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8:46:40

필리피카이

파일:필리피카이.jpg

1. 개요2. 배경3. 내용
3.1. 1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4년 9월 2일)3.2. 2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4년 10월 24일)3.3. 3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4년 12월 20일)3.4. 4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4년 12월 20일)3.5. 5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1월 1일)3.6. 6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1월 4일)3.7. 7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1월 중순)3.8. 8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2월 3일)3.9. 9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2월 4일)3.10. 10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2월 중순)3.11. 11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2월 말)3.12. 12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3월 초)3.13. 13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3월 20일)3.14. 14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4월 21일)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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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4년~43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규탄하는 14개의 연설 모음집. 데모스테네스 마케도니아 왕국 필리포스 2세를 규탄한 연설문 '필리피카이'에서 차용했다. 키케로는 이 연설에서 원로원을 설득하여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고 그에 대항하는 군대를 옥타비아누스의 지도하에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배경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암살 계획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들이 왕이 되려는 카이사르로부터 공화국을 구했다고 여기고, 그들을 구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당시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의해 원로원이 카이사르가 생전에 내린 조치를 용인하는 대가로 암살자들에 대한 사면을 발표하도록 주선했다. 그리하여 카이사르파와 해방자파는 평화를 맺었지만, 아무도 이 평화가 오래 갈 거라고 보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사후 로마의 최고 권력자로서 위세를 떨쳤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심산으로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배정된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자신의 임지인 마케도니아 속주와 교환하기로 했다. 바다 건너 마케도니아로 가는 것보단 이탈리아 북부에 있던 갈리아 키사피나에 있어야 로마에 영향력을 게속 행사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원로원은 이에 반발했지만, 안토니우스는 6월 5일 민회에서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켰다. 그는 여기에 더해 카이사르의 권력 근거지였던 갈리아 통치권을 6년 임기로 요구했다. 키케로는 그를 꺾지 않으면 제2의 카이사르가 될 거라고 여겼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그와 접촉했다. 키케로는 처음엔 그를 아무 쓸모도 없는 애송이라 여기고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카이사르라고 부르나 필리푸스(옥타비아누스의 의붓아버지)가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네. 옥타비우스에 관해 말한다면 (중략) 그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매번 찾아와서 존경심을 내비치며 극진히 대우하고 안토니우스에 대한 불만을 쏟아붓자, 그는 이를 호기로 여겼다.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하여 카이사르의 고참병들을 일으켜 안토니우스를 무찌른 뒤, 옥타비아누스도 축출해 카이사르파를 무너뜨리고 공화국의 질서를 재정립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44년 9월 2일부터 이듬해 4월 21일까지 14차례에 걸쳐 안토니우스를 비방하고 옥타비아누스를 공화국을 구하도록 신이 보내준 청년으로 추앙하는 연설을 전개했다.

3. 내용

3.1. 1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4년 9월 2일)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죽음 이전과 이후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그에게 헌신한 사람들을 의원직에 대거 앉혔기 때문에, 그가 암살된 후에도 카이사르에 대한 '신앙'을 유지한 많은 의원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3월 17일 안토니우스와 협의하여 타협안을 마련한 것은 모두가 만족할 평화를 이루기 위한 마음으로 그리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더 많은 권한과 통제력을 가지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며, 6월 1일 원로원을 소집해 배정된 속주를 임의로 바꾸겠다고 밝힌 것은 안토니우스가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었으며, 6월 5일 민회를 소집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로마가 안토니우스의 의지에 좌우되는 노예가 되었다며, 자신은 이런 상황에 경악해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함께 시리아로 가려 했지만, 레조 인근에서 악천후로 인해 체류하면서 공화정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되새겨 로마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자신이 돌아온 직후인 9월 1일 안토니우스가 원로원을 소집해 모두와 화합하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맹세했지만, 자기가 여독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한 것에 분노해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자신의 집을 파괴하겠다고 공언했다며 비판했다. 그러면서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관용을 베푼 카이사르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로마 인민의 복지를 돌보는 과업을 수행하는데 집중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연설 말미에 다시 한 번 원로원에서 연설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한 것에 감사를 표하며, 두 집정관 안토니우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의 전제 정치와 반대되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제시했고, 질서와 자유의 힘을 모을 것을 촉구했다. 다른 필리카이와는 달리 안토니우스를 비판하면서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등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다.

