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홍영철 洪榮喆[1]英喆, 洪英哲, 洪榮哲 등으로 표기한 기사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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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5년 |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 |
사망 | 1998년[2] (향년 73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진주고등보통학교 (전학) 경기중학교 (졸업 / 39회) 연희전문학교[3] ( 정치경제학[4] / 중퇴)[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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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조직폭력배. 소공동파의 두목이었다.2. 일생
1925년 평안남도 평양부(현 평양시)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180번지이다. 아버지가 조선식산은행 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쪽에서 간부로까지 근무하는 등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괴롭힘을 많이 당하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여 이후 깡패가 되었다고 한다. 안경을 끼고 싸우는 것과 그의 발차기와 오른쪽 스트레이트로 유명했다고 한다. 연희대학교 3학년 시절엔 1952 헬싱키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 주상점(朱商漸, 1926 ~ 1981. 6. 24)을 쓰러뜨리기도 했다[6].1938년 3월 진주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해 다니다가 경기중학교로 전학해 1944년 졸업한 뒤 연희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다니던 중에 1946년, 이화룡의 서북청년회에 특공대장으로 활동하여 반공투쟁을 펼쳤으며 그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남해 대구에서 제3대 학도의용군 총본부장을 했으며, 부산의 국제구락부 사건, 부산정치파동 등에 관여했다고 한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서울로 돌아가 중구 소공동에 '건설실업협회'를 창립하고 조직 '소공동파'의 두목이 되었으며, 1958년 9월 당시 조직원은 약 30명 정도였다.
한때 김두한의 권유로 건중친목회에서 일하다가 이후 이화룡의 명동파와 밀접한 교류를 맺으며 이정재를 견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공동파 조직원이 명동극장에서 일하던 명동파 조직원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난 뒤로는 명동파와 사이가 나빠져 이후로는 이정재의 화랑동지회와 연계하게 되었다. 1959년 4월 29일에는 대한반공청년단 감찰처 감찰부장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대한실업협회의 수익의 일부를 자유당에 상납하는 것에 불만이 있어서 반 자유당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기붕이 부정선거를 한다는 사실을 언론에 몰래 퍼뜨린 게 홍영철이라고 한다. 어쨌든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가 일어났을 때 종로구 세종로 100번지에 있던 반공회관[7]에서 고려대학교 재학생 시위대들에게 소위 '테러'를 감행할 것을 모의했고, 이 때문에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실각하자 특수폭행· 특수상해 혐의로 수배령이 떨어져 5월 6일 결국 체포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반공청년단 감찰부장의 경력 때문에 수감된 적이 있었을 때, 영어 원서를 읽어 형무관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죄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서 비교적 가벼운 형을 선고 받았다.
출소 후 선거에도 출마하고 사업을 하는 등 살았는데, 1987년에 경향신문에서 대한민주청년동맹에 대한 연재기사를 냈을때 우미관 식구들과 함께 근황이 공개되었고, 1998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홍영철에 대한 이 기록들은 유지광과 신상사의 증언과 책, 그리고 아들 홍인식 목사와의 인터뷰에서 발췌했다.
대한실업협회[8] 회장직을 7년 동안 유지하기도 하는 등, 주먹계의 조조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굉장히 악질인 인간으로,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이 사람 이름을 치면 반공 청년회의 고대생 습격 사건이니, 입찰 과정에서 폭력을 써서 갈취니 하는 등등의 기사들이 나온다. # 1963년에는 군납진흥회장을 잠시 맡았는데 광복군 출신 예비역 육군 중령 김병학과 전임 강세희 회장을 몰아내고 군납진흥회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회장을 맡은 것은걸로 보인다. 야인시대의 이미지와는 한참 다른 인간이다.[9]
3. 대중매체에서
3.1. 무풍지대
방영 당시에 생존한 상태여서 그런지 홍대호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극의 시작시점[10]과 에 극중 주먹들 중 젊은 축인 30세의 나이임에도 나이많은 배우가 담당하는 바람에 이정재보다도 더 나이많은 원로처럼 보인다.3.2. 드라마 야인시대
자세한 내용은 홍영철(야인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4. 기타
- 그의 아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의 홍인식 목사(1957년생)로, 중남미에서 해방신학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홍 목사는 만 16세의 어린 나이에 파라과이로 홀로 유학을 떠나 일찍이 중남미와 한국을 오갔고, 1993년부터 2020년까지 예장통합 목사로서 아르헨티나 신성교회, 현대교회, 순천중앙교회 등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직을 역임했다. 2021년 현재는 NCCK 인권센터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홍인식 목사의 증언[11]
- 아들 홍인식 목사는 해방신학쪽에서 저명한 인물이고 언론 인터뷰도 자주 한 편인데, 아버지가 홍영철이라는 사실을 밝힌 건 2021년 말의 저 영상의 증언이 처음이다. 다만 아버지를 밝히지 않은 채 어린시절 가정사 이야기는 이런저런 언론들과 자주 이야기 했었는데, 가정사가 그다지 평온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혼도 여러 번 하고 우환도 꽤 많았다고 했는데 홍 목사도 어머니와 살다 아버지에게 다시 갔다가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가는 등 꽤나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모양이다. 거기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일이다보니 당연히 우익 정치깡패였던 아버지의 행적을 좋게 보지는 않는 듯 하다.
[1]
[2]
아들인 홍인식 목사가 2021년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3]
44학번
[4]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과 동기동창이다.
[5]
4학년에 중퇴하였다.
[6]
물론 이 시기가 실질적인
조직폭력배의 전성기라서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지닌 조폭도 꽤 있던 편이지만, 어쨋거나 주상점 측이 운동선수인 관계로 뒷탈을 없애기위해 그냥 맞아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7]
현재는
KT 광화문 빌딩이 위치해 있다.
[8]
건중친목회의 후신 격이라고 한다.
[9]
그리고 드라마
야인시대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미화된 것과 달리, 실제
조직폭력배들의 절대다수는 의리나 진정한 믿음 같은것이 아예 없다.
[10]
같은 작가의 야인시대 92회 장면이 이에 해당이 되는데 이로 볼때 김관철 캐릭터와 겹쳐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
영상과 저 위에 있는 홍영철의 프로필사진을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부전자전이라고 굉장히 외모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