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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죠피 숄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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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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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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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하얀 장미 결성전까지2.2. 활동2.3. 최후
3. 기타

1. 개요

파일:attachment/하얀 장미/Hans_scholl.jpg 파일:attachment/하얀 장미/Sophie_scholl.jpg 파일:attachment/하얀 장미/48003.jpg 파일:attachment/하얀 장미/Kurt-Hubert.jpg
한스 숄
1918년 9월 22일 ~ 1943년 2월 22일
조피 숄
1921년 5월 9일 ~ 1943년 2월 22일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1918년 11월 6일 ~ 1943년 2월 22일
쿠르트 후버 교수
1893년 10월 24일 ~ 1943년 7월 13일

나치에 저항하는 비폭력 단체인 하얀 장미를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2. 생애

2.1. 하얀 장미 결성전까지

오빠 한스 프리츠 숄(Hans Fritz Scholl)은 1918년 9월 22일에 독일 남부에서 태어났고 3살 터울 여동생 조피아 막달레나 숄(Sophia Magdalena Scholl, 애칭 조피)은 1921년 5월 9일에 태어났다.

1940년대 나치는 우생학에 경도되어 장애인을 비롯한 '열등 유전자'를 말살하는 T4 작전을 벌여 강제로 안락사와 불임 수술 등을 자행하고 있었다. 한스와 조피는 독일 제국 가톨릭 추기경 클레멘스 아우구스티누스 에마뉘엘 요제프 피우스 안토니우스 후베르투스 마리 그라프 폰 갈렌(Clemens Augustinus Emmanuel Joseph Pius Anthonius Hubertus Marie Graf von Galen, 1898~1946)[1]의 강론을 듣고 경악하여 하얀 장미를 결성했다.[2]

2.2. 활동

그들은 아우구스트 폰 갈렌 주교의 강론 전문을 복사하여 뮌헨 대학교에 살포했다. 그리고 급우 알렉산더 슈모렐(1917~1943), 빌리 그라프(1918~1943), 크리스토프 프롭스트(1918~1943) 등과 그들의 대학교수였던 쿠르트 후버(1893~1943)가 입단했다. 이들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나치가 곧 망한다고 주장하고 1943년 2월까지 나치 지지세가 강했던 독일 남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2.3. 최후

이들은 6번째 전단지를 1943년 2월 18일 뮌헨 대학교의 수업 종료에 맞춰 공개적으로 배포하던 중 나치당원인 뮌헨 대학의 경비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악질 나치 부역자 판사인 롤란트 프라이슬러에게 재판을 받게 된 남매는 당당하고 용감하게 신념을 발언하였으나[3] 사형을 선고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4]

유언"자유여 영원하리""태양은 아직도 빛난다"이다.

다른 하얀 장미 구성원들도 첫번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거나 2번째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5]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치는 이 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심지어 전단을 인쇄하는 것을 도왔나 멤버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까지 체포해 6개월에서 1년의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하얀 장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은 극심했다. 특히 이들이 체포되었던 시기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처참한 대패를 당하고 괴벨스가 총력전 선언을 하며 나치는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전 국민의 지지를 끌어모으고 있었던 때였다.[6]

나치의 연좌제식 탄압에 숄 집안은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당했으나 맏딸 잉에 숄(Inge Aicher-Scholl, 1917~1988)은 나치 패망 후까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녀는 나중에 "하얀 장미(Die Weiße Rose)"라는 책을 썼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1970년대 말 최초 출간되었으며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재출간된 버전(미네르바 문고 시리즈 제4권)으로 구할 수 있는데 아동 도서로 분류되어 있다.

3. 기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46년에 뮌헨 대학교 앞 중앙 광장이 이들을 기념하여 "숄 남매 광장(Geschwister-Scholl-Platz)"로 명명되었다.

상술한 잉에 숄의 '하얀 장미'는 1982년 독일(당시는 서독)에서 영화화되었다. #위키피디아 #IMDB

2003년에는 독일 역사의 위인들을 부조로 만들어 기리는 레겐스부르크[7] 발할라 기념사원에 반나치 운동가로는 최초로 조피 숄이 헌액되었다.


[1] 풀네임이 엄청나게 긴 것은 귀족이기 때문이다. 백작 출신이었다. 2005년에 베네딕토 16세가 성인으로 시성했다. [2] T4 작전 자체는 극심한 가톨릭의 반발에 1941년 공식적으로는 중지되었지만 나치 독일은 장애인과 일명 열등 유전자를 가진 자들에 대해서 전쟁 말기때까지 꾸준히 학살과 인체 실험을 진행했다. [3] 다만 훗날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완전한 증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조피는 자신과 오빠의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증거가 드러나자 솔직하게 인정한 뒤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4] 한스 숄은 국방군 병사로 복무한 적이 있어 총살형이 가능한지 문의했지만 당연히 거부당했다. [5] 쿠르트 후버와 빌리 그라프, 알렉산더 슈모렐. [6] 놀랍게도 나치당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무조건 탄압만 쓴 것이 아니라 보통 협박과 함께 나치당 고위직 같은 회유책을 더 많이 기용했다. 반 나치단체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는 것은 많은 공권력 동원을 해야하지만 이들의 리더를 회유시켜 버리면 그들의 조직을 분해시켜버릴수 있었기 때문이다. [7] Regensburg. 뮌헨에서 기차 타고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