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펠레/국가대표 경력 ||<-5><tablewidth=100%><table bordercolor=#facf4d><tablebgcolor=#ffffff><bgcolor=#facf4d>
펠레의 국가대표 경력 ||
1968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 ▶ |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 ▶ | 은퇴 |
펠레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
|
|
|
소속팀 | 브라질 ( CONMEBOL) |
등번호 | 10 |
기록 | |
6경기 6득점 3도움 |
|
6경기 4득점 6도움 |
|
합산 성적 | |
12경기 10득점 9도움 |
[clearfix]
1. 개요
펠레는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이후 7번의 A매치에 참가했으며 그 중 1968년 11월 3일 벨루오리존치에서 열린 멕시코와의 경기는 펠레의 63번째 A매치였는데, 이 경기에서 펠레는 자신의 A매치 60번째 골을 넣었다. 1968년 11월 6일 FIFA XI[1]와의 대결에도 참여하였다. 이 기간동안 총 3골을 기록했다. 1965년까지 경기당 1골쯤은 여유롭게 넘어줬던 펠레였으므로 이런 득점 페이스는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점점 줄어들어 가는 득점능력과 반대로, 펠레의 플레이 메이킹 능력은 날이 갈수록 더욱 발전하고 있었다.지금 돌아보면 매우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197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매우 많았다. 첫 번째 이유는 전 대회인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의 광탈.[2] 두 번째 이유는 선수단 구성 문제였다. 감독 자갈루가 뽑아놓은 베스트 11을 보면 펠레를 포함하여 토스탕, 호베르투 히벨리누, 제르송 등 무려 4명이 소위 말하는 10번 유형의 플레이메이커였다. '이들을 모두 함께 공존시키는 것이 힘들 텐데, 어찌 좋은 성적을 기대하겠느냐?'가 이 의견의 핵심이었다.
여튼 이 대회는 월드컵 역사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대회였다. 기존의 흑백 중계를 탈피해 전 세계의 거리와 안방에 생생한 컬러 중계를 전달하는 첫 대회였기 때문이다.
1.1. 남미 예선
우선 놀라운 사실 하나. 펠레는 지금까지 월드컵에 세 차례 출전하면서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단 한 번도 뛴 적이 없었다. 1958년 월드컵 남미 예선 때에는 유망주 티를 못 벗은 탓에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1962년 월드컵과 1966년 월드컵에서는 남미 예선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3] 펠레의 위엄이 엿보이는 부분이다.펠레에게 있어서 월드컵 지역 예선이라는 대회는 특이한 느낌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펠레는 시종일관 변함없는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브라질은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콜롬비아라는 만만찮은 팀과 같은 조에 속해 각 팀당 두 경기씩 총 여섯 번의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특히 이 당시에는 파라과이가 난적이었다. 사투리노 아루아라는, 파라과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간주되는 선수가 있었고 아루아 이외의 선수진 자체도 상당히 괜찮았다. 1966년 월드컵에서의 실패 때문에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조금 있었다. 여튼 지역예선이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2파전으로 갈 것은 분명했다. 당시 월드컵은 16개팀만 진출할 수 있는 꿈의 무대였기 때문에, 네 팀 중 오직 한 팀만이 월드컵에 나갈 수 있었다. 즉, 펠레가 자신의 네 번째 월드컵을 뛰려면 브라질을 무조건 남미 예선 1위로 만들어 놓아야 했다.
브라질의 첫 번째 경기 상대는 콜롬비아였다. 이 경기는 보고타에서 열렸다. 콜롬비아 홈 관중들은 1966년의 실패를 겪은 브라질 대표팀이 한 번 더 져 주기를 바랐지만, 토스탕이 전반 막판에 혼자 두 골을 넣어버리며 콜롬비아를 침묵시켰다. 2-0 승리였다.
두 번째 경기 상대는 베네수엘라였다. 카라카스에서 열린 원정 경기였다. '부왕' 토스탕이 경기 60분에 한 골을 터뜨렸고, 펠레가 11분 후 골을 터뜨렸다. 토스탕은 펠레의 골에 대답하듯이 1분 만에 한 골을 추가했다. 그리고 2분 후에 한 골을 더 넣으며 해트트릭을 작렬했다. 펠레도 지지 않고 1분 만에 한 골을 추가하며 멀티골을 작렬했다. 5-0 승리였다.
네 번째 경기는 다시 콜롬비아와의 경기였다. 각 팀과의 2차전은 모두 '성지' 마라카낭에서 열렸다. 먼저 토스탕이 15분만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엔 콜롬비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3분 만에 동점골을 터뜨렸다. 브라질은 다소 당황했다. 그래서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후반전 시작 3분 만에 에두가 골을 추가하며 브라질이 앞서기 시작했다. 12분 후, 펠레는 감각적인 득점을 올리며 점수를 3-1로 만들어 차이를 벌려놓았다. 콜롬비아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경기 86분과 88분, 자이르지뉴와 히벨리누가 각 한 골씩을 터뜨리며 6-1이 되었다. 브라질의 긴장이 풀리며 수비가 느슨해졌고, 콜롬비아의 호르헤 가예고가 1분만에 이 틈을 파고들어 만회골을 기록했다. 최종 스코어 6-2. 또 압도적인 승리였다.
