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츠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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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藤原惠美押勝나라 시대때의 희대의 권신.
2. 생애
2.1. 초기 생애
후지와라 씨족의 시조인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장남 후지와라노 무치마로(藤原 武智麻呂, 남가)의 차남이었다. 초명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어렸을 적 대납언(大納言) 아베노 스쿠나마로(安倍宿奈麻呂)에게 산술(算術)을 배우면서 출중한 재능을 드러냈다. 734년 종 5품의 대학소윤(大學少允)으로 처음 조정에 출사했다.관직에 나가고 3년 뒤인 737년에 아버지 무치마로와 아버지의 형제 세 명이 모두 천연두로 급사하였고, 이게 후지와라 4형제에 의해 주살당한 나가야 왕의 저주라는 소문이 돌면서 집안이 일시적으로 세력을 잃었다. 코묘 황후의 후원으로 743년 민부경(民部卿), 746년 식부경(式部卿)이 되었고, 46대 고켄 덴노가 즉위한 749년에는 대납언으로 승진한 다음 고모인 코묘 황태후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천황이 설치한 시비추다이(紫微中臺)의 장관인 시비료(紫微令)에 올라 정권과 군권을 손에 쥐는 등 권력의 정점에 가까이 이르기 시작했다.
일단 겉으로는 코묘 황태후의 가정기관 체제였지만, 시비츄다이는 유사시 병권을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장관인 시비료는 대납언(大納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으며, 태정관의 대신들이 가지는 나라 안팎의 여러 군사권을 관장하고, 태정관이나 중무성을 거치지 않고 직접 조칙을 행할 권한도 갖고 있었다.
2.2. 타치바나노 모로에를 몰아내다
744년 그는 45대 쇼무 덴노의 차남이자 당시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인 아사카 친왕(安積 親王)을 밀실에서 독약으로 살해하였다. <속일본기>에는 애매하게 기술했으나 당시 정황을 보면 거의 확실하고, 당시에도 의심을 샀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아사카 친왕을 주살한 이유는 친왕의 어머니가 코묘 황후가 아니라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県犬養 三千代, 타치바나씨의 시조)의 인척인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히로토지(県犬養広刀自)였기 때문이었다.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는 30대 비다쓰 덴노의 후손인 미누 왕과의 사이에서 타치바나노 모로에와 쇼무 덴노의 후궁 타치바나노 코나카치(橘古那可智)의 아버지인 타치바나노 사이(橘佐為)를 낳았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후히토와 재혼해 코묘 황후를 낳았다.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는 말년에 43대 겐메이 덴노로부터 타치바나씨를 하사받았고, 본인 사후에 그녀의 아들들이 타치바나씨를 물려받았다.
미치요의 아들 타치바나노 모로에는 역사상 타치바나씨 최고의 권신으로 새아버지인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 후지와라노 타비노와 혼인해 인척관계를 강화하고, 장인인 후히토 사후 좌대신(左大臣)의 자리까지 올랐던 인척이었다. 하지만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모로에와 권력다툼을 벌였는데, 모로에는 755년에 술자리에서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실각하고 2년 후 사망했다. 사실 후지와라 씨족 내에서도 치열한 권력다툼이 전개된 걸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유독 후지와라 씨족은 권력욕으로 인한 분란을 심하게 벌이는 면이 있었다.
그는 쇼무 덴노가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최고의 절이자 후지와라 씨족의 절을 억누르기 위해 풍수지리를 참고해 만든 절인 도다이지 건립을 방해하고, 쇼무 덴노를 옥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로 인해 황태녀로 책봉되었던 쇼무 덴노와 코묘 황후의 딸 아베 내친왕(阿倍內親王)이 즉위하였으니, 이가 곧 고켄 덴노였다.