3.2. 2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4년 10월 24일)

1차 필리피카이 후, 안토니우스는 수사학자 세스티우스 클라우디우스의 도움으로 키케로에 대한 맹비난이 담긴 연설을 9월 19일에 원로원에서 선포했다. 그는 키케로를 불충실하고 부도덕한 사람이며, 카이사르의 죽음을 계획했다고 비난했고, 키케로가 자신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를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원로원 회의에 불참했던 키케로는 10월 24일 2번째 필리피카이를 작성하여 책으로 출판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는 먼저 안토니우스의 비판에 대한 변론을 제기한 뒤, 안토니우스의 행실을 비꼬았다. 자신이 집정관을 맡던 기원전 63년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로마 전복 음모를 물리친 것과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비판에 분노를 드러낸 것을 비교하며 그때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고 조롱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 암살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카이사르의 죽음이 로마의 모든 정직한 시민들에 의해 폭정으로부터 대중을 해방시킨 일로 합의되었기 때문에 비난이 아니라 찬사라고 주장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3월 17일에 카이사르 암살자들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니, 그의 연설에는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다.

키케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안토니우스의 방탕하고 사악한 사생활을 비난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음탕하고 잔인한 젊은 시절을 적나라하게 묘사했고, 저명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들의 자리를 꿰차서 이탈리아를 혼란에 빠뜨리는 바람에 카이사르에게 질책당하는 불명예를 안고도 어리석은 짓을 계속한 안토니우스를 비꼬았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돌라벨라의 집정관 선출을 방해했고, 나르본에서 카이사르에게 아첨해 신뢰를 회복했다고 비난했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지난날 독재관을 영구 폐지하는 법안을 입안했지만 다른 목적을 위해 개인의 힘을 이용하기 시작했다며 그의 전횡을 성토했다.

3.3. 3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4년 12월 20일)

기원전 44년 11월 28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를 자신에게 내주지 않으려는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일으켜 데키무스가 머무는 무티나를 포위했다. 이리하여 무티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하여 안토니우스를 꺾으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브룬디시움에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백인대장 300명을 잡아죽이고 캄파니아 주의 세사에서도 비슷한 짓을 저지른 걸 강하게 비판하며,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영광스러운 조상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로마에서 추방한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보다 사악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 필리피카이에서 5월 초에 로마에 도착한 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를 처음으로 언급하면서, 그를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청년, 아니 아직은 소년이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적인 재능과 용기를 가진 자입니다. (중략) 그는 매우 강력한 노병들을 재소집했고, 상속받은 재산을 그 군대에 다 쏟아부었습니다. 아니 쏟아부었다기보다는 공화국의 생존을 위해 그 돈을 투자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도망자로 지칭하고 유피테르 신전에서 엄숙한 희생 의식을 치르지 않고 갈리아로 가버렸다고 비판했으며, 데키무스 브루투스에 대한 그의 위협적인 행진으로 인해 새로운 내전이 다가왔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에게 부끄러운 왕관을 바친 일도 있으니 더 이상 집정관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자고 촉구했다.

3.4. 4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4년 12월 20일)

12월 20일 오전에 원로원 회의에서 3차 필리피카이를 발표한 키케로는 그날 오후 포로 로마노 광장에서 시민들을 향해 연설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침략으로부터 끝까지 맞서 싸우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민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가이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와 그를 따르는 퇴역 군인 및 군단병들에게도 찬사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탄하며, 신들도 안토니우스 무리의 파멸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로마인들의 호소에 곧 응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중과 원로원이 이토록 친밀한 적이 없다고 찬사를 보내며, 제2의 스파르타쿠스이며 카틸리나보다 지독한 안토니우스가 가한 위협은 곧 근절될 거라고 선언했다.

3.5. 5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1월 1일)

기원전 43년 1월 1일, 새해 원로원 회의가 열렀다. 이날 회의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의 장인인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먼저 연단에 서서 안토니우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화해시키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키케로는 즉시 연단에 서서 칼레누스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원로원에게 당장 군대를 파견하여 안토니우스를 토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키케로는 이 연설에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비난을 되풀이하며, 그를 최악의 범죄자 중 하나로 묘사했다. 또한 그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서류를 위조하여 최대한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시민권 수여, 토지 기증, 면세 등의 조치를 내렸다고 비난하고, 경호원으로 하여금 자신을 둘러싸게 한 것은 왕과 다를 바 없는 짓이라고 비꼬았다.