1969년 8월 24일에 열린 베네수엘라와의 2차전. 베네수엘라는 이미 탈락이 확정된 상태였고 선수들의 의욕은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브라질이 봐 줄 리는 없었다. 자비 없는 선수였던 펠레와 토스탕은 전방에서 엄청난 콤비플레이를 펼쳤다. 토스탕은 7분 만에 펠레의 어시스트를 받아 골을 넣었다. 전반 21분, 토스탕은 슈팅을 놓친 골키퍼에게 다가가 간단하게 추가 득점을 뽑아냈다. 3분 후, 제르송의 패스가 토스탕에게 전달되었고 토스탕은 두 명을 간단히 제치며 오른발로 살며시 밀어넣어 득점을 기록했다. 전반 24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이었다. 베네수엘라 선수 중 아무도 토스탕의 상대가 안 되었다. 경기 30분, 자이르지뉴가 골문 앞에서 에두의 크로스를 대기하다가 골키퍼에게 차단되어 튀어나온 공을 오른발로 강력하게 마무리지으며 브라질의 4번째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14분 후 펠레는 토스탕을 향해 천재적인 로빙 패스를 제공했다. 베네수엘라는 토스탕을 막고자 했으나 파울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연히 페널티킥이 선언되었고, PK 전담 키커였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공격수 중 맏형인 펠레에게 PK 찬스를 주었다. 펠레는 왼쪽으로 간결하게 슈팅을 날렸다. 골. 전반이 끝나기 전, 스코어 5-0이 되었다.
|
엄청난 침투 이후 감각적인 득점으로 스코어 6-0을 만들어내는 펠레 |
브라질은 5전 전승으로 승점 10점을 쌓았다. 그러나 월드컵 진출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승점 8점을 기록한 파라과이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파라과이가 9-0으로 승리를 거둔다면(?) 득실차에서 브라질을 역전하게 되고 브라질의 월드컵 진출이 좌절되는 상황이었다.
|
파라과이전 직전의 브라질 대표팀 |
|
남미 예선 6전 전승을 확정짓는 펠레 |
남미 예선 6경기에서 브라질은 6전 전승, 23득점 2실점의 성적을 거두었다.
1969년의 남미 예선이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을 보면 74경기 68골[6]이다.
브라질은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함께
1.2. 조별 리그(16강)
첫 경기의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보 빅토르, 라디슬라프 쿠나 등 명선수들을 보유한 데다가 월드컵 결승전에 두 번이나 진출한 기록이 있는 월드컵 전통 강호였다. 펠레도 1962년 월드컵에서 이들과 맞붙어 본 적이 있었으므로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브라질 수비진은 라디슬라프 페트라쉬에게 농락당하며 경기 11분만에 선제골을 내주었다. 펠레는 환상적인 두 차례의 더미 플레이로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을 완전히 속여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기 23분, 드리블로 공간를 만들어 내다가 상대 수비진의 반칙에 막혀 넘어졌다. 이 상황에서 주어진 프리킥을 히벨리누가 차 넣었고 펠레의 어시스트로 기록되었다.[7] 스코어는 동점이 되었고 브라질 팀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펠레 vs 체코슬로바키아[8] |
|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슈팅을 시도하는 펠레 |
다음 상대는 잉글랜드. 캡틴 바비 무어가 이끄는 잉글랜드는 1966년 월드컵 때부터 엄청난 수비력으로 명성을 떨쳤던 팀이다. 1966년 월드컵에서는 442분 연속 무실점 기록을 달성했고 최종 6경기 3실점을 기록하며 우승했다. 또 유로 1968 본선에도 진출하여 2경기 1실점만을 기록한 바 있었다. 제르송은 결장했고 대신 '카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파울루 세자르가 출전하였다.
경기는 예상대로 막상막하였다. 잉글랜드는 난공불락의 수비를 자랑했다. 그래도 찬스는 어떻게든 브라질을 찾아왔다. 경기 9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침투하는 자이르지뉴를 향해 완벽한 스루패스를 넣어 주었다. 자이르지뉴는 길게 툭 치고나가며 테리 쿠퍼를 제치고 중앙에 있는 펠레를 향해 높은 크로스를 올렸다. 바비 무어가 자이르지뉴 쪽으로 간 상태였고, 펠레는 엄청난 점프력으로 튀어오른 뒤 공을 정확하게 이마에 맞혔다. 공은 골대의 사각지대로 향했다. 펠레는 두 팔을 들어 환호했다. 그런데...
|
The Greatest Save Ever |
"What a fantastic save by Banks!! What a fantastic save by Gordon Banks...!"
