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5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230><tablebordercolor=#FFF> 海平 金氏 해평 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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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colbgcolor=#fff,#191919>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 ||
시조 | 김훤술(金萱述) | ||
중시조 | 김태(金兌) | ||
집성촌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
||
인구 | 4,790명(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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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시조인 김훤술(金萱述)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7세손이며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의 4대손이다. 그는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해평(海平)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시조 훤술(萱述)에서부터 누대(累代)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에 전직(殿直)을 역임한 태(兌)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본관은 시조가 해평으로 사적(賜籍)되었고, 후손 김수(金銖)가 해평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해평이라고 했다. 해평은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의 지명이다. 일찍이 해평(海平) 문리(文里)에 자리잡고 길씨(吉氏)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해평김씨(海平金氏)는 훤술(萱述)의 후손 영발(英發)이 길구(吉 久)와 함께 향교(鄕校)를 설립하고 많은 학자(學者)를 길러내어 명성을 떨쳤다.
태(兌)의 9세손 수(銖)는 고려말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직제학(直提學)․개성부윤(開城府尹) 등의 요직을 지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내침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는 데 공(功)을 세워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지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 고려 때 대제학을 역임)과 친교를 맺고 도의(道義)를 논하며 후진양성에 힘썼고, 1624년(인조 2)에 진사(進士)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주(輳)는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오른 맹성(孟性)은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유일(遺逸)로 벼슬에 천거되어 정언(正言)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며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날려 해평김씨(海平金氏)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김병훈(金秉勳)은 1888년(고종 25) 유일(遺逸)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1908년 5월 28일 동래 향교가 설립한 명륜학교의 학감을 지냈다. 1907년경 동래부 수면에 설립된 사립 여학교인 정정의숙(貞靜義塾), 같은 해 설립된 동래공립보통학교(현 동래초등학교), 1908년 6월 설립된 동래부수면사립노동야학교 등 여러 학교의 설립 취지에 호응하여 찬조금 또는 의연금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