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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의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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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Pul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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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닉 뱅크스, 자비스 코커, 마크 웨버, 캔디다 도일, 스티브 맥키 | ||||
<colbgcolor=#000><colcolor=#fff>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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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 1978년 | |||
영국 셰필드 | ||||
데뷔 | 1983년 4월 13일 | |||
앨범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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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 |
자비스 코커 (보컬) 캔디다 도일 (키보드) 닉 뱅크스 (드럼) 마크 웨버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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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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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브릿팝, 아트 록, 인디 팝 | |||
링크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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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와 함께 90년대 영국 브릿팝을 대표하는 밴드. 브릿팝 하면 오아시스와 블러의 남북전쟁을 떠올리는 바람에 좀 묻힌 듯한 경향이 있지만, 엄연히 90년대 중반, 위 두 밴드와 더불어 영국에서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스타덤에 올라 브릿팝 열풍을 이끈 밴드다. 오죽하면 "블러와 오아시스가 치고받았던 95년 브릿팝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펄프였다"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1] 멋진 라이브 공연
비록 브릿팝 열풍을 이끈 밴드지만 다른 브릿팝 밴드와 달리 1978년에 결성했고 1983년에 첫 앨범을 냈다. 그래서 한창 인기 있었을 때도 자비스는 30대였고(1963년 생), 2020년대인 지금은 다들 60대이다.
2. 활동 내역
2.1. 역사
일곱 살 때 라디오 DJ였던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호주로 넘어간 후 셰필드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암울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던 안경잡이 소년 자비스 코커는, 1978년 학교 장기자랑에서 우연히 노래를 하고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자 "음악을 하면 또래 애들에게 환호성을 들을 수 있고 여자친구도 사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 가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2] 그 결과 17살 소년 코커는 1980년 7월 학교의 친구들과 함께 아라비커스 펄프(Arabicus Pulp)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한다.[3] 자비스 코커가 경제학 시간에 들었던 용어라는데, 발음하기가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밴드 이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이름인 펄프로 바뀌었다.이처럼 스쿨 밴드 정도로 시작한 밴드지만 1981년 10월, 존 필 세션으로 유명한 영국의 프로듀서 존 필에게 보낸 데모가 그에게 호평을 받자 이들은 전업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우며 곡 작업에 매진, 마침내 1983년 데뷔 앨범 <It>을 발매한다. 그러나 데뷔 앨범은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코커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대학 진학 등의 이유로 밴드를 탈퇴했다. 반면, 자비스 코커는 본격적인 프로 활동을 목적으로 새 멤버들을 영입하고 밴드 활동을 전개한다.
이렇게 펄프가 본격적인 밴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1985년 11월에 그 유명한 '휠체어 사고(wheelchair incident)'가 일어난다. 파티에서 다른 남성이 한 건물의 창문에서 다른 건물의 창문으로 넘어가는 트릭을 보여준 것이 멋있어 보였던 자비스 코커가 당시 짝사랑하던 여성[4]에게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기 위해 스파이더맨 흉내를 내며 건물 3층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당연히 코커는 발로 착지하지 못했고, 골반뼈와 발목을 다쳐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으며 퇴원한 후에도 두 달 동안 휠체어 생활을 했다. 이맘때 펄프 라이브 사진을 보면 코커는 휠체어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사건으로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막대한 충격을 받은 자비스 코커는, 여섯 주 동안 병원에서 누워 지내며 인생은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과,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에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자비스 코커는 휠체어 사건이 자신의 음악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펄프가 프로 데뷔를 시작한 80년대 중반의 영국 인디 씬에서는 더 스미스가 센세이션한 열풍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펄프는 말 그대로 철저하게 묻혔다. 1986년 싱글 <Little Girl>과 <Dogs Are Everywhere>가 발매되었으나 별 반응을 얻지 못하자 2집 앨범 Freaks의 녹음은 1986년 6월에 소속 레코드사인 Fire 레코드의 [5] 압박으로 일주일 만에 급히 진행되었고 이마저도 회사의 무관심으로 1987년이 되어서야 발매가 이루어졌을 정도... 이 때문에 펄프는 브릿팝 열풍을 이끌었던 소위 브릿팝 4 대 천 왕 중에서 유일하게 더 스미스를 싫어하는 밴드이다. 자비스 코커왈 더 스미스가 씬을 독차지하여 다른 밴드들이 주목받을 기회를 없애 버렸다고.
