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1-22 10:42:27

테 데움(브루크너)


정식 명칭: 테 데움 C장조
(Te Deum C-dur/Te Deum in C major)
오이겐 요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합창단, 독창자 4명[1]과 볼프강 마이어( 오르간 담당)의 1965년 6~7월 녹음

1. 개요2. 특징3. 곡의 형태4. 초연과 출판
4.1. 정치적 수난사

1. 개요

테 데움은 빈에서 극복한 많은 고통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느님께 바쳤다.
안톤 브루크너, 비공식 초연 직후인 1885년 5월 10일에 지휘자 헤르만 레비[2]에게 보낸 편지 중

안톤 브루크너가 테 데움의 가사에 작곡한 혼성 4부 합창, 독창자 4명, 오케스트라를 위해 1884년에 완성한 종교 음악. 공연 소요 시간은 약 23~27분 정도로 그리 길지는 않지만, 이 곡보다 더 대규모인 미사들과 함께 브루크너 종교음악의 걸작으로 손꼽히며, 19세기 종교 음악 중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이다.

2. 특징

'테 데움'은 '주님, 저희들은 당신을 찬양하고'로 시작하는 라틴어 가사의 천주교 찬가인데, 일요예배와 종교적인 축일, 축하 예배 등 축하할 만한 일에 주로 불린다. 천주교 신자였던 작곡가나 천주교 전례용 음악을 작곡한 이들 중에는 이 테 데움 가사에 곡을 붙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곡은 그 중에 최상급으로 평가받을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레퀴엠, 미사, 소규모 모테트를 비롯한 안톤 브루크너의 종교음악 작품들은 대개 린츠에 머물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작곡된 것들이다. 이후 교향곡 창작에 집중하게 되면서 대규모 종교곡은 한참 동안 쓰지 않았는데, 이 곡과 시편 150만큼은 예외적으로 창작 활동 후기에 작곡되었다.

초고는 1881년 5월에 시작하여 작곡자의 57세 생일인 1881년 9월 4일에 완성되었지만, 1883년 9월 28일~1884년 3월 7일에 개정되었다.[3][4]

브루크너가 생전에 공개 석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자신의 작품이기도 하다. 중병 상태에 죽기 거의 9개월 전이던 1896년 1월 12일에 사람들에게 이끌려 나와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테 데움의 연주회에 참석했기 때문.[5]

3. 곡의 형태

전체적으로는 크게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데, 가사의 단락에 따라 다섯 개 섹션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Te Deum laudamus (주여, 저희는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2: Te ergo quaesumus (저희는 당신께 갈구하나이다)
3: Aeterna fac cum sanctis (저희도 성인들과 함께)
4: Salvum fac populum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소서)
5: In te, Domine, speravi (주여, 당신께 바라오니)

