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white><colcolor=#dd0c39> 헨리크 도브잔스키 Henryk Dobrzańs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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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년 6월 22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야스워 | ||
사망 | 1940년 4월 30일 (향년 42세) | |
나치 독일 우치키에주 오포즈노 인근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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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군인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폴란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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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기간 | 1912~1940 | |
최종 계급 | 기병 소령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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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군인이다.2. 생애
1897년 폴란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시절 공부를 잘했다. 학업 중 1896년으로 나이를 속이고 1912년 사병으로 입대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울란연대소속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18년 장교과정을 밟았으나 브레스트 조약이 채결되어 이에 불만을 품고 부대를 이탈해 러시아군으로 떠났다. 하지만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병에 걸려 병원에 후송된 후 탈출을 계획했고 체코를 거쳐 폴란드로 돌아왔다.이후 폴란드군 기병 장교로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 참가해 공을 세워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대위로 진급했고 기병학교에서 수학한 후 승마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러 국제대회에서 입상했으며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1927년 소령으로 진급했고 울란연대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하지만 1939년 제2총기병연대에서 병참장교로 복무중 트러블을 일으켜 정직처분을 받아 1939년 7월 전역했다.
하지만 1940년 독일이 폴란드로 침공해 다시 군에 복귀했고 제110예비창기병연대의 부연대장으로 독일, 소련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고 연대장은 부대해산을 명령했다. 하지만 도브잔스키는 거부하고 180명의 병력과 바르샤바로 향했다. 하지만 바르샤바가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후 병력들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독일군을 괴롭혔다.
이후 코크 전투를 끝으로 폴란드가 완전히 항복해 대부분의 폴란드군은 프랑스, 루마니아로 떠났지만 도브잔스키의 부대는 폴란드에 남아 독립부대로 저항을 계속했다. 부대원의 이름을 모두 가명으로 변경하고 자신도 후발(Hubal)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키엘체 지역에서 활동하며 여러 게릴라 작전에서 성과가 있고 민간인의 지원도 있었으나 독일군이 포위망을 좁혀왔고 협력한 민간인을 사살하고 물자를 약탈했으며 보급품의 부족, 병력들은 전사하거나 일부는 바르샤바의 저항군으로 떠나 전력이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탈영자, 배신자는 없었고 순수한 애국심 하나로 끝까지 저항했다.
1940년 4월 30일 오포즈노인근의 독일군 야영지를 공격하다가 독일군의 반격으로 기병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도브잔스키역시 기관총을 맞고 전사했다.
남은 기병대들도 2달간 더 저항했으나 6월 25일 해산식을 가졌고 대부분 바르샤바 저항군에 합류했다.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고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황금십자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 시신은 매장되었으나 유해는 발견되지 못했다.
- 1973년 그의 저항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