2.3. 권력을 쥐다
756년 2월 태상천황(太上天皇)으로 있었던 쇼무 덴노가 붕어하면서 니이타베 친왕(新田部親王)의 아들인 후나도 왕(道祖王)을 황태자로 책봉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나도 왕의 아버지인 니이타베 친왕은 40대 덴무 덴노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의 딸인 이오에노 이라쓰메(五百重娘) 사이에서 태어난 제10황자였는데, 이오에노 이라쓰메는 이복형제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 不比等)에게 재가해 후히토의 막내아들인 후지와라노 마로(藤原麻呂, 경가)를 낳았다.즉 후나도 왕은 후지와라 씨족과 인척 관계에 있던 황자였기 때문에, 고켄 덴노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거부할 이유가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후나도 왕을 즉위시킬 마음이 없었기에 757년 3월, 쇼무 태상천황의 상중에 음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폐위시켰다. 대신 나카마로는 자신의 요절한 장남인 후지와라노 마요리(真從)의 아내, 즉 며느리의 재혼 상대로 도네리 친왕의 아들인 오이노 왕(大炊王)을 점찍고, 자기 저택으로 끌어들인 뒤, 양자처럼 키운 후 758년 덴노로 즉위시켰다. 그가 후일 폐위되는 준닌 덴노다. 오이노 왕은 덴무 덴노와 니이타베노 황녀(新田部皇女)의 제6황자였던 도네리 친왕(舍人親王)과 타이마노 야마시로(当麻山背)의 아들이었다. 나카마로는 자미내상(紫微内相)에 올라 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 不比等)가 착수한 요로율령(養老律令)을 시행했다.
2.4.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반발하는 자들을 줄줄이 좌천시켰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않아 역대급 사건을 저질렀다.757년 6월 28일(양력 7월 22일)에 황족 야마베 왕(山背王)으로부터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 奈良麻呂)[1]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카마로를 제거하려 한다"는 밀고가 여제에게 들어왔지만, 여제는 나흘 뒤인 7월 2일(양력 7월 26일), 태후와의 공동성명으로 "모반 소문이 돌고 있지만, 모두 모반심을 품지 말고 조정을 따르도록 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그날 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게 중위부사인 카미츠미치노 아야타로(上道斐太郞)가 찾아와, "전임 비젠노카미인 오노노 아즈마히토(小野東人)로부터 모반에 가담해줄 것을 부탁받았다"는 밀고가 들어왔고, 나카마로는 중위부 군사를 움직여 후나도왕의 저택을 포위하고 아즈마히토 등을 잡아 좌위사부에 가두었다.
다음 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형인 후지와라노 토요나리와 주나곤 후지와라노 나가테 등에 의해 아즈마히토 등에 대한 심문이 이루어졌는데, 이때까지 여제는 "모반 계획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짐은 믿지 않는다"는 선명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날 아즈마히토는 여태껏 혐의를 부정하던 태도를 바꾸어 모반 계획이라는 것을 후지와라노 나가테에게 털어놓았다.
그가 털어놓은 모반 계획이란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와 오오토모노 고마로, 아스카베왕ㆍ기부미왕 등이 함께 군사를 출발시켜, 나카마로의 저택을 덮쳐 그와 오오이 왕을 제거한 다음 태후에게서 역령(驛鈴)과 옥새를 빼앗아, 고다이진 후지와라노 도요나리를 받들고, 천하에 격문을 띄워 여제를 폐위한 뒤 덴무계 황족들 가운데서 새로 천황을 추대한다는 것이었다.
아즈마히토의 진술에 따라 7월 4일(양력 7월 28일)부터, 타치바나노 나라마로를 비롯해 황족인 후나도왕과 기부미왕과, 오오토모노 고마로ㆍ타지히노 코시카이(多冶比犢養)ㆍ가모노 쓰노타리(賀茂角足) 등 이름이 거명된 자들이 잡혀들어왔다. 이 가혹한 상황을 본 코묘 황후가 동정심으로 이들을 한 번 석방시켜주기도 했으나, 이에 당황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다시 이들을 연행하였다. 전원이 몽둥이로 온몸을 몇 차례나 두들겨 맞는 등 혹독한 고문 끝에 모반 사실을 인정했으며, 후나도왕이나 기부미왕, 고마로와 아즈마히토, 코시카이, 쓰노타리 등은 고문 후유증으로 모두 같은 날 차례대로 숨을 거두었다.
