表箋問題
1. 개요
조선 초기 명나라가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의 글귀를 문제삼아 일어난 사건.2. 전개
1395년 11월에 조선 조정에서는 예문춘추관 태학사 정총을 명나라에 보내 국왕의 고명과 인장을 청하는 글을 보냈으며, 1396년 2월에 조선에서 정총, 김약항을 사신으로 보냈고, 하정사 김을진이 돌아오면서 명나라에서 조선이 보낸 표전문이 경박하고 희롱하며 업신여기는 문구가 있다며 지적한 사실을 알렸다.3월에 명나라에서는 인신과 고명을 줄 수 없다며 표전문의 작성자를 보내라면서 계품사로 간 정총을 명나라에서 억류했으며, 4월에 표문을 가져온 관원의 가족들을 보내지 않으면 관원들을 금치(金齒)로 유배보내겠다고 했다.
6월에 명나라에서 우우, 왕예, 송패라, 양첩목아 등을 보내 조선에서 보낸 표문과 전문에 경박하고 모멸하는 구절이 있다고 해서 조선에서는 단지 전문을 지은 자만 보냈으니, 표문을 지은 정도전과 정탁 등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조선에서 표전문을 지은 권근, 정탁과 교정을 한 노인도를 보내면서 하륜을 계품사로 보내 표전 작성에 대해 보고하도록 해서 경전과 역사서에 밝지 못하고, 다른 나라 말이라 언어와 음이 다르며, 표전문의 체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하면서 정도전이 표문 작성에 참여하지 않은데다가 병중이라 갈 수 없다고 했다.
하륜, 정탁이 귀국했고 정총, 권근, 김약항, 노인도 등은 억류되었고, 1397년에 권근, 안익, 김희선은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명나라에서는 정도전을 다시 보낼 것을 요구했고, 8월에 광주목사 유호가 천추사로 파견되었다.
이 때의 문구가 문제되어 이 때의 글에 참여한 공부, 윤규, 윤수를 보내라고 했으며, 11월에 정총, 김약항, 노인도 등이 명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조선으로 전달되었다. 요동으로 압송된 공부, 윤규, 윤수 등은 가던 도중인 1398년에 홍무제가 사망하면서 사면령으로 풀려나 조선으로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