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5 09:04:17

협률사

1. 개요

협률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황실 극장이자, 국립 극장, 근대식으로 지어진 상설 실내극장이다. 창극(唱劇)이 주가 되고 때로는 잡가나 연희(演戱)도 공연한 상설극장으로,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에 세워졌었다.

2. 상세

이 극장은 1902년에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처음엔 희대(戱臺)라는 이름의 궁내부 산하 황실 전용 극장으로 지어졌으나, 고종 황제는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다시 황명을 내려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칭하고[1] 국창 김창환을 사장으로 임명하여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예인을 극장 협률사에 모이도록 하였다. 당시 170여 명의 예인이 모였으며, 그들은 협률사 전속으로 대우 받았고, 관급[2]도 지급 받았다.

1906년 콜레라 등 당시 각종 질병의 만연과 영친왕의 투병으로 잠시 문을 닫았다가 1908년부터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였다. 당시 사실상 궁내부에서 직할하는 국립 기관이었으며, 대표는 ‘ 은세계’,‘ 혈의 누’ 등의 작가 이인직, 사장은 대령숙수 안순환, 전속 단장은 당대 최고의 국창 이동백, 배우는 김창환(金昌煥) 명창 40명 등 총원 64명을 두었다.
재개관 당시 창극 ‘은세계’ 등을 공연하였고, 경술국치 이후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후에 복원계획이 2013년 경에 있었지만 당연히 지금은 무소식이다. 그도 그럴 게, 남아있는 사진이라고는 단 한 장밖에 없는 데다가 내부고증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하려다 만 것으로 보인다.

판소리ㆍ민속무용 등을 주로 공연하였으며,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창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원각사가 없어지자 원각사 소속 예인들은 ‘조선성악연구회’ 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직속극단으로 창극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며 공연 활동을 하였다. ‘협률사’ - ‘원각사’ - ‘조선성악연구회 창극좌’로 이어지는 역사와 전통을 이은 단체가 현재 국립창극단이다.



[1] 협률사라는 이름은 새롭게 만든 이름이 아니라, 이미 희대라는 극장이 지어지기 40여 년 전부터 있던 명창들이 모인 단체의 이름이다. [2] 官給:나라에서 주는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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