결국, 자비스 코커는 무명 생활에 지친 나머지 1987년 처음으로 펄프를 해체하고 Sheffield Hallam University에서 예비 과정(Foundation course)을 수강하기 시작했고, 1988년부터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학교(영국 예술학교 중에서는 알아주는 대학교다)에 입학해서 영화 연출을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대학에서 영화를 배우는 와중에도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자비스 코커는 마침내 1989년 기존의 펄프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러셀 시니어와 키보디스트 칸디다 도일에게 다시 연락하고, 학교에서 알게 된 베이시스트 스티브 맥키와 세션 드러머로 활동 중이던 닉 뱅크스를 끌여들여 펄프를 재결성, 에시드 하우스 성향의 3집 앨범 Separations를 녹음한다. 하지만 Fire 레코드사와의 불화 때문에 앨범의 발매가 또다시 기약없이 연기되자 코커는 밴드를 다시 해체하고 대학 공부에 전념하다가, 1991년 대학을 졸업한 후 영화 감독으로서의 삶을 꿈꾸며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6] 대학시절부터 파리 생활 때 까지 코커가 끄적인 여러 글귀들은 이후 노래 가사로 다듬어져서 His 'n' Hers에 실린 곡들의 가사가 된다.
1992년 6월 19일, Separations 앨범이 드디어 발매되었고, 앨범이 전작들보다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자비스 코커는 급히 영국으로 돌아와서 펄프를 재결성했다. 1992년, 밴드는 Separations 세션 당시 녹음한 곡들 중 <My Legendary Girlfriend>, <Countdown> 등 두 2곡을 재녹음하여 싱글로 발매했고 같은 해, Fire 레코드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신생 레코드 회사인 Gift사와 계약을 체결한다. 1993년, Gift 레코드사가 Islands 레코드사에 인수되면서 펄프는 비로소 메이저 데뷔를 할 수 있었다. 1993년 새로 작업한 싱글 <Babies>와 <Razzamatazz>가 연속해서 히트를 치며 처음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은 펄프는 1994년, 마침내 번쩍번쩍하는 신디사이저의 복고풍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자비스 코커의 신랄하고도 색욕마인스러운 가사가 담긴 앨범 His 'n' Hers를 발표하여 당시 불어닥친 브릿팝 열풍의 기수 중 하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디 시절(데뷔 직후부터 1992년까지)에 녹음한 곡들의 모음집도 <Countdown 1992-1983>이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이때 <Do You Remember The First Time?> 싱글 홍보를 위해 첫 경험에 대해 물어보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
1995년, 펄프는 Different Class로 연타를 날린다. 섹스 피스톨즈의 앨범을 프로듀싱한 것으로 유명한 프로듀서 크리스 토마스가 프로듀싱한 이 앨범은 사운드 면에서도 깔끔하게 다듬어졌고 작곡 면에서도 비약적인 상승을 이뤄 명반이라 불린다. Common People,[7][8] Mis-Shapes, Disco 2000 등의 히트 싱글들도 이때 나왔다. 특히나 1995년 글래스톤베리 헤드라이너로 출연해 선보인 무대는 그야말로 펄프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화룡점정. 당시 피라미드 스테이지 헤드라이너로 참가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던 스톤 로지즈가 존 스콰이어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인해 공연을 취소하면서 대타로 섭외된 펄프는 아이코닉한 공연을 펼쳐보인다. 이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글래스톤베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라이브 중 하나로 여겨진다. 훗날 이 퍼포먼스는 브릿팝의 황금기가 본격적으로 도래했음을 알리는 상징과도 같은 퍼포먼스로 기억된다.
Different Class 시절 아주 유명한 일화가 또 있다. 바로 마이클 잭슨 무대 난입 사건. 마이클 잭슨이 1995년 브릿 어워드에서 어린이들과 <Earth Song>을 부르며 퍼포먼스 하던 중 보컬 자비스 코커가 무대에 올라가 난동을 부린 사건이다. 그때 코커는 카메라에 엉덩이를 흔들며 자신을 잡으려는 관계자를 피해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도망다녔고, 아이 세 명을 폭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무혐의 판정을 받아 풀려났다. 이유를 묻자 자비스 코커는 '마이클 잭슨이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보이는 것이 싫어서'라고 대답했다. 최근 인터뷰에서는 밴드의 키보디스트 칸디다 도일이 "그렇게 화나면 무대에 올라가서 뭐라도 해 보든지"라고 도발을 해서 충동적으로 일으킨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건 일주일 후 자비스 코커의 아우디 승용차는 유리창이 박살난 채 발견되었고 자비스 코커는 한동안 거의 매일 전화로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 사건에 대한 동료 가수들의 발언이 재미있는데, 자비스 코커의 친구인 블러의 데이먼 알반은 "정말 충격적인 행동"이라 표현하며 비난했지만, 음악 잡지 멜로디 메이커의 한 기자는 기사 작위를 받아야 한다고 썼고,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한술 더 떠 대영제국 최고훈장인 MBE를 주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링크 또한 동료 연예인들 사이에서 자비스 코커의 무죄를 주장하는 "Free Jarvis" 캠페인이 시작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Sorted For E's & Wizz라는 싱글 뒤에는 코카인이나 엑스터시 같은 마약을 보관할 수 있는 종이접기 방법을 그려넣어서 싱글이 회수되는 사건도 있었다. 곡의 제목과 곡 내용 자체도 당시 영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마약에 취한 채로 레이브 파티에 참석하는 젊은이를 묘사한 곡이다.