키케로는 사절 파견은 전쟁의 수행을 마비시킬 뿐이라며, 즉각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규모 입대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집정관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고 2월 1일까지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탈영한 모든 자를 사면하되 이후에도 남아있는 자들은 안토니우스와 함께 국가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봤다. 키케로의 제안은 대다수 원로원 의원을 설득시키는 듯 했지만, 호민관의 거부권 행사로 회의가 다음으로 미뤄졌다.

3.6. 6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1월 4일)

1월 4일, 원로원은 키케로의 반대를 뿌리치고 안토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에 키케로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아풀레우스가 소집한 대중 집회에서 원로원의 결정에 반대를 표했다.
"로마인 여러분, 당신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고 있고 모두가 당신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누구를 위한 사절입니까? 공적 자금을 낭비하고, 폭력에 의존하여 국가에 법률을 부과하고, 민회를 해산시키고, 원로원을 포위하고, 브룬디시움에서 공화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일부 군단을 데려온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는 도적단과 함께 갈리아를 습격했으며, 이제는 브루투스를 무티나에서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에게 사절을 보내는 건 사절이 한니발에게 파견된 것과 같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들에게 공공의 적에 대항하여 단호하게 대처하자고 촉구하면서도, 기왕 사절을 보내기로 한 이상 그들이 무사히 귀환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항상 자유를 누릴 운명을 타고난 로마인의 우월성을 찬송하는 것으로 연설을 마무리지었다.

3.7. 7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1월 중순)

기원전 43년 1월 중순, 키케로는 콩코르디아 신전에서 안토니우스와의 협상을 중단하고 전쟁 선포를 촉구하는 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항상 평화를 원했지만 지금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며, 원로원이 도덕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은 공공의 적에 대한 공화국의 전투라고 주장하며, 공화정의 배신자를 꺾어야만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밝혔다.

3.8. 8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2월 3일)

키케로는 집정관 가이우스 판사가 전쟁(bellum) 대신 소란(tumultu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비판했다. 그는 "소란없는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전쟁 없는 소란은 없다."라며 모호한 용어를 사용해 상황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에게 온건적인 발언을 한 인사들 역시 비판하면서, 3월 15일까지 안토니우스를 떠난 탈영병들을 시민으로 받아들이되 그 이후에도 안토니우스와 함께 하는 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판단하자고 주장했다.

3.9. 9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2월 4일)

키케로는 먼저 일찍이 안토니우스에게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으나 기원전 43년 1월 중순에 급병으로 사망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추모했다. 그는 고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한 영웅이었다고 주장하며, 그를 기리는 동상을 연단에 세우고 무덤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이와 별도로, 루푸스의 죽음의 도덕적인 책임은 안토니우스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3.10. 10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2월 중순)

기원전 43년 2월 중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사로잡고 마케도니아, 일리리아, 그리스의 영토가 자신의 권력하에 놓이면서 로마 공화국의 지배력이 회복되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원로원에 보냈다. 키케로는 이를 찬미하는 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헌신 덕분에 로마 공화국은 동방의 영토를 안토니우스의 손아귀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로마 공화국의 많은 영토가 가는 곳마다 약탈과 강탈을 일삼는 안토니우스에게 적대적이라고 강조하며, 공화국을 구하고자 군대를 모집하는 브루투스에게 마케도니아, 일리리아, 그리스에 대한 지휘권을 넘기자고 제안했다. 원로원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지휘권을 내렸다.

3.11. 11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2월 말)

기원전 43년 2월 말,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로원은 즉시 회의를 열고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돌라벨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기로 했다. 다음날 키케로는 원로원 회의에서 돌라벨라 토벌의 임무를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위임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카시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인정하고 주변 속주들도 그를 제국의 '마이우스'로 여김으로써, 안토니우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 지지자들을 상대로 브루투스와 연합 전선을 짜기를 희망했다. 안토니우스를 응징해야 한다는 데 동의를 표했던 카이사르파도 이번 제안은 반대했고 집정관 판사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지만, 키케로는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고 카시우스에게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행동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카시우스는 이에 따라 돌라벨라를 즉시 공격해 자살로 내몰았다.

