몸이 되었다. 수도 약양은 재건 자체는 문제될것이 없었지만, 치열한 공방전 탓에 크게 손상된 상태였다.영거량은 내심 약양에서 함양으로 천도하고 싶었지만 서하수복의 지속을 천명한 아버지 영사습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나, 이 대전으로부터 이듬해에 영사습이 졸하면서 원 역사와 달리 아직 폐지되지 않은 순장으로 주요 파벌 아래의 말단 실무진이나 그 외 격이 낮은 귀족층들을 데려가주며 영거량의 의사대로 내부를 재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를 얻었다.
5.2. 위나라
비록 패전하였지만, 공숙좌는 위앵의 재신임으로 여전히 상방의 직위를 유지하였다.[5] 대신 포로로 붙잡혔던 서하태수 주창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파직하고 유배를 보내었다.[6] 그리고 비어있는 서하군 사령관에는 공자 위앙을 임명하는 것으로 위는 전후처리를 마쳤다.하지만 이 전투로 인해서 생긴 위의 피해는 막대했으며, 무엇보다도 최강국으로써 드높던 위신이 이 전투로 상당히 추락하였다. 이렇게 추락한 위신과 병력의 손실은 '오기 이후의 명장'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면서 방연의 대두에도 영향을 주게 되지만, 방연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자기 프라이드를 위해 위의 국력을 토막내는 전쟁인 중원대전의 계기를 마련해 버리고 만다.
결국 1차 서하대전은 위나라가 최강국 위치에서 동쪽의 제, 서쪽의 진과 양면전선을 유지하던 초기 전국시대 체제 붕괴의 서곡이라 평할 만 하다.
[1]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
[2]
영사습은 별동대의 지휘관으로 태자 영거량을 임명하였는데, 이는 딸이 자신의 후계자로 적합한지 시험하려는 의도였다.
[3]
이는 동시에 의연함을 보여 그 상황에서도 자군을 위무해 최소한 흩어지지 않고 퇴각을 하게 만드는 효과를 보았다.
[4]
주창은 약양공략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싶은 욕구에 정찰을 사실상의 요식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5]
공숙좌만큼 국사를 볼수있는 인재가 없었다. 그와는 별개로 공숙좌에 대한 신뢰는 금이 갔지만
[6]
실제로도 패배의 지분이 컸다. 만일 주창이 공숙좌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했으면 약양에서의 어이없는 대패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