휴 존스, ITV 해설위원
고든 뱅크스가 말도 안 되는 선방으로 이 슈팅을 막아냈다. 펠레는 골이 들어간 줄 알고 셀레브레이션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펠레는 골대 안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었다.휴 존스, ITV 해설위원
절호의 찬스였지만 득점하지 못한 브라질. 이 장면 이후의 전반전 동안 잉글랜드 주장 무어는 펠레, 토스탕, 자이르지뉴, 히벨리누의 4명의 왕을 싹 다 막아버리며 축구에서 '수비'란 무엇인지를 세계 전역에 보여주었다. 전설적인 활약이었다. 그리고 바비 찰튼 또한 몇 차례의 환상적인 드리블과 패스를 보여주며 브라질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역시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는 브라질이 그동안 상대했던 팀들과는 클래스가 다른 팀이었다.
|
펠레의 지능적인 어시스트 |
이 득점 이후 바비 무어가 브라질 공격진을 거의 다 막아냈고 골대로 향한 몇몇 슈팅들은 고든 뱅크스가 모조리 막아냈기 때문에 펠레 역시 이렇다 할 찬스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잉글랜드는 찬스를 굉장히 많이 잡았지만 앨런 볼과 프랜시스 리가 거의 다 날려먹었다. 결국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고, 1-0으로 브라질이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 종료 이후 펠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라질을 가장 고전하게 만든 잉글랜드의 캡틴 바비 무어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펠레가 먼저 무어에게 찾아가 인사를 건넸고 둘은 서로 포옹을 나누고 유니폼을 교환했다.
|
영웅들의 유니폼 교환[11] |
다음 경기인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도 제르송이 결장했고, 이번에는 히벨리누까지 결장했다. 대신 나온 선수는 센터백 주제 폰타나, 그리고 저번 경기에도 나왔던 파울루 세자르였다. 이번 경기에서는 센터백으로 기용되던 피아자가 본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기용되었고, 따라서 4-2-4 포메이션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전반 19분, 루마니아 수비수들은 펠레의 돌파를 막기 위해 무리하게 드러누워서 태클을 시도했다. 이 태클은 그저 의미없는 저지 시도였다. 펠레는 넘어지지도 않았다. 주심은 파울을 선언했고 그 위치에서 프리킥을 차게 된다. 토스탕과 펠레가 킥을 하기 위해 섰다. 브라질은 약속된 플레이를 했다. 펠레는 자이르지뉴가 서 있던 위치를 향해 오른발 바깥쪽으로 강하게 감아 찼고, 자이르지뉴는 펠레의 킥 직전에 바닥에 드러누웠다. 공은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휘어들어갔다. 아름다운 프리킥 득점이었다.
|
브라질 vs 루마니아 |
에메리크 뎀브로브스키가 경기 종료 6분 전 헤더 슈팅으로 만회골을 터뜨렸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브라질은 조별 리그 3전 3승 8득점 3실점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조별 예선 3경기 동안 펠레는 3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3. 결선 토너먼트
1.3.1. 8강전
8강의 상대는 페루. 페루는 D조에서 주장 엑토르 춤피타스, 1949년생의 신예 테오필로 쿠비야스, 우고 소틸 등을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8강에 올라온 강팀이었다. 특히 조별리그 1차전에서는 불가리아 상대로 2-0으로 지고 있는데, 금세 경기를 역전시킨 바 있다. 그런 페루의 감독은 다름아닌 지지였다. 당연히 지지는 누구보다 브라질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브라질은 강했지만, 돌풍의 팀 페루를 상대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중원 사령관 제르송이 복귀한 것은 희소식이었다.제르송은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패스를 뿌렸다. 패스를 받은 선수는 다름아닌 펠레였다. 펠레는 침착하게 공을 트래핑한 후 오른발로 간결하게 마무리를 시도했다. 하지만 공은 골대에 맞고 튀어나왔다. 펠레는 골대에 맞고 튀어나온 공에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어 백힐 패스를 통해 찬스메이킹을 시도했다. 이 백힐 패스는 토스탕에게 향했다. 하지만 토스탕이 대놓고 홈런을 날려버리며 펠레의 어시스트가 날아갔다. 경기 11분, 펠레는 페널티 박스 오른쪽에서 중앙의 토스탕을 향해 다소 부정확한 왼발 크로스를 날렸다. 하지만 라이트백 엘로이 캄포스가 이것을 가슴으로 차단한다는 것이 토스탕에게 흐르게 되었다. 토스탕은 페널티 박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히벨리누 앞 공간으로 살며시 공을 굴려 주었고, 히벨리누는 전매특허인 왼발 슈팅으로 골대 구석을 향해 정확한 슈팅을 때렸다. 공은 골대에 맞고 데굴데굴 굴러 들어갔다. 1-0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페루는 무섭게 반격하면서 1:1찬스를 만들어냈지만, 펠릭스가 쿠비야스의 슈팅을 완벽하게 저지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토스탕과 히벨리누는 경기 15분 코너킥 상황에서의 좋은 콤비플레이로 한 골을 추가했다. 이번엔 히벨리누의 어시스트, 토스탕의 골이었다.
|
펠레 vs 페루[12] |
|
페루전에서 플레이를 펼치는 펠레 |
1.3.2. 4강전
다음 상대는 우루과이. 펠레는 이 경기를 가장 고대해왔다고 술회한다. 그 이유는 마라카나주를 자신들의 손으로 되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루과이는 만만찮은 상대였다. 핵심 중의 핵심인 페드로 로차가 조별 리그 1차전 이후 부상으로 빠져서 공격작업에는 문제가 좀 있었지만, 아틸리오 안체타와 루이스 우비냐가 버티는 수비진은 든든했다. 거기에 그 뒤에는 당시 고든 뱅크스와 함께 세계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가 있었다. 우루과이는 그 덕에 조별 리그부터 8강전까지 4경기를 치르며 단 1개의 실점밖에 기록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놀라운 수비력이었다. 펠레는 1950년의 복수를 위해서 마수르키에비치를 꼭 뚫어내야 했다.하지만 브라질은 시작부터 분위기를 망쳤다. 골키퍼 펠릭스가 루이스 쿠비야의 크로스성 슈팅을 그냥 골대로 흘려보내는 대형사고를 쳤고 이것이 바로 골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1950년의 참사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순간이었다. 브라질에게는 영웅이 필요했다.
