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0 18:35:42

프리아사

파일:Friaça.jpg
이름 아우비누 프리아사 카르도주
(Albino Friaça Cardoso)
생년월일 1924년 10월 20일
사망년월일 2009년 1월 12일 (향년 84세)
국적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출신지 브라질 제1공화국 포르시운쿨라
포지션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신체조건 178cm | 75kg
소속팀 CR 바스쿠 다 가마 (1943-1949)
상파울루 FC (1949-1951)
CR 바스쿠 다 가마 (1951-1954)
AA 폰치 프레타 (1953-1954/ 임대)
AA 폰치 프레타 (1954-1957)
과라니 FC (1957-1959)
국가대표 12경기 1골 (1948-1952)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클럽5.2. 국가대표5.3. 개인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프리아사는 1943년, CR 바스쿠 다 가마의 눈에 띄어 바스쿠에 입단하게 되었다.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팀에서 자리를 잡게 된 프리아사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바스쿠 소속으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을 2회 차지했다.

1949년, 프리아사는 상파울루 FC로 이적했는데 이적 첫 시즌에 상파울루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끈 동시에 24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1951년에 프리아사는 바스쿠에 다시 돌아왔지만 1952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이후 갈수록 팀에서 프리아사의 비중은 줄어들어갔다. 1953년의 AA 폰치 프레타 임대를 시작으로 1954년에 프리아사는 바스쿠를 떠났고 1959년에 과라니 FC에서 은퇴했다.

2.1.2. 국가대표

프리아사는 1948년에 대표팀에 데뷔했지만 테조리냐의 존재로 인해 대표팀에서 핵심 자원은 아니었다. 194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도 프리아사의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테조리냐가 반월판 부상으로 1950년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자 프리아사가 주전으로 낙점되었다.

프리아사는 브라질이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친선 경기들에 한 경기를 제외하고 모두 출전했으며 월드컵 본선에서도 4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우루과이 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후반 2분, 선제골을 기록했고 그렇게 브라질의 첫 FIFA 월드컵 우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루과이는 포기하지 않고 2골을 넣어 브라질을 우승 문턱에서 끌어내리고 말았다.

프리아사는 1952년 팬아메리칸 챔피언십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 더 이상 소집되지 않았다.

2.2. 이후

프리아사는 은퇴 후 건축자재 상점을 소유했고 아들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었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의 아들 중 한명이 1990년대 중반에 행글라이더 사고로 사망하자 프리아사는 큰 충격을 받고 음주와 흡연에 빠졌다. 이는 그의 건강을 크게 해치는 원인이 되었다.

프리아사는 2009년,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프리아사는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외에도 모든 공격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고 특히 킥력과 스피드에서 강점을 보였다.

4. 뒷이야기

  • 사미르 소아레스의 회고에 의하면 프리아사는 손목시계 수집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항상 세계 어디에선가 구입한 시계를 바꿔서 차고 다녔고 왜 새로 산 시계를 바로 보여주지 않냐는 물음에는 한번에 하나씩 보여줘야한다고 답을 했다고 전해진다.
  • 프리아사는 자신의 고향으로 동료 축구 선수들을 종종 초대했다고 한다. 그중 특히 자이르 다호자와 친했다고 한다.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