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한스 올로프 옙손 (Hans Olof Jeppson) |
생년월일 | 1925년 5월 10일 |
사망년월일 | 2013년 2월 22일 (향년 87세) |
국적 | 스웨덴 |
출신지 | 쿵스바카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80cm | 70kg |
소속팀 |
외르그뤼테 IS (1946-1947) 유르고덴스 IF (1948-1951) → 찰턴 애슬레틱 FC (1951 / 임대) 아탈란타 BC (1951-1952) SSC 나폴리 (1952-1956) 토리노 FC (1956-1958) |
국가대표 | 12경기 9골 (1949-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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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옙손은 쿵스바카 IF, 외르그뤼테 IS를 거쳐 1947년부터 유르고덴스 IF에서 뛰었다. 1950-51 시즌에 알스벤스칸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던 옙손은 1951년에 회사 차원에서 유학 겸 경기 관전을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 그러나 당시 찰턴 애슬래틱 FC 측에서 임대 제안이 왔고 유르고덴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옙손은 잉글랜드에 진출한 두 번째 스웨덴 선수가 되었다. 찰턴에서 옙손은 하이버리에서 아스날 FC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1951년 10월, 옙손은 아탈란타 BC로 팀을 옮겼고 팀의 성적은 12위로 그저 그랬지만 그는 22골을 넣어 리그 득점 4위에 올랐다. 옙손의 이 활약에 눈독을 들인 구단이 있었고 그 구단은 바로 SSC 나폴리였다. 나폴리는 옙손을 영입하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했다. 옙손은 4년간 자기 역할을 했지만 팀 성적은 미끄러졌고 어려운 찬스는 넣지만 쉬운 찬스는 놓치는 일이 잦아 나폴리 팬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경기장에서 "빌어먹을 젭손(Dannazione Jepson!)"이라는 챈트가 자주 울려퍼졌다. 여기에 구단 수뇌부와의 마찰과 빅클럽으로의 계속된 이적 루머들도 옙손이 나폴리에서의 생활을 더 빨리 정리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옙손은 1956년에 토리노 FC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축구화를 벗었다.
2.1.2. 국가대표
옙손은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군나르 노르달이 AC 밀란에 진출하고 나서야 블로굴트의 문이 열렸다.옙손은 짧은 국가대표 경력 안에서 1950년 월드컵에 주전 센터 포워드로 참가했다. 그는 월드컵 첫 경기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2골을 넣어 스웨덴의 결선 리그 진출을 쉽게 했다.
2.2. 이후
옙손은 스웨덴에서 경영과 테니스에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이탈리아에 정착했고 스타디오 산파올로에도 종종 방문했다.옙손은 2013년, 로마에서 대퇴골 골절 수술 후 신장 및 심장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옙손은 훌륭한 신체 능력을 갖춘 센터 포워드였다. 그는 매우 강하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지만 약간 뻣뻣하고 느렸다. 옙손은 불가능할 골은 넣지만 매우 쉬운 기회를 놓치는 것으로 유명했고 훌륭한 점프력으로 아크로바틱한 골을 넣는 것에 능했다. 그래서 렌나르트 스코글룬드는 이탈리아 기자들에게 옙손의 득점 장면과 실패 장면 모두가 경이롭다고 평한 적이 있다.옙손은 자신과 가장 유사한 선수로 보보 비에리를 꼽은 적이 있다.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