타치바나노 나라마로도 이 와중에 죽었으며, 살아남은 아스카베 왕과 오오토모노 고자비는 도사로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고, 시오야키 왕은 직접 관여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황적을 박탈당한 후 신적강하시키는 것으로 죄를 묻지 않았다. 마타나리 역시 붙들려와서 나라마로로부터 들었다는 모반계획의 전말을 자백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사건에 연루되어 형을 받은 관인은 443인에 달했다. 심지어 후지와라노 나가테를 시켜 관련자들에 대한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자행했던 후지와라노 토요나리도 아들 후지와라노 오토쓰구(藤原 乙繼)와 함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員外帥)로 좌천당했다.
자신의 정적을 모조리 제거하는데 성공한 나카마로의 권세는 더욱 강해졌다. 역대 후지와라 씨족이 행한 온갖 무고 사건들을 볼 때 이 사건은 나카마로가 무고로 저지른 일로 유력시되고 있으며, 자기 집안 사람들조차 권력을 위해 족치는 이런 태도는 다른 후지와라 씨족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이미 이때부터 후지와라 씨족의 심각한 콩가루 집안 싸움이 시작되었던 셈.
2.5. 권세의 정점에 서다
758년에 준닌 덴노가 즉위하자 그를 옹립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는 '후지와라노 에미노 아손(藤原惠美朝臣)'이라는 별도의 우지(氏)와 가바네(姓)를 하사받아 아예 독자적인 집안으로 분리되어 나갔다. 또 '오시카쓰(押勝)'라는 새로운 이름을 하사받으면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쓰(藤原惠美押勝)'[2]로 개명하게 된다.그는 독자적인 정치를 펼쳐나가 부역을 경감하고, 평준서(平準署)를 창설하였으며, 관직 명칭을 당풍으로 바꾸는 행보를 벌였다. 같은 해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발발했는데, 12월에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오노노 다모리 등이 당의 혼란상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나카마로는 다자이후에 방비를 강화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신라와의 외교분쟁을 빌미로 소위 '신라정토계획(新羅征討計劃)'이라는 전쟁 준비계획을 세웠지만 당시 상황(上皇)이었던 고켄과의 불화와 동맹군으로 끌어 들이려던 발해의 미온적인 태도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도네리 친왕에게 황제의 칭호를 주도록 준닌 덴노를 유혹하고,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게 했다. 그는 화폐를 주조하는 권리를 획득받아 돈을 마구 주조했는데, 그것으로 자신만이 부를 쌓게 만들었다. 물론 현실에서 이 짓거리를 하면 당연히 초인플레이션이 발발할 수밖에 없고, 자연히 나라의 경제가 파탄나게 되었다.
그는 천황의 옥새와 같은 힘을 가지는 인장의 소유를 허락받았다. 이는 천황의 옥새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행정이나 군대를 그가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태정관의 합의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2.6. 말로
760년 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츠는 비 황족으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사(大師), 즉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다. 하지만 고모이자 정치적 후견인인 코묘 황태후가 사망하자 점차 사양길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고켄 상황과의 불화로 그의 정치적 입지는 더더욱 약화되기 시작했다.764년 준닌 천황이 고켄 상황에 의해 제압되어 폐위당하자 나카마로는 교토를 탈출해 아들인 후지와라노 시카치가 태수로 있던 에치젠 국(越前國)으로 도주해 재기를 꾀했지만 정부군에 패배해 처자식과 함께 비와 호에서 배를 타고 도망가려다 관군에게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그의 일족은 6번째 아들 후지와라노 요시오(藤原刷雄)만 남기고 멸족당했다. 그가 추진해왔던 정책 중 관명의 당화정책은 폐지되어 기존 관명제도로 회귀했지만 요로율령 등의 다른 정책은 일부수정되어 다음 정권에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한동안 후지와라 집안은 일본 조정 안에서 세력이 많이 깎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