|
클로두아우두와 함께 기뻐하는 펠레 |
사기가 오른 브라질. 펠레 역시 덩달아 사기가 올랐다. 펠레는 엄청난 드리블을 보여주었다. 클로두아우두가 쓰러지면서 간신히 건네 준 패스를 하프라인에서 받았고, 40m정도를 순식간에 치고 나갔다. 우루과이 선수 다섯 명이 함께 쫓아왔고 두 명은 태클까지 걸었지만 펠레는 전부 뚫어냈다.
|
펠레의 엄청난 드리블 |
경기 75분, 자이르지뉴가 폰테스의 패스를 가로채고 펠레에게 공을 건네 주더니 기가 막힌 스피드로 일직선 침투를 시작했다. 펠레는 기막힌 연계로 공을 토스탕에게 전달해 주었다. 공은 센터서클을 막 지난 상태였고, 자이르지뉴는 어느새 라인을 부수고 있었다.
|
히어로 자이르지뉴 |
그리고 경기 끝나기 2분 전, 토스탕이 우비냐의 헤더를 가로채 펠레에게 연결했다. 펠레는 빈 공간으로 공을 툭툭 치며 달려나갔다. 그리고 뒤에서 달려오던 히벨리누를 확인하고는 오른발로 살며시 패스를 건넸다. 왼발의 달인 히벨리누는 가차없이 텔스타를 후려쳤다. 원자폭탄 키커의 슛은 그 명성대로 엄청난 파워를 자랑했고 마수르키에비치가 방어해보려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펠레의 어시스트를 통해 탄생한 브라질의 네 번째 골이었다.
패색이 짙어진 우루과이. 브라질은 20년 전 일에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가 느슨해지지 않았다. 자이르지뉴가 토스탕에게 공을 건네 주었고, 토스탕은 중앙으로 뛰어들어가는 펠레를 보았다. 토스탕의 왼발은 여느 때처럼 환상적인 패스를 뿌렸다. 그리고 펠레는 야수와 같은 스피드로 뛰어들어갔다.
|
위대한 노 골 |
이제 우리는 안다. 왜 사람들이 이 사람을 왕이라고 불러 왔는지, 그가 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알려져 있는지...[13]
제럴드 신스타트, ITV에서 1970년 월드컵 4강전을 해설한 해설자
펠레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더미 플레이를 선보였다. 펠레는 골을 넣지 못했지만, 경기장에 있던 관중들은 환상적인 트릭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1분 후 경기가 종료되었다. 경기가 종료되자마자 빨간 옷을 입은 한 팬이 경기장에 뛰어들어왔고, 펠레의 유니폼을 가져가려고 억지로 유니폼을 끌어당겼다. 펠레와 유니폼을 교환하려 했던 아틸리오 안체타는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갔다. 펠레는 그 광팬에게 유니폼을 벗어 주었으나 브라질 코치 중 한 명이 유니폼을 도로 빼앗아 펠레에게 돌려주었다. 흥미로운 장면이었다.제럴드 신스타트, ITV에서 1970년 월드컵 4강전을 해설한 해설자
이 경기 결과, 브라질은 8년 만에 다시 월드컵 결승에 진출했다. 4강전 두 경기는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서독과 이탈리아가 연장전에서 엄청난 혈투를 벌인 탓에 40분 정도가 지나서야 에스타디오 아스테카에서 열린 4강전의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서독을 4-3으로 이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브라질의 상대는 이탈리아로 정해졌다.
1.3.3. 결승전
이 경기는 여러 모로 의미가 깊은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가 만나는 대결인 동시에, 양 팀이 2번씩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였기 때문에 쥘리메 컵의 은퇴 경기이기도 했다.[14] 자친토 파케티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포스는 엄청났다. 공격진에는 로베르토 보닌세냐와 루이지 리바, 그리고 산드로 마촐라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수비진은 정말 화려했다. 주장 파케티, 센터백 로베르토 로사토, 피에르루이지 체라, 라이트백 타르치시오 부르그니치. 그리고 골키퍼 자리에는 디노 조프를 밀어내고 올라온 엔리코 알베르토시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이미 조별 리그 세 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하고 올라오며 그 수비력을 만천하에 증명한 바 있었다.브라질은 이에 맞서 최고의 정예 멤버들을 출전시켰다. 아래의 사진을 보자.
