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모르 푸트라 나시오날 PT Timor Putra Nasional (TP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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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5316E> 본사 소재지 |
[[인도네시아| ]][[틀:국기| ]][[틀:국기| ]] 자카르타 |
설립일 | 1995년 8월 25일 |
해체일 | 2021년 11월 5일 |
주요 인사 |
토미 수하르토 (설립자 겸 회장) 소에파르토 소에자트모 (엔지니어링 담당자) |
자회사 |
기아 티모르 자동차 (69%) 티모르 나시오날 유통 티모르 인더스트리 콤포넨 티모르 디자인 엔지니어링 (R&D 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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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대 인도네시아의 승용차 제조 회사였으며, 독재자 수하르토의 아들이던 토미 수하르토가 운영했던 회사이다.회사의 이름은 Tenaga/Teknologi Industri Mobil Rakyat(국민차 산업 기술)이라는 역두문자어이면서 당시 동티모르 지역의 독립 이전이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해당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풀 네임인 '티모르 푸트라 나시오날'의 푸트라 나시오날은 '국민의 아들'을 의미한다.
2. 역사
2.1. 설립 배경
당시 인도네시아에는 현재 11개의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진출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25년간 인도네시아 전체시장의 90% 이상을 독점했으나, 차량 기술 이전에는 인색했었다. 그러다 보니 인도네시아 자동차 산업은 후진성을 면치 못했기에 1992년부터 이에 대한 대응을 계획하고 있었다.그렇게 1996년 2월 28일, 인도네시아에서 국가 자동차 산업 발전에 관한 대통령 지시(Inpres, Instruksi Presidenten)에 대한 대응으로 설립되었으며, 차량 제조 기업이 자국 소유의 인도네시아 상표로 브랜드화되어 국내에서 생산되고 국내에서 생산된 부품을 사용하는 '국민차 선구자' 지위를 부여해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으며 3년 동안 국산화율을 점진적으로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1] 또한, 생산 시설은 인도네시아 현지 기업의 소유 및 해외 자동차 제조사와의 계약에서 수출 가능성을 제한하는 약정이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 역시 지니고 있었다. 또한, 1996년 9월까지 15,000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라는 경제부 장관의 요구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이를 통해 선정된 '국민차 선구자' 기업은 수입 부품에 대한 관세(65%)와 4년간 사치세[2] 면제가 이루어지는 혜택이 주어졌다. 또한, 상술한 요구 조건을 달성했을 때 선구자 지위 및 정부의 재정 지원 혜택을 제공하였다.
티모르의 경우에는 이 발표가 나기 3개월 전에 생산 승인을 받은 바 있었다. 당시 티모르는 토미 수하르토가 99%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합작 투자를 위한 외국 제조사들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물망에 오른 회사들에는 라다와 이란 호드로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기아자동차를 선정하였는데, 기아 측에서 생산, 수정 및 배지 엔지니어링과 수출을 허용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
2.2. 상세
<colbgcolor=#05316E> 티모르 제조공장의 스카이뷰 |
지도 |
1995년 8월 29일에 설립되었으며 1996년 7월 18일 자카르타의 사리나 빌딩에서 기아 세피아 기반의 S515i가 공개되었고, 현지 공장이 아직 건설되지 않았던 상황이기에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서 수입 판매하였다. 수입을 원활히 하고자 수하르토는 대통령령 제42호를 발표하며 수입 관세를 부과받지 않고 국민차를 수입할 수 있게 하였다.[4] 이후 1996년 6월부터 1997년 7월까지 총 39,715대가 수입되었으며, 자체적인 유통 체계를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었고 당시 소형차 부문에서 35.82%의 점유율을 기록하였다.
당시 7,000만 루피아[5]였던 토요타 코롤라보다 절반 정도 저렴한 가격인 3,500만 루피아[6]에 판매되었으며 첫 6개월 동안은 승용차 부문에서 26%의 점유율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경쟁사들의 투자 철회를 가져왔는데, 포드 모터 컴퍼니와 크라이슬러 측에서 포드 에스코트와 닷지 네온의 키트 생산을 백지화한데다, 기어코 1996년 6월에는 제너럴 모터스 측의 향후 투자 계획 보류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자가토를 통해 독자적으로 설계한 국민차였던 말레오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7] 이 계획이 무산되며 토미 수하르토는 그의 형이던 밤방 트리하트모도조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밤방은 현대 엑센트와 엘란트라를 배지 엔지니어링한 비만타라라는 회사를 세웠고 베카시에 현지 공장까지 설립했지만, '국민차 선구자' 지위를 얻진 못했다.