3.12. 12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3월 초)

기원전 43년 3월 초, 원로원은 5인의 원로원 의원을 안토니우스에게 보내 평화를 촉구하기로 했다. 이 중 한 명으로 선정된 키케로는 사절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로원이 시킨 일이니 안위 따위 신경쓰지 않겠지만, 자기가 지금까지 안토니우스를 비판했던 걸 상기시키며, 그런 자신이 사절단의 일원이 된다면 안토니우스가 타협에 응할 리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협상은 안토니우스가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역에서 이뤄질 텐데, 협상이 잘 되지 않는다면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주어질 거라고 밝혔다. 원로원은 그의 주장에 동의하여 그를 사절단에서 빼기로 했다.

3.13. 13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3월 20일)

3월 20일, 원로원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가 보낸 서신을 공개했다. 두 사람은 이 서신에서 안토니우스와 원로원의 화해를 촉구하며, 평화 회담을 중재해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평화는 양측 모두 원하고 있지만 치열하고 힘든 전쟁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저속한 용어로 쓴 서신을 폭로하며, 안토니우스와 지지자들의 천박한 행실을 규탄하고 그들을 몰아내야만 로마 공화국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이에 따라 레피두스와 플란쿠스의 제안을 거부했고, 민회 역시 같은 의견을 표명했다.

3.14. 14차 필리피카이(기원전 43년 4월 21일)

기원전 43년 4월 20일, 무티나 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여 갈리아로 도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날인 4월 21일 소집된 원로원 회의에서, 키케로는 집정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를 칭송하면서 신들께 감사를 표하는 의식을 50일간 거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신들에게 불순종하고 도덕적, 정치적으로 타락한 안토니우스를 맹비난하며, 공화국 수호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군인들의 모든 유족에게 포상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전쟁 사망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울 것을 조언했다. 그렇지만 안토니우스가 아직 건재하니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며, 평화에 대한 너무 빠른 열망을 경고했다.

4. 이후

키케로는 장장 14번에 걸쳐 안토니우스를 비난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힘을 실어주는 연설을 벌였고, 원로원은 그의 의도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를 진압군 사령관으로 세워 집정관 판사, 히르티우스와 함께 안토니우스를 치게 했다. 그 결과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면서, 키케로의 계획은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두 집정관이 전투 중 사망하고 옥타비아누스만 남으면서 계획이 급격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1]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두 집정관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자 중 한 명이라는 이유로 함께 하기를 거부했으며 대부분의 군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이 브루투스에게는 개선식의 영예를 허용하면서 자신에게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소개선식을 의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병사들에게 약속했던 보상금과 토지 수여, 병역 면제 등을 흐지부지하려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행동하기로 마음먹고, 기원전 43년 7월 400명의 백인대장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원로원에 보내 원로원이 약속했던 보상금을 주고 집정관 직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원로원이 요구를 거부하자, 옥타비아누스는 그해 가을에 로마로 진군하여 마르스 광장을 점령한 뒤, 야니쿨룸 언덕과 다른 곳에 있던 국고를 접수하여 병사들에게 약속한 보상금을 나눠주고 집정관에 취임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손을 잡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이들을 토벌할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오히려 두 사람과 손을 잡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삼두는 로마를 곧장 장악한 뒤 살생부를 작성해서 군자금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살생부이긴 했지만 카이사르 암살에 직접 가담한 자가 아니라면 돈을 내고 목숨값을 치르고 살 수 있었기에 추방으로 종결되었다. 한편 이와 별개로 삼두는 자신들의 동맹이 소중하다는 징표로서 각자 희생 제물을 내놓기로 했는데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자기 삼촌과 형이라서 나중에 용서받고 은퇴했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제물로 내놓은 키케로는 예외였다. 카이사르파 전체의 절멸을 꾀했으며, 필리피카이로 신랄한 인신공격을 받았던 안토니우스는 반드시 키케로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을 냈고 레피두스는 거기에 동의, 옥타비아누스는 이틀간 안된다고 우겼다가 3일째에 묵인하여 희생제물 중 유일하게 죽게 된다. 삼두가 보낸 병사들이 키케로를 찾아왔을 때 그는 가마를 타고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따라잡혀 참수당했고 그의 머리와 오른손은 포로 로마노에 전시되었다.


[1] 사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인 옥타비아누스의 철저한 연기였다. 옥타비아누스의 권위는 마지막 민중파였던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점에서 나왔고 군인들이 죄다 카이사르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파 인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키케로를 완벽하게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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