|
1970 FIFA 월드컵 결승전 브라질 라인업[15][16] |
루디 글뢰크네르 심판이 휘슬을 불었고, 보닌세냐가 첫 터치를 시작했다.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 경기가 시작된 지 2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루이지 리바가 별명처럼 번개 같은 슈팅으로 브라질의 골문을 위협했다. 아주 위협적인 슈팅이었고, 펠릭스가 이 공을 간신히 쳐내며 실점을 모면했다. 경기 3분만에 펠레는 첫 번째 백태클을 당했다. 태클을 건 선수는 마리오 베르티니였다. 하지만 주심은 프리킥 이외에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프리킥을 시도한 것은 히벨리누였다. 히벨리누는 미끄러지면서 넘어졌고, 공은 알베르토시가 처리하기 쉽게 날아왔다. 1분 후, 파케티가 자이르지뉴에게 파울을 범하면서 또 프리킥이 주어졌다. 펠레는 히벨리누와 함께 서서 킥을 준비했다. 펠레는 이번 프리킥에서도 킥을 하지 않고 지나갔고, 히벨리누가 찬 슈팅은 골대를 한참 넘어갔다. 브라질은 1분이 흐를 때마다 찬스를 하나씩 만들어냈다. 경기 6분에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오른쪽에서 펠레를 겨냥해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알베르토시가 중간에 공을 쳐내며 찬스가 또 무산되었다.
브라질의 찬스가 연이어 무산되자, 이탈리아가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경기 11분에는 리바가 찬스를 잡았다. 그러나 이번 슈팅은 별로 위협적이지 못했고, 펠릭스가 안정적으로 잘 막아냈다. 경기 15분에는 펠레가 발을 높이 들어 파울이 선언되었다. 이탈리아의 세리에 A는 예나 지금이나 리그 스타일이 수비적이어서 세트 피스에서 어떻게 하느냐가 승부를 결정짓는 주 요인이었다. 이 때문에 세리에 A 소속의 선수가 대부분인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역시 세트 피스를 중요하게 여겼고 또 아주 잘 처리했다. 킥 테이커는 마촐라였다. 그리고 킥은 리바를 향했다. 리바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엄청난 헤더 슈팅을 시도했다. 이 헤더는 아주 작은 차이로 골대를 넘어갔다. 펠레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기 17분, 토스탕은 이탈리아의 오른쪽 진영을 혼자 헤집고 중앙의 펠레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파케티가 어느새 중앙으로 넘어와 머리로 공을 처리했다. 브라질의 스로인이었다. 토스탕은 뛰어오던 히벨리누의 앞 공간을 향해 공을 던졌다. 그리고 히벨리누는 공중에 뜬 공을 중앙으로 넘겼다. 공의 목적지에는 펠레와 부르그니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동시에 점프했다.
|
펠레와 부르그니치의 경합 |
|
펠레의 헤더 골 |
|
"El Rey Pelé!" |
What a beautiful goal from Pelé!
El Rey Pelé!
휴 존스, ITV에서 1970년 월드컵 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
득점이었다. 부르그니치가 펠레를 저지하기 위해 손까지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펠레는 이 골을 득점함으로써 출전한 두 번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골을 넣은 두 번째 선수로 기록되었다.[17][18]휴 존스, ITV에서 1970년 월드컵 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
득점이 터진 후 양 팀은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경기 22분, 브리투가 리바의 압박을 신경쓰지 않고 제르송에게 패스하다가 그대로 인터셉트를 당하며 엄청난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펠릭스가 과감히 페널티 박스에서 뛰쳐나와 공을 걷어낸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
경기 25분 프리킥 상황에서 펠레와 히벨리누는 모두를 속이는 페이크 세트 피스를 시도했다. 하지만 습기를 머금은 잔디 때문에 히벨리누가 미끄러졌고, 결국 의도한 플레이를 하지 못하며 무위에 그쳤다. 1분 후, 펠레는 두 번째 백태클을 당했다. 이번 태클러는 펠레의 헤더 골을 막지 못했던 부르그니치였다. 뻔뻔한 태도를 보인 마리오 베르티니와는 달리, 부르그니치는 펠레에게 바로 사과했다. 그러나 태클 자체가 상당히 악질적인 태클이었고 펠레는 약 1분이 지나서야 경기장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펠레가 얻어낸 이 프리킥. 그러나 히벨리누는 또 무리하게 슈팅을 시도하다가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말았다. 물론 당시의 공은 지금과는 아주 달라서, 찼을 때 아주 멀리 나가거나 아예 날아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19] 보너스로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잔디 상태, 뻣뻣하기 짝이 없는 축구화까지 있었으니 당시의 프리킥 난이도는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이탈리아전에서 연이어 나온 실수로 히벨리누의 프리킥 실력을 깎아내려서는 안된다는 이야기.
전반전은 계속해서 이렇게 치고 받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경기 36분, 4강전의 영웅이었던 클로도아우두가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백힐 패스를 시도했는데, 곧바로 보닌세냐에게 인터셉트를 당했다. 순식간에 위기에 몰린 브라질. 여기에 보닌세냐를 막으러 온 브리투와 각을 좁히러 나온 펠릭스가 부딪히며 쓰러지며 완전한 오픈 찬스가 되었다. 그리고 보닌세냐가 빠르게 골대 안으로 공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1-1 동점이 되었다.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 브라질에게 프리킥 찬스가 왔다. 키커는 제르송이었다. 제르송은 펠레에게 긴 패스를 넘겼다.