브릿팝 열풍이 한풀 꺾인, 1998년 펄프는 This Is Hardcore를 발표하면서, 음악적으로는 카바레나 1950년대 스탠더드 팝과 재즈의 영향이 상당히 강해지고, 대외적으로도 유머가 줄고 진지한 면모를 보이는 급격한 방향 전환을 맞이한다. 앨범은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지만 브릿팝적인 색채가 옅어지고 밴드의 우울함이 부각된 스타일 때문인지 전작만큼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2001년, 펄프는 챔버 팝의 전설인 가수이자 프로듀서 스콧 워커를 고용하여 We Love Life를 발매했는데, 앨범 자체는 웰 메이드 앨범이었지만[9]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하는 바람에 소속사인 Islands 사에서 펄프와 재계약을 거부했다. 결국, 펄프는 2002년 Islands 시절 발매한 싱글을 모은 앨범인 <Hits>를 발표하고 영국 Auto Festival에서 고별 공연을 가진 다음 그대로 해산했다.
2.2. 해체 후
펄프 해체 후, 자비스 코커는 펄프 멤버였던 스티브 맥키,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와 필립 셀웨이와 함께 해리 포터와 불의 잔 영화판에 크리스마스 무도회에 등장하는 마법 세계 최고의 인기 밴드인 'The Weird Sisters (운명의 세 여신)'의 멤버로 등장하였다. 삽입곡도 자비스가 직접 썼다. 원래는 프란츠 퍼디난드가 나오기로 되어있었다고 한다.이후 자비스 코커는 유명 라디오 음악방송 <Jarvis Cocker's Sunday Service>의 호스트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솔로활동을 하였다. 음악적인 평가는 좋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별로 없었다. 1집 발표 직후 자비스 코커는 당시 프랑스인 의상 디자이너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다.
2009년에는 두 번째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2집에는 프로듀서로 너바나와 픽시즈 프로듀서로 유명한 스티브 알비니가 참여했다. 참고로 프랑스 와이프하고는 솔로 2집 발매 시기에 이혼했다. 공식적으로는 우호적으로 헤어졌다고 발표했지만 후에 프랑스 와이프의 말에 따르면 자비스는 자신과 의사소통을 위한 기초적인 프랑스어조차 배우지 않아 영어로만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고 하며 자신의 패션쇼에 한번도 오지 않았을 정도로 자비스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2017년 3월 자비스 코커의 솔로 3집 Room 29이 발매되었다.
2017년 12월 Jarvis Cocker's Sunday Service가 종영되었다. 자비스는 마지막 방송에서 "It’s not goodbye, it’s just farewell. We wanted to say farewell properly and so we’re going to do a run of five extra-special shows throughout December, starting this Sunday. Let’s keep warm together."라는 말을 남겼다.
2018년 자비스의 새 밴드 JARV IS가 결성되었다.
2020년 7월 17일 JARV IS의 데뷔 앨범 Beyond the Pale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NME에서 "펄프 이후 코커의 작품들 중에서 최고작"이라고 평가받는 등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중.
2021년, 자비스 코커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했다.
2.3. 재결합
2011년 재결합을 발표했으며 스페인 프리마베라, 영국 아일 오브 와이트, 와이어레스 페스티벌 헤드라이너 섭외 스케줄이 잡혔다. 이 해 공연들에는 펄프를 떠난 기타리스트 러셀 시니어도 라인업에 포함되어 있다!Pulp - Disco 2000 (Isle of Wight Festival 2011)
2013년, 자비스 코커가 솔로 활동을 한 인디 레이블 러프 트레이드[10]에서 싱글 After You를 발매 후 다시 해체 상태이다. 해당 곡은 We Love Life 당시 만들어진 곡이라고. Record Store Day에 나온 Soulwax의 리믹스 버전을 Grand Theft Auto V의 Soulwax FM에서 들을 수 있다. #
오랫동안 자비스의 솔로 활동에 집중했다가 2022년 7월 2차 재결성을 발표, 10월 28일에 정식으로 재결합한 뒤 2023년부터 투어 공연을 진행 중이다. 이름은 This Is Hardcore의 노랫말 "What exactly do you do for an encore?"에 대응하는 "This Is What We Do for an Encore".
