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color: #fff;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00><colcolor=#fff> 역사 | 북미 제네바 합의 · 북미 코뮤니케 · 북미회담( 2018년 북미정상회담 · 2019년 북미정상회담 · 2019년 남북미정상회동) |
사건사고 | 대북제재· 6.25 전쟁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EC-121 격추 사건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오남철 사건 · 2000년 프랑크푸르트 공항 사건 · 헨더슨 소령 사건 · 오토 웜비어 | |
외교 | 북미관계 | |
기타 | 한미연합군 vs 북중연합군 · 미군 vs 북한군 | }}}}}}}}} |
헨더슨 소령 사건 Major Henderson Incident |
||
|
||
북한군의 집단 폭행을 당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헨더슨 소령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일시 | 1975년 6월 30일 | |
장소 |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 선적리 공동경비구역 |
|
원인 | 헨더슨 소령에 대한 북한 기자 배성동의 도발 | |
부상 | 1명 (유엔군 소속 W,D.헨더슨 소령)[1] | |
영향 국가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clearfix]
1. 개요
|
북한군이 쓰러진 소령을 구타하는 장면
|
벤치의 등받이에 앉아 있는 남성이 문제의 배성동 북한 기자다. |
당시 수십 명의 대한민국 군인과 유엔군들이 겨우겨우 북한군들을 말리는 데 수십 명의 북한군들이 더 달려오고 이에 대한민국 측 장병들도 수십 명이 몰려와 굉장히 험악한 분위기 속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질 뻔했다고 한다. 참고로 위 사진은 80년대 전두환 정부에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사진과 함께 국민학교 교실마다 붙여놓고 반공 교육에 쓰기도 했다.
2. 상세
때는 북한의 대남도발이 끊이지 않았던 유신 시절. 당연히 남북한 최정예 군인들과 미군이 코앞에서 서로 정렬해 있는 판문점의 JSA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이날은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의 제364차 본회의가 진행 중이었다.JSA에 유엔군 소속으로 근무하던 헨더슨 소령이 본회의 회담장 인근의 벤치에 앉아 정모를 벗은 채 휴식을 취하던 중 북한의 기자 배성동이 다가와 헨더슨 소령에게 "자리를 비키라", "이 놈 나보다 키가 작다", " 간나새끼 빨리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우"라는 불손한 말을 내뱉고 나서 의자 등받이 위로 올라타 헨더슨 소령의 머리를 만지거나 때리는 등 약을 올렸다. 헨더슨 소령은 "불손한 태도를 삼가라"라고 주의를 주거나, 머리를 만지려는 그의 손을 쳐내는 등 별다른 저항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배성동이 헨더슨 소령에게 침을 뱉었고 그가 발끈해서 일어서자 이내 그의 배에 주먹을 두 차례 날린다. 이에 헨더슨 소령도 반격하며 싸움이 벌어졌고 근무교대를 위해 근처에 모여 있던 북한군 여러 명이 이를 보고 헨더슨 소령에게 달려들어 바닥에 밀쳐 넘어뜨린 뒤 쓰러진 그를 발로 짓밟고 걷어차는 등 심한 구타를 가했다. 집단구타의 주도자는 북한군 박철 중위로 1년 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의 주도자다.
|
인민군과 헌병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장면
|
현장 인근에는 30여명의 유엔군 병사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헨더슨 소령을 구타하는 북한군 무리를 말리려다 싸움에 휘말렸다. 이후 국군 병사와 유엔군, 헌병들이 뒤섞여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진행 중이던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도 약 5분간 일시 중단되었다. 헨더슨 소령은 후두부 두개골과 경추가 골절되고 중태에 빠지는 등 치명상을 입었다. 난투극은 남북 양측 소속의 경비장교들의 개입으로 곧 중단되었다.
|
국군병원으로 긴급 호송되고 있는 헨더슨 소령
|
이후 헨더슨 소령은 헬기로 국군병원까지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으며 고국인 미국으로 송환되어 메릴랜드 주에 위치한 월터 리드 국제 군사 의료 센터(Walter Reed National Military Medical Center)에서 회복을 거친 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명예 전역했다. 이때 그는 잠깐 동안 언어 구사 능력을 상실하는 후유증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공동경비구역 JSA 내에서 상호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남한군과 북한군이 대화도 할 수 있었다고 하며 남북 화해무드가 무르익었던 7.4 남북 공동 성명 직후에는 서로 형 동생하며 통일되면 서로의 집에 놀러가자고 주소를 교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에도 미군 소령이 두들겨 맞을 때 남한 병사들이 "형, 왜 이래."라고 하면서 뜯어 말렸다고 한다. 이러한 자유왕래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 완전히 구역이 나눠지면서 불가능해졌다. 당시 북한군과 대화한 남한 병사들의 증언이 반공교육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 이 자료에는 휴전선에서 대화한 것과 JSA에서 대화한 내용이 섞여 있다.
북한 측은 사후 회의에서도 "핸더슨 놈은 살아서 자기네 소굴을 밟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라고 뻗대며 난동을 부렸고 유엔군 측이 제시한 경비병력의 감축과 비무장, 군사분계선을 따른 분할 요구도 씹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