펠레는 공을 받아 골망 안으로 밀어넣었다. 하지만 노 골이 선언되었다. 전반 종료 휘슬이 이미 울렸다는 이유에서였다. 주심은 너무 애매한 타이밍에 경기를 끊었다.
다시 시작된 후반전. 후반전이 시작한 지 1분만에 브라질은 초대형 찬스를 잡았다. 주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오른쪽에서 엄청난 스피드로 침투하며 이탈리아 수비진을 전부 뚫어버리는 빨랫줄 같은 땅볼 크로스를 날린 것이었다. 크로스는 침투하던 펠레에게 향했다.
|
기회를 놓친 펠레 |
3분 후, 이탈리아 진영에서 혼전 상황이 발생했다. 펠레는 공을 잡으려고 다가갔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부르그니치가 바이시클 킥으로 클리어링을 시도했다. 불필요하고 위험한 플레이였으므로 주심은 간접 프리킥을 선언했다. 골대와의 거리는 20m가 채 안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르송이 수비벽을 넘기지 못하며 득점에 실패했다. 이는 바로 이탈리아의 역습으로 이어졌고, 파케티가 엄청난 질주를 보여주며 순식간에 하프라인을 넘어왔다. 레프트백 에베라우두가 도멘기니의 슈팅을 잘 막아서며 실점 위기를 모면했다.
경기 57분에는 히벨리누가 펠레를 위해 프리킥을 양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펠레가 공을 골대 뒤의 관중석으로 쏘아올렸다. 1분 후 또 프리킥 찬스를 맞았고 히벨리누가 킥을 했다. 히벨리누가 주로 쓰는 발이 아닌 오른발 슈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슈팅은 골대를 강타했다.
이후 약 3분동안 브라질은 이탈리아 진영에 계속 머무르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슈팅을 때렸다. 이런 슈팅 퍼레이드는 66분에서야 끝이 나게 되었다. 미드필더 제르송이 파워풀한 왼발 중거리 슛으로 골문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분위기는 브라질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제르송의 골이 터지자 이탈리아의 플레이는 거칠어졌다. 대표적으로 이 장면이 이탈리아의 급박한 심정을 잘 말해준다.
|
거칠어지는 아주리 |
그로부터 2분 후, 제르송이 펠레를 향해 엄청난 롱패스를 날렸다. 펠레는 머리에 공을 살짝 맞혀 가운데로 침투하는 자이르지뉴 앞에 떨어뜨렸다. 자이르지뉴는 엉겁결에 다리에 공을 맞히고 말았다. 그런데 골키퍼 알베르토시가 강한 슈팅을 예상하고 미리 엎드리는 바람에 이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고, 공이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파케티는 이미 늦었다. 브라질의 세 번째 득점, 자이르지뉴의 전 경기 득점이 터졌다.
경기는 20분가량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전부는 '브라질 타임'이었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지며 부담을 덜어낸 히벨리누는 본인의 최고 장점인 다양한 개인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이탈리아를 괴롭게 만들었고 불안했던 브리투의 수비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자이르지뉴는 아예 파케티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토스탕은 한결같았다. 펠레는 12년 전에 스웨덴에서 그랬듯이, 그림을 그리듯 편하게 축구를 했다. 그 결과 브라질은 자신들이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냈다.
|
아름다운 팀 플레이로 만든 네 번째 골 |
|
골을 넣은 주장과 함께 기뻐하는 브라질 공격수들 |
상황이 절정으로 치달아 관중이 난입하기에 이르자, 주심은 그제서야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브라질의 4-1 승리였다. 펠레는 12년 전과 마찬가지로 결승전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브라질의 3점 차 대승을 이끌었다. 경기 종료 후 모든 방송국의 카메라와 경기장 사람들의 눈은 펠레를 향했다. 모두가 펠레를 다급하게 찾았다. 분명 역사에 기록될 날이었기 때문이다.
