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구 洪命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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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 1596년 |
사망 | 1637년 2월 22일 (향년 41세) |
강원도 김화 탑동(現 비무장지대 강원도 김화군 탑동) | |
자 | 원로(元老) |
호 | 나재(懶齋) |
시호 | 충렬(忠烈) |
본관 | 남양 홍씨 |
부모 |
부친 - 홍서익(洪瑞翼) 모친 - 사평 심종민(沈宗敏)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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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문신.2. 생애
1596년 태어났으며 8세에 능히 시를 지으니 이항복, 신흠이 칭찬하고 장차 큰 인물이 될것이다고 말했다. 1619년 알성문과에 장원했으나 북인들의 위세에 시골에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등용되었다. 1625년 부수찬이 되고, 1627년 직강에 임명되었고 그 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종사관으로 종군해 평안 감사인 윤훤에게 평양에서 철수해서 전열을 가다듬자고 건의를 올렸다가 본인은 파직되고 윤훤은 처형된 일이 있었다. 이후 복직해 교리, 이조좌랑, 좌부승지, 1633년에 우승지가 되고, 1635년에 사간원의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며 중앙직의 요직을 역임했다.1636년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청군이 지름길을 따라 단시간안에 한성에 도달하자 평안 병사 류림과 함께 5,000명 정도 평안도 근왕군을 편성해 한성으로 진군해 자모산성에서 진주했다. 그러다가 조정이 남한산성에 포위해 있어 산성을 나와 김화에서 청군과 조우했다. 홍명구는 정면승부를 주장하며 비교적 평지인 탑동에서 싸우길 원했고 반대로 류림은 산지인 백동에서 진을 치길 원하며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결국 부대는 2개로 분산되었으며 홍명구는 자신의 병력 2,000명에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탑동에 진을 쳤다. 하지만 분열을 알아챈 청군이 화포로 먼저 진지를 파괴하고 돌격해 백병전을 펼쳤다. 설상가상으로 청군 기병이 후방의 산으로 우회해 뒤에서 돌격하며 본인도 전사했고 휘하 1,000명도 전사했다. 죽기전 어머니에게 유서를 남겼다. 시신은 부장인 박형이 수습했다. 사후 충렬이라는 시호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