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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9E6FF><colcolor=#000> 밀라노 공국 제4대 공작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 Francesco I Sforz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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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Francesco Sforza) |
출생 | 1401년 7월 23일 |
피렌체 공화국 산미니아토 | |
사망 | 1466년 3월 8일 (향년 64세) |
밀라노 공국 밀라노 | |
재위 | 밀라노 공국의 공작 |
1450년 3월 25일 ~ 1466년 3월 8일 | |
배우자 | 폴리세나 루포 (1418년 결혼 / 1420년 사망) |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1] (1441년 결혼) | |
자녀 | 갈레아초 마리아, 이폴리타 마리아, 필리포 마리아, 스포르차 마리아, 프란체스코 갈레아초 마리아, 루도비코, 아스카니오 마리아, 엘리사베타 마리아, 오타비아노 마리아 |
아버지 | 무치오 아텐돌로 스포르차 |
어머니 | 루치아 다 토르사노 |
형제 | 엘리사, 알베리코, 안토니아, 레오네, 조반니, 그레고리오, 오르솔라 |
종교 | 가톨릭 |
[clearfix]
1. 개요
밀라노 공국의 제4대 공작.밀라노 공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용병대장의 아들로 태어나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등 돈만 준다면 온갖 세력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결국에는 북이탈리아를 좌지우지하는 밀라노 공작이라는 최고의 지위에까지 이른 입지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공작에 오른 이후에도 외교적, 경제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동맹'을 창설해 프랑스 같은 외부 세력들이 이탈리아에 개입하는 걸 차단했고, 당시 움터오르던 르네상스를 지원하며 밀라노를 문화적으로도 르네상스의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들었다. 조세 개혁을 통해 막대한 세수를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공공병원을 세우거나 강을 잇는 거대한 운하를 착공하는 등 인프라 확충에도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밀라노는 그 사후에도 몇십여년 가까이 전성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평가하면 여러모로 밀라노 최고의 군주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인물.
2. 생애
2.1. 용병 생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콘도티에로[2] '무치오 스포르차'와 루치아 다 토르사노 사이의 7명의 사생아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나폴리 왕국에 있는 바실리카타에서 보냈는데, 1412년에는 라디슬라오 왕으로부토 후작 작위를 부여받기도 했다. 1418년에는 칼라브리아의 귀족 가문 출신 규수였던 폴리세나 루포와 혼례식을 올렸다.18세가 되어 어느 정도 나이가 차자 용병대장인 아버지 무치오를 따라 곳곳의 전투에 참전하며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구리 주괴를 구부릴 정도로 힘이 강했던 프란체스코는 당연히 아버지의 촉망을 받는 인재로 성장했다. 게다가 야전 사령관 능력도 압도적으로 뛰어난 명장이었기에 무력 + 지략이라는 군사적 천재로 주목받았던 것이다. 아버지 무치오가 전투 도중 전사한 이후부터는 나폴리 왕국을 위해서, 나중에는 교황 마르티노 5세, 결국에는 밀라노 공국의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를 위해 싸우는 등 편을 가르지 않고 돈을 많이 주는 편으로 끊임없이 옮겨가면서 용병 생활을 계속했다. 비스콘티 가문 아래에서 좀 잘나가나 싶었던 프란체스코는 정치 싸움에 휘말려 모르타라 성에 수감되었다가, 루카와의 전투에서 공적을 세우면서 겨우 풀려났다.
젊은 시절의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
1431년에는 교황령을 도와 전투에 참전했고, 그 이후부터는 쭉 밀라노 군대를 이끌어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이듬해에 밀라노 공작의 딸인 비앙카 마리아와 약혼까지 했지만... 워낙에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공작이 남을 안믿는 변덕스러운 성격이라 공작의 의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필리포 마리아가 딱히 이상한건 아닌게 당시 이탈리아에서 용병은 돈만 주면 얼마든지 편을 갈아낄 수 있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고, 용병을 완벽히 신용한다는건 딱히 권장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필리포 마리아의 의심은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1433년부터 2년 동안 교황령에 맞서 밀라노군을 이끌었지만 어느 시점에 갑자기 편을 바꾸어 교황 에우제니오 4세로부터 도시 대리의 칭호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1436년부터 3년 동안은 아예 밀라노의 적국이던 남쪽의 피렌체 공화국과 동쪽의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해 싸웠다.
대놓고 적국인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위해 싸웠으니 필리포 마리아의 눈에 프란체스코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가 어쩔 수 없이 필리포 마리아 아래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니 바로 알리폰소 5세가 나폴리에 있는 프란체스코의 영지를 강제로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영지를 되찾기 위해 필리포 마리아와 화해했고, 결국 미루고 미뤄왔던 필리포의 딸 비앙카 마리아와 정식으로 결혼식까지 올렸다.[3] 그렇게 필리포 마리아와 화해한 프란체스코는 나폴리의 왕위 요구자인 앙주의 르네와 연합을 맺었다. 프란체스코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로 진군했으며, 그의 영지를 점유하고 있었던 니콜로 피치치노 휘하의 군대를 작살낸 다음 밀라노로 귀환했다.[4]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란체스코는 니콜로 피치치노의 양자 프란체스코 피치치노와, 그 이후에는 아내 폴리세나를 죽인 비스콘티 가문, 에우제니오 4세, 말라테스타 연합군과 전쟁을 치렀다. 프란체스코는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연합군을 깨부쉈지만 이후 베네치아에게서 돌아서는 대가로 밀라노 군대 총사령관직을 받고 다시 편을 바꿨다.