|
경기 종료 후 다급하게 펠레를 찾는 로사토 |
|
|
'축구 황제' 펠레 |
2. 평가
펠레는 대회 기간 동안 6경기에서 4골 6어시스트[23][24]를 기록했으며 단일 대회 최다 어시스트[25]와 전 경기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외국의 한 축구 팬이 옵타의 기준으로 세어본 결과 펠레의 결승전 스탯은 아래와 같았다.1 goal
2 assists
96% Passing Accuracy
4 Key Passes
6 Chances Created
2 Tackles
1 Dribbles
7 Fouls Won
출처
1970년 월드컵이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을 확인하면 87경기 75골이다.[26]
FIFA 월드컵 역대 득점 순위 |
|
골 수 | 선수명 (국적) |
16 | 미로슬라프 클로제 (독일) |
15 | 호나우두 (브라질) |
14 | 게르트 뮐러 (독일) |
13 |
리오넬 메시 (아르헨티나) 쥐스트 퐁텐 (프랑스) |
12 |
킬리안 음바페 (프랑스) 펠레 (브라질) |
11 |
위르겐 클린스만 (독일) 산도르 코츠시스 (헝가리) |
10 |
토마스 뮐러 (독일)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아르헨티나) 게리 리네커 (잉글랜드) 헬무트 란 (독일) 테오필로 쿠비야스 (페루) 그제고시 라토 (폴란드) |
[1]
레프 야신(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 46분 교체),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라디슬라프 노박, 46분 교체), 빌리 슐츠, 실비오 마르솔리니(로베르토 페르푸모, 46분), 프란츠 베켄바워, 볼프강 오베라트, 아만시오 아마로(슬라바 메트레벨리, 46), 라요스 쉬츠, 플로리안 얼베르트(페드로 로차, 46분), 드라간 자이치(야노스 파르카스, 46) [2] 대회 11위 [3]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는 디펜딩 챔피언에게 다음 월드컵 본선 자동 진출권이 주어졌다. [4] 1968년~1969년에 펼쳐진 1970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토스탕보다 많이 득점한 선수는 없었다. 토스탕의 짧은 스페셜 영상이라도 한 번 보면 느끼겠지만, 토스탕은 절대 스트라이커 유형의 선수가 아니며 플레이메이커 성향을 강하게 띠는 공격수였다. 따라서 이 6경기 10골 기록은 토스탕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기록이다. 게르트 뮐러가 6경기 동안 9골을 넣어 가장 근접한 기록을 세우기는 했다. [5] 무려 한꺼번에 7명을 교체했다 [6] 1968년 11월 6일에 진행된 FIFA 선발팀과의 경기 제외 시 [7] 프리킥 유도는 현재 축구계에선 어시스트로 인정하지 않는다. [8] 펠레의 하프라인 슈팅은 2분 35초, 골은 4분 15초, 어시스트는 5분 23초부터 나온다. [9] 현대 축구에서는 이렇게 골키퍼의 허를 찌르는 슈팅을 이따금씩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듣도보도 못한 플레이였다. [10] 앞서 말했든 지금 기준으로는 첫 어시스트다. [11] 참고로, 좌우 반전이 적용된 사진이다. 사진 우측의 사진사 유니폼에 있는 'Mexico 70'의 '0'이 왼쪽에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이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12] 펠레의 골대 강타는 5초부터, 펠레의 패스에서부터 시작된 브라질의 첫 번째 득점 장면은 37초, 또 다시 골대를 맞춘 장면은 2분 23초, 펠레의 어시스트는 3분 27초부터 나온다. [13] 해설: Now we know... that we have a thought it before 'Why they call this man the king, Why he is known of the greatest footballer in the world'... [14] 사실 줄리메컵을 처음 만들 때 3번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팀이 있다면 그 팀에게 쥘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도록 규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대회 4강팀이 모두 줄리메컵을 수상한 전적이 있었고 2번 우승했던 우루과이 역시 결승전에 진출해도 쥘리메컵은 은퇴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줄리메는 이 컵을 만들면서 한 팀이 3번 우승하려면 최소한 100년은 걸릴거라 예측 했었지만 이탈리아, 브라질이 너무 빠른 시기에 2연패를 한 것과 우루과이가 20년 만에 2회 우승을 이루었기 때문에 도입후 50년 만에 은퇴가 온것이다. 물론 그 예측이 완벽히 틀린 것도 아닌게 새로운 트로피가 시작된지 50년이 다 되었지만 현 월드컵 트로피도 3번 이상 가져간 나라는 독일, 아르헨티나 밖에 없으며 브라질, 이탈리아, 프랑스가 각각 2번 가져간게 다다. [15] 왼쪽부터 주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브리투, 제르송, 피아자, 에베라우두, 토스탕, 클루두아우두, 히벨리누, 펠레, 자이르지뉴, 펠릭스이다. [16] 골키퍼인 펠릭스 정도를 제외하면 스쿼드의 한명한명이 동 포지션 내 당대최고 평가를 받는 선수들이다! 괜히 역대최고의 팀이라 평가받는 것이 아닌 셈. [17] 이 기록은 바바, 펠레, 파울 브라이트너, 지네딘 지단, 킬리안 음바페만 가지고 있는 기록이다. [18] 이 득점은 브라질의 FIFA 월드컵 통산 100번째 골이였다. [19] 심지어 방수 기능도 없어서 습기가 많은 날이나 비가 오면 물을 머금어 볼링공 수준의 무게가 되기도 하였다. [20] 로사토는 이 유니폼을 경매에 올렸고, 이 유니폼은 2002년에 15만 7750파운드(3억 조금 안되는 가격)에 팔리며 역대 축구 유니폼 중 가장 비싼 유니폼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21] 그러나 얼마 못가서 쥘리메컵은 강도들에게 도난을 당했으며, 아직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22] 역대 월드컵에서 예선에서부터 전승을 거두고 우승한 팀은 현재까지 1970년의 브라질이 유일하다. 브라질의 통합 성적은 12전 12승, 42득점 9실점. 본선에서의 성적은 6전 6승, 19득점 6실점이다. 1970년 월드컵의 브라질 대표팀은 말 그대로 무적의 팀이었고, 결국 축구라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찬란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23] 출처 [24] 과거에는 슬로바키아 전의 프리킥 유도를 포함해 4골 7어시스트로 기록했었다. [25] 공동 2위는 각각 5어시스트를 기록한 1974년 로베르트 가도차, 1978년 피에르 리트바르스키, 1986년 디에고 마라도나, 1994년 토마스 헤슬러. [26] 1968년 FIFA 선발팀과의 경기 제외 시
