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7:47:23

테조리냐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파일:Tesourinha.jp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테조리냐
Tesourinha
본명 오스마르 포르치스 바르셀루스
Osmar Fortes Barcellos
출생 1921년 12월 3일
브라질 합중 공화국 포르투알레그리
사망 1979년 6월 17일 (향년 57세)
브라질 연방 공화국 포르투알레그리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포지션 아웃사이드 포워드
신체조건 175cm / 64kg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SC 인테르나시오나우 (1939~1949)
CR 바스쿠 다 가마 (1949~1952)
그레미우 (1952~1954)
나시오나우 AC (1954~1957)
국가대표 23경기 10골 ( 브라질 / 1944~1950)

1. 개요2. 생애
2.1. 별명2.2. 선수 생활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선수
5.1.1. 클럽5.1.2. 국가대표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별명

테조리냐는 포르투갈어로 집게벌레라는 뜻이다. 그래서 포르투갈이나 브라질에서 테조리냐는 집게벌레나 제비꼬리타이런트새등 꼬리가 갈라진 모양의 동물의 이름에 많이 쓰인다. 그러나 그의 별명은 자신이 참가했던 카니발 그룹의 이름이었던 우스 테조라스(Os Tesouras)에서 온 것이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테조리냐는 포르투알레그리의 아마추어 클럽에서 축구를 하다가 SC 인테르나시오나우의 초대를 받아 입단 테스트를 보고 합격했다. 입단 당시 깡마른 체구였던 테조리냐를 본 구단은 그의 체구를 불리기 위해 경기장 근처에서 빵집을 골라 빵과 우유를 공급해줬다.

1939년 10월 23일, 테조리냐는 인테르나시오나우의 선수로 첫 선을 보였고, 카를리투스와의 경쟁 끝에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10년간 동행했다. 그 기간에 인테르나시오나우는 캄페오나투 가우슈에서 8회 우승을 차지하며 히우그란지두술주의 강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테조리냐는 1949년, CR 바스쿠 다 가마로 이적하면서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적응을 마쳤지만 반월판 부상으로 한동안 경기를 뛸 수 없었다. 그는 3년간 바스쿠에 있으면서 48경기 출전 22골의 기록을 남겼다.

1952년, 그레미우에 새 둥지를 튼 테조리냐는 당해 3월 16일의 데뷔전에서 2골을 넣었다. 반월판 부상 이후 테조리냐의 기량은 하락세를 탔고 1957년에 나시오나우에서 은퇴했다.

2.2.2. 국가대표

1944년, 테조리냐는 당시 브라질의 감독 플라비우 코스타의 부름을 받고 처음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그의 국가대표팀 데뷔전 상대는 우루과이였는데 이 친선 경기에서 브라질은 우루과이를 상대로 6대1 대승을 거뒀다. 테조리냐도 선제골을 넣으며 브라질의 대승에 힘을 보탰다.

테조리냐는 1945년 칠레에서 개최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처음 메이저 국가 대항전에 참가했고 6경기에 출전, 1골 3도움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 이어 준우승의 성적을 거뒀다.

브라질은 1946년 대회에서 다시 아르헨티나에 가로막혀 준우승에 그쳤고 1949년 자국 대회에서 결국 우승에 성공했다. 테조리냐는 7골 2도움으로 9골을 넣은 자이르 다호자에 이어 대회 득점 공동 2위에 올랐다.

테조리냐는 1949년 대회 우승 이후 1950년의 자국 월드컵 출전을 준비했지만 반월판 부상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브라질은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테조리냐의 공백에 아쉬움을 삼켜야만 했다.
195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에는 지지뉴, 아데미르, 자이르 등 훌륭한 공격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1945년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의 브라질 대표팀 공격진에는 이 3명의 선수에 엘레누와 테조리냐도 있어서 공격진에 결점이 없었다.
마리우 필류(Mario Filho)[2]

테조리냐의 대표팀 은퇴 이후 줄리뉴 보텔류의 등장 전까지 브라질 대표팀 역시 그를 대체할 선수를 찾지 못했다.

2.3. 이후

테조리냐는 1979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드리블 기술이 뛰어난 아웃사이드 포워드로 현역 시절에는 당대 브라질 축구계 최고급 드리블러였고 SC 인테르나시오나우의 역사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는 오른발잡이임에도 양쪽 사이드에서 모두 플레이할 수 있었고 빠르면서도 프리킥과 헤더에 능했다. 득점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인테르나시오나우 시절에는 10년간의 149경기에서 178골을 넣었고 상술했듯 194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도 7골을 넣어 전체 득점 2위를 기록했다.
테조리냐는 수비수들을 벗겨낸 후 골문을 향하는 방식으로 드리블했다.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났고 항상 존재하는 이 라인은 필라 테조리냐(Fila Tesourinha)라 불렸다.
만셰테 이스포르치바(Manchete Esportiva)
테조리냐는 우리로 하여금 이전과 이후에 나타난 (모든 시대의)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그는 프로 시대는 물론, 모든 시대의 위대한 스타이다. 1941년부터 1948년까지 캄페오나투 가우슈에는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 있었다.
시드 피녜이루 카브라우(Cid Pinheiro Cabral)

4. 뒷이야기

  • 테조리냐가 브라질 대표팀 선수로 뛸 당시, 그는 유일하게 브라질 축구계의 양대 산맥인 히우 상파울루 리그 소속이 아닌 선수였다.
  • 테조리냐가 그레미우에 입단했을 때 한동안 클럽 최초의 흑인 선수라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사실은 1912년에 입단한 아르만두 루이즈 안투니스(Armando Luiz Antunes)가 그레미우 최초의 흑인 선수였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1.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브라질의 언론인. 브라질을 대표하는 축구장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 이 사람의 이름이 헌정되어 있다. 마라카낭 경기장의 원래 이름은 이스타지우 조르날리스타 마리우 필류(Estadio Journalista Mario Filho)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