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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東川町, ruby=ひがしかわちょう)] 히가시카와초 / Higashikawa Tow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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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町旗) | 문장(紋章) | }}} | |||
기본 정보 | |||||
국가 | 일본 | ||||
지방 | 홋카이도 | ||||
도도부현 | 홋카이도 카미카와 종합진흥국 | ||||
면적 | 247.30km² | ||||
인구 | 8,510명 | ||||
상징 | |||||
정화 | 산진달래(エゾムラサキツツジ) | ||||
정목 | 계수나무(カツラ) |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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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홋카이도 카미카와 종합진흥국에 있는 정이다. 특별할 것 없는 시골 마을이었지만, 특색 있는 마을을 조성하기 위한 각종 정책들 덕분에 이주민이 늘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덕분에 소멸위험지수가 높은 지방자치단체들의 참고 사례로 자주 활용된다.2. 상세
컨트리 사인 | |
아사히다케 산과 하고로모 폭포를 형상화했다. |
목공 장인들이 많이 모여있어 가구로도 유명하다. 가구 만들기가 마을에 퍼진 것은 1954년의 태풍 때 쓸려온 나무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는데, 점차 마을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마을에는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 의자를 만들어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 2006년에 아사히카와시립대학의 제안으로 시작된 '너의 의자(君の椅子)' 프로젝트다. 의자의 디자인은 매해 다른 디자이너가 맡는다. 유명 건축가인 쿠마 겐고가 이러한 특징에 매료되어 히가시카와초에 나무로 된 건축 사무실을 짓고, 마을과 협력해 매년 가구 디자인 공모전을 열고 있다.
히가시카와초는 마을 진흥을 위해 행정, 문화, 산업 등의 분야에서 다각적인 사업을 진행했고, 여기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1950년대에 1만 명을 기록했던 인구는 1990년대에 7천 명까지 감소했다가 8천 명 수준으로 다시 증가했다. 전체적인 목표는 인구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8천 명 선을 유지하면서, 적당한 여백이 있는 적소(適疎)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아래에 이 사업들에 대해 서술한다.
- 사진 마을(写真の町) 사업: 히가시카와초는 '사진문화수도'를 표방한다. 1985년부터 ‘사진 마을' 만들기에 주력해 사진 고시엔, 고등학생 국제 사진 교류 페스티벌, 히가시카와 국제 사진 페스티벌 등을 개최하고 있다. 행사들의 특징은 참가하는 타지인과 외국인을 불러들여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게 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홈스테이를 제공하여 행사에 참여한다.
- 일본어학교 개설: 2009년부터 일본어 유학생을 받다가 2015년에 정식으로 개교했다. 외국인 유학생들이 커뮤니티에 들어오는 것은 다른 문화에 개방적인 마을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가 있으며, 유학생들의 씀씀이 자체도 마을에 큰 경제 효과가 된다.
- 히가시카와 주주제도: 고향납세 제도를 발전시킨 것. 히가시카와초에서는 기부자를 주주, 기부금은 투자금이라고 부른다. 기부자는 히가시카와초의 환경, 교육, 복지 사업 등의 목록에서 원하는 사업을 선택해서 기부할 수 있다. 주주들은 히가시카와초에서 무료 숙박과 시설 이용 등의 우대를 받는다.
다만, 히가시카와초의 인구 증가에는 외부 요인의 영향도 있다. 1990년대 초 인근 도시인 아사히카와시 인구가 땅값 폭등으로 인해 30만 중반에서 정체되자, 오히려 주변 지역으로 인구가 분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1] 히가시카와초는 1994년 전후로 택지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새로 지은 주택들은 모두 팔려나갔다. 버블 붕괴 직후라 금리가 내려가고 주택 구입시 금융 지원이 확대된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애써 개발한 택지 분양에 실패하고 그대로 소멸 위기에 진입한 지자체의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히가시카와초의 노력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3. 교통
아사히카와 공항과 7km 떨어져 있으며, 차로 13분 가량 걸린다. 히가시카와초를 지나는 철도는 없다. 아사히카와 전기궤도 히가시카와선이 있었지만 1973년에 폐선되었다. 아사히카와역에서 몇몇 노선버스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4. 기타
- 히가시카와초 동부의 추베츠 강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되어 건설한 에오로시(江卸) 발전소가 있었다. 조선인 1천 명 이상이 이곳의 가혹한 조건 속에서 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이한 점은 일본의 시민단체와 히가시카와초가 직접 조사를 시작했다는 것. 우리는 잊었지만… ‘조선인 징용자’ 찾아나선 日마을
- 일본 배우 시바사키 코우가 히가시카와초에 별장을 짓고 도쿄를 왕복하면서 살고 있다. 원래는 아사히카와 출신인 아버지를 위해 지었다고.
[1]
1992년 아사히카와시의 평균 땅값은 히가시카와초의 5배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