레프 야신(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 46분 교체),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라디슬라프 노박, 46분 교체), 빌리 슐츠, 실비오 마르솔리니(로베르토 페르푸모, 46분), 프란츠 베켄바워, 볼프강 오베라트, 아만시오 아마로(슬라바 메트레벨리, 46), 라요스 쉬츠, 플로리안 얼베르트(페드로 로차, 46분), 드라간 자이치(야노스 파르카스, 46) [2] 대회 11위 [3]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는 디펜딩 챔피언에게 다음 월드컵 본선 자동 진출권이 주어졌다. [4] 1968년~1969년에 펼쳐진 1970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토스탕보다 많이 득점한 선수는 없었다. 토스탕의 짧은 스페셜 영상이라도 한 번 보면 느끼겠지만, 토스탕은 절대 스트라이커 유형의 선수가 아니며 플레이메이커 성향을 강하게 띠는 공격수였다. 따라서 이 6경기 10골 기록은 토스탕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기록이다. 게르트 뮐러가 6경기 동안 9골을 넣어 가장 근접한 기록을 세우기는 했다. [5] 무려 한꺼번에 7명을 교체했다 [6] 1968년 11월 6일에 진행된 FIFA 선발팀과의 경기 제외 시 [7] 프리킥 유도는 현재 축구계에선 어시스트로 인정하지 않는다. [8] 펠레의 하프라인 슈팅은 2분 35초, 골은 4분 15초, 어시스트는 5분 23초부터 나온다. [9] 현대 축구에서는 이렇게 골키퍼의 허를 찌르는 슈팅을 이따금씩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듣도보도 못한 플레이였다. [10] 앞서 말했든 지금 기준으로는 첫 어시스트다. [11] 참고로, 좌우 반전이 적용된 사진이다. 사진 우측의 사진사 유니폼에 있는 'Mexico 70'의 '0'이 왼쪽에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이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12] 펠레의 골대 강타는 5초부터, 펠레의 패스에서부터 시작된 브라질의 첫 번째 득점 장면은 37초, 또 다시 골대를 맞춘 장면은 2분 23초, 펠레의 어시스트는 3분 27초부터 나온다. [13] 해설: Now we know... that we have a thought it before 'Why they call this man the king, Why he is known of the greatest footballer in the world'... [14] 사실 줄리메컵을 처음 만들 때 3번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팀이 있다면 그 팀에게 쥘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도록 규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대회 4강팀이 모두 줄리메컵을 수상한 전적이 있었고 2번 우승했던 우루과이 역시 결승전에 진출해도 쥘리메컵은 은퇴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줄리메는 이 컵을 만들면서 한 팀이 3번 우승하려면 최소한 100년은 걸릴거라 예측 했었지만 이탈리아, 브라질이 너무 빠른 시기에 2연패를 한 것과 우루과이가 20년 만에 2회 우승을 이루었기 때문에 도입후 50년 만에 은퇴가 온것이다. 물론 그 예측이 완벽히 틀린 것도 아닌게 새로운 트로피가 시작된지 50년이 다 되었지만 현 월드컵 트로피도 3번 이상 가져간 나라는 독일, 아르헨티나 밖에 없으며 브라질, 이탈리아, 프랑스가 각각 2번 가져간게 다다. [15] 왼쪽부터 주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브리투, 제르송, 피아자, 에베라우두, 토스탕, 클루두아우두, 히벨리누, 펠레, 자이르지뉴, 펠릭스이다. [16] 골키퍼인 펠릭스 정도를 제외하면 스쿼드의 한명한명이 동 포지션 내 당대최고 평가를 받는 선수들이다! 괜히 역대최고의 팀이라 평가받는 것이 아닌 셈. [17] 이 기록은 바바, 펠레, 파울 브라이트너, 지네딘 지단, 킬리안 음바페만 가지고 있는 기록이다. [18] 이 득점은 브라질의 FIFA 월드컵 통산 100번째 골이였다. [19] 심지어 방수 기능도 없어서 습기가 많은 날이나 비가 오면 물을 머금어 볼링공 수준의 무게가 되기도 하였다. [20] 로사토는 이 유니폼을 경매에 올렸고, 이 유니폼은 2002년에 15만 7750파운드(3억 조금 안되는 가격)에 팔리며 역대 축구 유니폼 중 가장 비싼 유니폼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21] 그러나 얼마 못가서 쥘리메컵은 강도들에게 도난을 당했으며, 아직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22] 역대 월드컵에서 예선에서부터 전승을 거두고 우승한 팀은 현재까지 1970년의 브라질이 유일하다. 브라질의 통합 성적은 12전 12승, 42득점 9실점. 본선에서의 성적은 6전 6승, 19득점 6실점이다. 1970년 월드컵의 브라질 대표팀은 말 그대로 무적의 팀이었고, 결국 축구라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찬란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23] 출처 [24] 과거에는 슬로바키아 전의 프리킥 유도를 포함해 4골 7어시스트로 기록했었다. [25] 공동 2위는 각각 5어시스트를 기록한 1974년 로베르트 가도차, 1978년 피에르 리트바르스키, 1986년 디에고 마라도나, 1994년 토마스 헤슬러. [26] 1968년 FIFA 선발팀과의 경기 제외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