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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494><colcolor=#fbe673> 신라 제2대 대보
호공 | 瓠公 |
|
국적 | 왜국 → 사로국[1] |
직위 | 대보(大補) |
출생 | 기원전 20년 이전 |
왜국 | |
사망 | 기원후 65년 전후 |
사로국 서라벌(?) | |
재임기간 (음력) |
제2대 대보 |
58년 1월 ~ ? |
[clearfix]
1. 개요
왜국 출신의 신라 초기의 재상. 기록이 남겨진 인물 중 위만 다음으로 등장하는 한국사의 귀화인이다.2. 상세
초기 신라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로, 왜국이라는 출신은 보통 일본 열도에서 온 일본인으로 해석되지만 진짜 일본 열도 출신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해상세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2]호공의 정체에 대한 서술은 극히 드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다음 기록이 전부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瓠公)이라고 불렀다.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권1 혁거세 거서간 조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권1 혁거세 거서간 조
일부에선 호공에 호가 박을 뜻하는 호이기 때문에 박씨족의 분파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으나, 호공이 박씨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서는 한 곳도 없으며 애초에 박은 한자 그대로 박이 아닌 밝-의 음차인데다가, 박씨의 시조 혁거세와 같은 시대 인물로 묘사되는데다 두 사람의 출신기록이 혁거세는 난생설화[3], 호공은 왜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설득력은 떨어지는 편.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 낙랑 ‧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對曰我國自二聖肇興人事修天時和倉庾充實人民敬讓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 而吾王謙虛遣下臣修聘可謂過於禮矣而大王赫怒劫之以兵是何意耶
對曰我國自二聖肇興人事修天時和倉庾充實人民敬讓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 而吾王謙虛遣下臣修聘可謂過於禮矣而大王赫怒劫之以兵是何意耶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혁거세 거서간 때로, '혁거세왕 38년( 기원전 20년) 2월 마한에 사신으로 가서 마한왕의 오만함을 꾸짖는다.' 이는 신라(사로국)의 국력이 옛날보다 신장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문장이라고 보기도 한다. 반대로 보면 상대적으로 마한의 국력이 약해졌음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후 탈해 이사금의 속임수로 집을 빼앗기는 굴욕을 겪는다. 석탈해가 호공의 집터가 좋은 것을 보고, 미리 숯과 숫돌을 몰래 묻어둔 뒤 호공에게 찾아가 자신의 집안은 원래 대장장이인데 잠시 다른 곳에 간 것이라 주장하고 땅을 파면 숯과 숫돌이 나온다고 말하고 한번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파보니 숯과 숫돌이 나오자 이를 근거로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훗날 이 집터에 석탈해가 신라의 왕궁이 될 경주 월성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주변보다 땅이 높은 언덕 위고 강줄기도 가까워 집터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 동화책이나 위인전 등의 판본에서는 이후 석탈해가 왕이 된 후에 호공에게 다른 집을 선물했다고도 하며, 석탈해가 호공의 집을 일방적으로 뺏은 게 아닌, 역시 외국 출신이었던 석탈해가 신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호공의 집에서 살면서 그와 제휴를 맺은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탈해가 이사금으로 등극한 직후 호공은 대보로 임명되었다. 대보는 현재로 따지면 국무총리쯤 되는 관직으로 왕 바로 다음가는 2인자이다.[4] 계림(당시는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자 탈해왕의 명을 받고 김알지를 주워온 것도 호공이다. 재상으로서 왕의 명령을 받고 나라 밖의 일을 도맡았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만을 따르면 장수왕급으로 장수한 인물이다. 마한에 사신으로 갔다는 기원전 20년에 최소한 10대 중후반(당시는 활동하는 나이가 현재보다 확실히 낮았기 때문에)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마지막 기록인 기원후 65년 김알지를 주워온 시점에는 80살을 넘는다. 따라서 호공이 어떤 한 개인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신라에 도래한 집단의 수장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한편, 그의 거주지였던 양산(楊山)[5]에는 표암봉(瓢巖峯)이라는 곳이 있는데, 표(瓢)가 호(瓠)와 자형이 비슷하고 뜻이 박으로 같기 때문에 모종의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일단 신라 시조 3명의 탄생에 모두 관여하고, 무엇보다 그의 집터가 훗날 월성(月城)으로 발전되었다고 전하는 만큼 초기 신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3. 여담
호공의 호(瓠) 자가 한국말로 박을 뜻한다고 해서 일반인들 중 박혁거세와 호공을 동일인물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삼국사기가 쓰여질 무렵은 고려시대로 성씨가 없던 귀족들에게 고려 고종이 한족식 성씨를 하사하고 거란족 성씨와 같은 복성은 단성으로 나누었고 1055년(고려 문종 9년)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할 자격이 없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나와 귀족들이 모두 중국에서 성씨를 가져와서 한족식 성씨 족보를 만들던 때이다. 거란과의 차별화를 둔 것도 있다. 삼국사기에서 알지는 김씨, 혁거세는 박씨 등 한족식 성씨를 붙였던 것이지 일본사기 등 삼국사기 이전 내용에서 혁거세는 박씨가 아닌 그냥 혁거세로 등장한다. 또한 호공의 박과 혁거세의 박이 우연히 비슷했을 뿐이지 혁거세의 박의 글자는 표주박이 아니라 후박나무 박이며, 그 유래에 대해서는 木(나무목) + 卜(점복)의 합성어라는 탄생설이 현재 표준이다.
[1]
왜에서 사로국으로
망명/
귀화
[2]
2021년 현재 주류
언어학계의 뜨거운 감자인
반도 일본어설과 엮어서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귀화해온 사람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 잔류해있던 일본계 소수민족 출신일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3]
현실적으로 해석해보려는 경우에도 보통 신라 건국집단을 북쪽에서 남하한 세력으로 연관지어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4]
탈해 또한 대보였다. 남해거서간 시기에 석탈해는 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곧이어 대보의 자리에 오른다.
[5]
오늘날의
양산시가 아니라, 사로 6촌 중 하나이다. 지금의 경주 시가지 동북쪽으로 비정되며,
탈해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의 바로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