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منظمة التحرير الفلسطينية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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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일 | 1964년 | |||||
규모 | 6,000명 | |||||
이념 |
팔레스타인 내셔널리즘 아랍 내셔널리즘 ( 범아랍주의) 아랍 사회주의 ( 세속주의) 반시오니즘 (1993년 이전)[1] 반제국주의 내부 계파: 양국 방안 일국 방안 (반시오니즘) 바트주의 마르크스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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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공식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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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4년 팔레스타인의 분리독립을 위해 창립한 무장단체로서 약칭은 PLO다.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을 위한 투쟁을 했다. 다만 동시에 무장 테러 및 폭력적 행동으로 국제사회로부터 큰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1991년 마드리드 조약 이후 공식적이지는 않았지만 PLO는 이스라엘의 존립권을 인정해주고,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구로 인정하는 등 반쯤은 서로 인정해주는 협약을 맺음으로써 미국과 이스라엘은 PLO를 테러단체로 지정한 것을 취소했다.2. 역사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원래 팔레스타인은 1947년에 독립한 요르단왕국의 영토가 될 예정이었으나, 영국이 시오니즘 운동을 배경으로 이주해온 유대인들에게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결국 약속은 유대인 독립국가의 약속으로 거의 변경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 때문에 요르단은 국토 절반을 잃어버리고 만다.[2]이에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 대대로 거주한 비유대인들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1964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열린 아랍연맹의 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겠다고 결의하면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창립했으며, 1969년부터 야세르 아라파트가 의장이 됐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주변국가들에 본부를 두었다. 명분상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힘으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코자 하는 거지만,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PLO를 게릴라부대화하려고 했다.[3]
정작 결성 초기에는 다른 아랍국가로부터 지지를 못 받을 뿐더러, 팔레스타인을 이용해 아랍권에서 영향력을 떨칠 야심으로 아라파트를 '깡패 두목'이라 멸시하고, 암살 시도를 하기도 했다. 투쟁 방식도 과격해서, 이스라엘의 스쿨버스에 폭탄을 집어던졌다.[4] 덕분에 이스라엘의 여론은 굉장히 험악해져서, 평화 노선을 걷는 내각은 지지율이 급락하고 총리가 교체되었으며, 심지어 암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전 팔레스타인 지역이 이스라엘에게 먹히면서 주민들의 분노를 표출하자, 이들 사이에서 아라파트는 '구세주'로 등극했다. 요르단에 거점을 둔 PLO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목표로 무장투쟁을 선언하며 이스라엘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는데, 오히려 이스라엘군은 근거지 요르단 쪽에 더 큰 보복을 가했다. 1971년에 요르단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추방당한 뒤 레바논으로 옮겼고,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과격단체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 사건( 뮌헨 올림픽 참사)으로 PLO 역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이에 따라 아라파트 의장은 이스라엘 이외의 국제 테러에 개입치 않는다는 온건노선을 천명한 후, 국제사회에 PLO를 인정해달라고 했다. 그 결과 1974년에 유엔 참관국이 된 후 1976년에는 공식적인 영토 없이 아랍연맹에 가입해 이스라엘 국가를 타도하는 유격전에 몰두했다.
1982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으로 인해 튀니지로 쫓겨난 뒤, 1988년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하며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타도' 노선을 포기했다. 1985년에는 이스라엘 공군이 튀니지에 있는 PLO본부를 폭격한바 있다 1992년부터 신임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협상 후 이듬해 9월 '오슬로 협약'을 맺어 이스라엘과 화친했으며, 자치정부로 격상하여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통치권을 인수했다.