1997년 2월부터 웨스트 자바 시캄펙의 만다라 푸트라 산업지대에 위치한 부지에 조립 및 부품 공장의 설립이 완료되었으며 10억 달러의 비용이 투입되었다. 지분은 TPN 측이 70%, 기아자동차 측이 30%를 소유하는 형태의 'PT 기아 티모르 모터스'가 건설 및 운영할 계획이었으며 연간 50,000대 생산 능력을 갖추었다. 부품 제조 공장의 경우에는 티모르 인더스트리 콤포넨 측이 운영할 예정이었다. 4월 11일에는 S515의 연료 분사 버전인 S515i가 출시되었고 5월 15일부터 현지 생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8년까지 수입된 40,000대의 차량 중 15,000대는 악성 재고로 남아 있었고 19,471대가 판매된 1997년과 달리 1998년에는 2,493대로 급감하였다. 물론, 이 때 당시 자카르타의 자동차 판매량은 1997년 40만대 가량에서 1998년에는 53,000대로 급감한 것과 동일했다.
총 43,269대가 판매되었다.
2.2.1. 몰락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이 WTO에 제소를 하였고, 1998년에 국민차 프로그램이 WTO의 규정과 양립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몰락의 신호탄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세금 면제는 국산 제품 사용에 따른 보조금 지급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세계무역기구 보조금 및 상계관세 협정을 위반한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후 1998년 1월 21일에 발표된 대통령령(Keppres) No 20 1998을 통해 운영을 중단하게 되었다. 면세로 수입할 때 미납된 사치세 13억 달러[8]의 비용을 반환해야 했다.또한 기아그룹의 파산과 인도네시아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리고 1998년 5월 인도네시아 인종 폭동이 발생하게 되었고 당시 사람들은 수하르토 정권과의 연관성이 있던 티모르 브랜드가 시위대의 표적이 되지 않게 하고자 'T' 로고를 제거했으며, 재고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딜러점은 브랜드 이름을 유지했으나 간판을 변경해야 했을 정도로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인도네시아 상황이 나아진데다 현대자동차 산하로 인수된 기아자동차에서 해당 공장을 구조조정해서 브랜드 부활을 도모하려 했다. 기아자동차에서는 TPN에 계속 투자하고 치캄펙 공장을 완공할 계획이었으며, 향후 세피아 외에도 기아 프레지오 및 스포티지로의 생산을 확대하려 했고, 토미 수하르토를 배제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으나 당시 대통령인 압두라만 와힛의 탄핵과 기아자동차에서 파트너를 인도모빌 쪽으로 바꾼 후 현지에서 녹다운 키트 방식으로 생산하면서 부활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후 TPN은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며 유령회사로 전락했고 인도네시아 정부와 수많은 소송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후 토미 수하르토에 대한 법적 결정 이후 정부가 모든 자산을 몰수한다는 방침이 나오면서 2021년 11월 5일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 생산차량
- S515/S515i/SL516i/SW516i - 기아 세피아 기반. 세단 외에도 왜건과 리무진 사양이 있었다.
4. 베이퍼웨어
- J5 - 기아 스포티지 1세대 차량의 배지 엔지니어링 차량이다.
- S2 - 자체적으로 개발한 해치백 프로토타입이다.
- 보르네오 - 취소된 람보르기니 LM003을 배지 엔지니어링한 차량이다.
[1]
1년차에는 최소 20%, 2년차에는 40%, 3년차에는 60%까지 끌어올리고자 했다.
[2]
세단의 경우에는 35% 면제가 이루어졌다.
[3]
참고로,
기아그룹은 티모르와 손잡기 전인
1993년에 인도네시아 훔퍼스그룹 및 자동차 회사인 우다틴다그룹과 인도네시아내 자동차생산 및 판매를 위한 3자간 합작사 설립계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4]
이후 이러한 부분에 의문이 제기되자 토미 수하르토는 국내에 있던 이주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5]
당시 원화가치 약 2,293만원
[6]
원화가치 약 1,146만원
[7]
B. J. 하비비가 소유한 인도네시아 자동차 컨소시엄과 호주 밀라드 디자인 및 궤도 엔지니어링 간의 합작 투자로 개발되었으며,
로버 100 시리즈를 토대로 고유 디자인을 입힐 예정이었다.
[8]
원화가치 약 1조 8,969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