2.2. 밀라노 공작
1447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남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비스콘티 공작가의 혈통이 끊어져버리자 밀라노는 당연히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는데, 이때 잠시 공작위가 폐지되고 '암브로시아 공화국'이 들어섰다.[5] 암브로시아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밀라노가 한참 혼란스러울 무렵, 프란체스코는 파비아 일대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때 그의 장모, 즉 필리포 마리아의 아내였던 아그네세 델 마이노가 프란체스코에게 공작위를 복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원래 밀라노 공작위에 야심이 있었던 프란체스코는 장모의 지원에 힘입어 슬슬 밀라노 공략에 들어갔다. 그는 로디 지방을 포함해 여러 인근 도시들의 시뇨리아직을 맡았고,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구난방이던 암브로시아 공화국을 대상으로 탐색전을 벌였다. 그는 베네치아와 인근 국가들과도 동맹을 맺으며 사실상 차기 밀라노의 지배자로 입지를 굳혔다. 그러던 중 밀라노에 기근이 들어 공화정에 대한 시민들의 회의가 커지자, 결국 의회가 스스로 공화정을 폐지하고 공국을 복구하기로 결정한 후, 프란체스코를 새로운 공작으로 삼기로 결의했다. 이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1450년 2월 26일에 밀라노에 입성했다.[6] 그는 3월 25일 즉위식을 치르고 밀라노 공작이 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의 세력이 프란체스코를 밀라노 공작으로 인정했다.[7]
밀라노의 전경
이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거치고 밀라노 공작위까지 차지한 프란체스코는 확실히 명군이었다. 조세 개혁을 통해 이전과 비교가 안되는 수준의 막대한 세수를 벌어들였고, 밀라노는 그 막대한 부에 힘입어 당시 한창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있었던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나라가 부유해졌으니 밀라노 시민들은 당연히 그를 사랑했다. 엄청난 인기를 등에 업은 프란체스코는 1456년 밀라노에 거대한 병원을 개원하는가 하면 예전에 소실되었던 궁전을 복구하고, 아다 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운하를 착공했다.
밀라노가 프란체스코 아래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무렵, 또다른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피렌체는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두 명의 유능한 지도자들이 동시에 밀라노 공국과 피렌체 공화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프란체스코와 코시모 데 메디치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여서 처음에는 '로디 조약'을 통해 평화협정을, 두 번째로는 '이탈리아 동맹'을 창설해 베네치아-피렌체-밀라노 3국 간의 평화관계를 구축했다. 이탈리아 동맹을 통해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킨 프란체스코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롬바르디아 동부 일대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포기했다. 게다가 악연이 있었던 알리폰소 5세도 이탈리아 동맹의 한 축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앙주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고 나폴리 왕국과 손을 잡았다.[8] 1464년에는 앙주 가문에 대해 완전히 척을 지고, 앙주가 다스리던 제노바와 사보나를 집어삼키기까지 했다.
참고로 앞서 이탈리아 동맹을 출범시키고, 분열된 이탈리아 세력들 간에 상호연대체제를 구축한 것만 봐도 프란체스코는 외교적으로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유럽 전체를 무대로 외교를 펼쳤던 몇 안되는 이탈리아인 군주였다. 워낙에 프란체스코가 균형을 잘 맞춰놨던 덕에 이탈리아 반도는 1400년대 내내 프랑스 왕국이나 신성 로마 제국 등의 간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잉글랜드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 역시 프란체스코와 친해지고 싶어했고, 그에게 가터 훈장을 1463년에 수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겼던 프란체스코는 말년에 수족증과 통풍으로 고생했다[9]. 1462년에는 그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밀라노 시내에 나돌며 폭동이 일어났지만 정작 프란체스코는 멀쩡히 살아있었다고. 그는 무려 4년을 더 살아서 1466년 3월에야 사망했고, 그의 아들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훗날 밀라노 공작위를 이은 프란체스코의 아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프란체스코의 무덤을 꾸밀 말 동상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다. 다 빈치는 1492년, 설계에 이용할 말 점토 모형을 완성했지만 실제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1999년에야 다 빈치의 설계도 그대로 청동 조각상을 만들어 밀라노의 '이포드로모 델 갈라포' 경마장 밖에 전시해놨다고 한다.
[1]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딸이다.
[2]
중근세 이탈리아의 다국적 용병대장.
[3]
참고로 이는 베네치아와 밀라노 사이의 휴전 조건들 중 하나였다. 밀라노는 더이상 껄끄러운 프란체스코를 적으로 삼고 싶어했지 않아했기에 어떻게든 베네치아 쪽에서 빼내오기 위해 이 조건을 걸었고, 프란체스코 역시 마침 나폴리의 영지가 강제 점령당한 터라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4]
여담이지만 이때 베네치아인들과 아내 폴리세나가 속해 있었던 처가의 도움을 꽤 받았다.
[5]
'암브로시아'라는 이름은 밀라노의 수호성인이자 추앙받는 초기 교회시대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에서 따왔다.
[6]
시민들이 뽑은 의회가 스스로 공작을 복위시키기로 결정한 사례는 이때까지 프란체스코가 유일했다.
[7]
다만 용병 출신이었던 그를 아니꼽게 보던
신성 로마 제국은 예외여서 그가 죽은 이후인 1494년에야 스포르차 가문을 밀라노 공작 가문으로 인정했다.
[8]
앙주 가문은 꾸준하게 알리폰소 5세가 불법이라 여기며 나폴리의 왕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9]
이 양반의 식습관이 좀 특이해서
채소를 싫어하고, 구운 고기만 잔뜩 먹었기 때문에 몸에 요산이 잔뜩 쌓여 통풍에 걸렸다. 사실 이렇게 고기만 잔뜩
폭식하는 식습관은 당시 이탈리아의 상류층들한테 흔했는데, 이탈리아 최대의 대부호인
메디치 가문의 당주들도 그런 식으로 고기만 잔뜩
폭식을 하다가 통풍에 걸려 고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