1994년에 카이로협약을 거쳐 1995년 9월 제2차 오슬로협약을 맺어 잠정적으로 자치권을 확대하려 했으나, 얼마 안 가 협약의 주인공 중 하나인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암살당해 원점으로 돌아갔다. 1996년 오슬로협약 반대파 인사인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에 취임한 후 압박이 심해지면서 1997년 백악관 협상과 2000년 중동평화협상 및 최후통첩도 실패했다. 같은 시기 과격파 하마스의 등장으로 존립에 위협을 겪었다. 2004년에 아라파트 수반이 사망하자, 2006년에 프랑스 왕국의 삼부회처럼 개편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5] 기존의 업무를 모두 인수했다. 그래서 지금의 PLO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와 다를 바가 없다.
옛날의 PLO를 계승한 현 팔레스타인의 정당들은 파타와 하마스가 있다. 온건파 파타가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다스리고 있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향하면서 가나안 전역의 완전한 해방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테러와 기습을 매일 주동하는 과격파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다스리고 있다. PLO의 조직과 인력은 파타가 자연스럽게 계승했지만, 무장투쟁과 항쟁정신은 하마스가 계승한 셈이다. 또한 PLO의 좌파 이념과 하마스를 능가하는 무장 투쟁 방법론을 둘 다 가진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이 존재하는데, 본래 파타와 하마스를 둘 다 적대하는 극좌파 게릴라 단체였으나 2006년 이후 사실상 이스라엘의 협력자가 된 파타에 맞서 하마스와 가까워졌으며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하마스와 연합전선을 꾸려 이스라엘에 맞서고 있다.
3. 대외 관계
3.1. 아일랜드와 IRA
북아일랜드에서 IRA가 활동할 당시, IRA와 PLO는 서로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같이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IRA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3.2. 아랍 국가들
아랍 국가들은 겉으로는 PLO를 도와주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을 때릴 몽둥이로서의 역할을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이집트와 요르단[6]은 물론, 시리아[7]와 레바논 등에도 거점을 마련하며 항쟁을 계속했으며, 무아마르 카다피 시절의 리비아와 바트당 정권 시절의 이라크도 제4차 중동전쟁에 참전하면서 PLO를 원조하는 뜻으로 각각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 및 요르단강과 골란 고원에 육군을 파병했다.4. 출처
- 가로세로 세계사 3권: 중동, 화려한 이슬람세계를 찾아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7. p207~209, 212~215.
- 토크멘터리 전쟁사 81부
[1]
PLO에서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파타는 1993년부터 반시오니즘을 포기했다. 그러나 파타 외의 다른 정당들은 반시오니즘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2]
사실 그 당시의 팔레스타인은 요르단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현 요르단의 국토는 트랜스요르단이라고도 하며 팔레스타인 지역과 하나로 묶여있었던 적이 있었다.
[3]
정규군이 된다면 이집트가 컨트롤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동 국가들은 어디까지나 PLO를 이스라엘을 때리는 몽둥이 역할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그래서 일부러 무기 지원도 딱 게릴라 역할을 할 만큼만 지원해준다.
[4]
임용한 교수의 말에 따르면 PLO가 자살폭탄테러의 원조라고 한다.
[5]
1978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93년의 오슬로 협정을 고려하면서 PLO의 민정관청을 개조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영사급 외교가 가능한 2010년대의
스코틀랜드와 비슷했지만,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은 최근에
유엔총회의
옵저버로 가입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새로운 현실을 반영하는 칭호로서
공사급 외교가 가능한 1920년대의
아일랜드 자유국과 비슷하다.
[6]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에게 요르단 서안 지구를 주겠다고 약속해놓고는 2차 중동전쟁이 끝나자 입을 싹 씻었으며 분노한 팔레스타인 과격분자에 의해
압둘라 1세 국왕이 암살되기까지 한다. 이후에도 요르단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최대한 피하려고 PLO를 자국에서 탄압했다. 그리고 PLO 역시 요르단을 차지하려는 목적으로도 요르단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빡친
후세인 1세가
검은 9월 사건을 일으켜 PLO를
요르단에서 내쫓고
레바논으로 추방시킨다.
[7]
시리아도
레바논 내전 후반부에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레바논에 다시 들어와 레바논의 아말 민병대와 함께 PLO를 소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