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4 ~ )
1. 개요
대한민국 유격수 계보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전설적인 유격수. 역대 유격수2. 생애 및 선수 시절
경주시 출신으로 경주중학교 시절부터 유격수 수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갑작스럽게 야구부가 해체되었다. 결국 공부로 방향을 전환하여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려하였으나 실패하자, 야구부가 없던 경주고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야구부가 없었지만, 이후에 창설되었다.) 그리고 4월에 추천을 받아 부산고로 전학가게 된다. 이후, 3년 내내 유격수를 맡았으며, 특히 고 3이었던 1962년에는 에이스 김소식과 함께 4대 전국대회 중 고교선수권대회( 청룡기)와 쌍룡기( 화랑대기)까지 우승하며 스타로 등극했다.1963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새로 창단된 한국상업은행에 입단하여 국가대표 유격수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국가대표 유격수는 재일교포였던 박정일이었는데 실수가 잦았기 때문에 백업이었던 하일이 기용되기 시작했다. 이 때 그의 안정적인 수비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꺾고 우승하는 업적을 이룩한다. 이후 은퇴하는 1973년까지 쭉 국가대표 유격수를 맡았으며 그의 뒤를 잇는 유격수가 김재박이었다. 그의 유격수 수비는 빠르고 어깨가 좋기로 이름나 있었으며, 안정감에 있어서는 김재박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도 국대 유격수 계보 중에 수비로는 하일이 최고였다는 말을 하는 원로가 있을 정도. 유격수 수비의 중요성을 하일 자신의 플레이로 입증함으로써, 국가대표 선발에 있어서 유격수의 수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타격은 영 좋지 못했는데, 함께 플레이했던 2살 어린 후배 강병철 감독은 "일이 형은 타격은 꽝이었지만 수비는 불규칙 바운드조차 안 생긴다"고 촌평을 하기도 했다.
31세로 은퇴한 이후, 대한야구협회에서 일하기도 했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직장에서도 은퇴하였으며, 한국 스포츠 사진 연구소의 자문을 맡고 있다. 또한 고향 경주에 유소년 야구대회를 유치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여담으로 하일성이 처음 해설할 때 시청자들이 하일의 형이 해설한다고 생각하거나[1], 하일의 이름을 하일성으로 잘못 읽은 줄 알고 있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한다.[2] 심지어는 하일이 선수할 때는 말랐더니 해설 때 보니 살이 찌고 얼굴이 바뀌어 있어서 놀랐다는 엽서도 방송국에 왔었다고 한다.
3. 관련 문서
[1]
하일 + 성(형의 방언)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2]
사실 하일성은 대학 시절에 부상으로 야구를 그만두었다. 이후 교사 생활을 하다가 해설가가 된 케이스. 그래서 초기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