2023년 3월 2일 베이시스트 스티븐 매키가 3개월 동안 투병 후 타계했다. 본업에 충실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재결성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건강 상태가 악화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3. 디스코그래피
3.1. 스튜디오 앨범
스튜디오 앨범 | ||
앨범 아트 | 제목 | 발매 |
|
It | 1983 |
|
Freaks | 1987 |
|
Separations | 1992 |
His 'N' Hers | 1994 | |
Different Class | 1995 | |
This Is Hardcore | 1998 | |
|
We Love Life | 2001 |
4. 기타
자비스 코커가 대부분의 곡을 작사 및 작곡했지만, 음반 수익 개런티는 대인배스럽게 5명의 멤버들 모두 20%씩 차지하고 있다.펄프는 무명 시절이 길었던 만큼 멤버들이 부업을 많이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베이시스트 스티브 맥키와 기타리스트 마크 웨버는 영화학도였고[11], 키보디스트 칸디다 도일은 장난감 가게를 경영했으며, 결성부터 Different Class 시절까지 함께한 기타리스트 러셀 시니어는 펄프의 인디 시절, 밴드 활동과 음악 잡지의 기자로 투잡을 뛰었다가 1996년에 펄프를 탈퇴한 후에는 녹음실을 차려서 운영 중이다.
2014년 12월, "Pulp: a Film about Life, Death & Supermarkets"라는 제목으로 밴드의 마지막 공연과 팬들 등의 이야기를 담은, 밴드/팬에게 헌정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다. 위는 그 예고편.
[1]
정확히는 두 밴드의 전쟁은 언론이 부추긴 소모전에 가까웠고, 당사자들 쪽에서는 지긋지긋해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펄프는 그런 소모전과 무관하게 성공해 나온 지적.
[2]
자비스 코커는 자신이 밴드를 결성한 이유에 대해 "내가 밴드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부끄러움과 사회적 무능함 때문이었다. 밴드 활동의 경우 안전한 거리에서 사람들과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3]
후에 자비스 코커는 인터뷰에서 "만약 당신이 기괴하거나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할 것이다. 그냥 사회에서 소외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그것을 당신의 개성으로 살려내는 것이다. 언젠가
장폴 사르트르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당신도 알지 않는가. 그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수십 년에 이르는 에로틱한 관계로 유명한 문호이며 보헤미안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사진을 처음 봤는데 첫 인상은 '어, 숫소 같은 흐리멍텅한 눈을 가지고 있잖아'였다. 사진 속의 사르트르는 정말 못생긴 사람이었다. 심지어
두 눈은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사르트르가 여자친구를 전혀 가져 보지도 못할 그런 용모와 기괴함을 극복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것이 내가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든 생각이다. 요컨대 나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건이었다."라고 말했다.
[4]
훗날
Disco 2000을 바친 데보라 분,
[5]
이 레이블은 아직도 존재한다.
스페이스맨 3가 여기 소속이었다.
[6]
그러나 이때 코커는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
[7]
NME에서는 이 곡을 브릿팝 명곡 순위에서 1위에 랭크했고,
피치포크 미디어가 뽑은 90년대 명곡 순위에서도 2위를 차지한 명곡이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라디오헤드 빠로 유명한
피치포크가
Paranoid Android보다 높게 랭크했다!
[8]
이 곡은 코커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학교에서 영화 공부할 때 만난 조각 전공 여학생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코커 본인 말로는 그녀와는 별일 없었고 단지 그녀의 "런던 동쪽 끝(East End. 영국의 대표적인 노동자 거주 지역. 이들의 삶을 그린 동명의 드라마까지 존재한다)에서 살고 싶다"는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워낙 이 곡이 유명해졌던지라 언론에서 곡에 나오는 여성을 찾기 시작했는데, 유력한 후보로는 2015년부터 뜨거운 감자였다가 잘린(...)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부인이자 설치미술가 다나에 스트라토우가 있다. 스트라토우는 가사처럼 그리스에서 온 부잣집 딸이었고 코커가 학교에 다니던 1988년 같은 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비스 코커만이 정확한 인물을 알고 있을 거라고 말하며 부정. 코커 역시 가사의 그녀는 스트라토우가 아니라고 확인 사살하면서, 가사 자체가 그저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며 언론의 관심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가사 내용이 신랄하기 그지없어서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이 누구인지 인정해 버리면
그 사람을 먹칠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9]
이 앨범의 마지막 곡인 Sunrise는 피치포크 선정 2000년대 명곡 순위 중 192위에 놓여 있다.
[10]
인디이기는 하지만 인디라고 하기엔 규모가 큰 곳이다.
더 스미스,
리버틴즈가 이 곳 출신이며 블러의
그레이엄 콕슨도 이 곳 산하의 레이블에서 음반을 낸 적이 있다.
[11]
두 사람은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부터 자비스 코커와 친구 사이였다. 마크 웨버는 펄프 해산 후 감독한 영화로 독립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