가사의 내용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교향곡에서처럼 중심 주제를 내세우는 등의 구성법은 쓰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교향곡 창작에서 얻은 각종 기법들을 응용해 집어넣고 있고, 그 이전의 종교음악들보다는 훨씬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이다. 그리고 화성법의 대가 브루크너로서의 면모도 곳곳에 보이는데, 특히 간결한 온음계를 쓴 1악장의 도입 주제는 너무나 압도적이며, 세련된 반음계를 쓴 5악장의 황홀한 이중 푸가가 마지막에 완벽한 C장조로 전환되는 모습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교향곡 제5번처럼 순환 형식을 쓰고 있는데, 2악장과 4악장에서 테너가 제시하는 주요 주제는 거의 동일하며 1악장의 주제는 4악장 후반부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곡 자체의 걸작성을 인정하는 이들 중에도 이 곡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더러 있다. 특히 브루크너 당대에는 '체칠리아주의자' 들이 브루크너 종교음악의 전담 비판론자처럼 활동했는데, 체칠리아주의자들은 종교음악의 원류가 기악 반주 없는 순수 성악의 아 카펠라에 있다고 여겼다. 심지어 이들은 아 카펠라도 엄격한 가창 음역과 발성의 준수나 화성과 대위법의 틀을 따라야 한다는 일종의 원리주의적 사상도 지녔는데, 이들은 브루크너가 종교음악을 쓰면서 너무 기묘한 화성이나 대위구를 삽입한다거나 지나치게 확대된 교향곡풍 관현악을 사용한 점과 그리고 독창자나 합창단에 부르기 힘든 고음역이나 도약 음정을 많이 쓴 점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실제로 체칠리아주의자들의 지적처럼 브루크너의 테 데움은 정통 전례에 쓰기는 힘든데, 대규모로 구성된 곡이라는 점 외에 연주의 난점도 분명한 걸림돌이다. 성악진, 특히 합창단이 많이 고생하는 곡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독창자들의 노래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합창단은 묵직하고 강렬한 소위 '오르간 음향'의 관현악 사운드를 배경으로 노래해야 하는 데다가 소프라노나 테너 파트의 경우 일반적인 합창 음역보다 윗쪽의 음정을 불러야 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런 탓에 이 곡의 공연 때는 숙련된 프로 합창단이 섭외되는 경우가 많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그리고 브루크네리안이 이상할 정도로 많은 일본에서는 아마추어 합창단이 이 곡을 부르는 일이 가끔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브루크너의 천적이었던 반바그네리안들도 물론 이 곡을 혹평했는데, 다만 초연 때는 이미 현악 5중주와 7번 교향곡으로 브루크너의 성공 가도가 시작된 탓에 예전 만큼의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브루크너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유명했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도, 테 데움의 초연을 듣고는 이 곡에 대해 어느 정도 칭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주 편성은 독창자 네 명( 소프라노/알토/ 테너/ 베이스)과 혼성 4부 합창(마찬가지로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파트)이라는 성악진에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4/ 트럼펫 3/ 트롬본 3/ 튜바/ 팀파니/현 5부(제1 바이올린-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오르간[6]이라는 전형적인 2관 편성 스펙의 관현악이 따라붙는다.

4. 초연과 출판

개정판 완성 약 1년 뒤인 1885년 5월 2일에 관현악 파트를 브루크너의 제자인 요제프 샬크가 두 대의 피아노용으로 축약 편곡한 형태로 브루크너 자신이 직접 지휘해 선보였다. 대신 성악부는 원곡 그대로 기용했고, 독창자 네 명과 빈 바그너 협회 합창단이 참가했다. 원래대로 관현악을 쓴 본격적인 초연은 다시 1년 가량 지난 1886년 1월 10일에 빈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독창자, 합창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연 무대는 7번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찬사를 받았고, 브루크너 생전에 가장 많이 연주된 종교음악이자 두 번째로 많이 연주된 작품이라는 기록도 세웠다.[7] 출판본은 1885년에 브루크너와 작곡자의 제자인 요제프 샬크의 편집으로 3번 교향곡을 간행했던 테오도어 레티히 음악출판사에서 처음 나왔다.[8] 대신 이 악보는 요제프 샬크가 편곡한 피아노 편곡보가 관현악 대신 인쇄되어 있다.

이후 하스나 오렐은 이 곡의 개정 편집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주로 교향곡의 개정판 출간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후술할 정치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테 데움의 오케스트라 총보는 상당히 늦게 출판된 편인데, 무려 1962년에야 레오폴트 노바크가 편집한 총보가 피아노 편곡보와 같이 출판되었다. 사실 노바크판 출판 전까지는 테 데움의 관현악 완편 공연에 브루크너의 자필보나 공연용으로 사보된 필사본을 대여하는 형태로 악보를 입수해야 해서 연주에 난관이 컸는데, 노바크판이 나오면서 관현악 공연 때 악보 입수에 관한 문제는 해결되었다. 거기다가 노바크판은 초판과 차이가 사실상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브루크너가 완성하지 못한 9번 교향곡의 4악장 대신 이 곡을 연주해 마무리지으라는 유언을 남긴 것 때문에, 9번 교향곡의 3악장까지 연주한 후 테 데움으로 공연을 마무리짓는 관행이 지금도 간혹 나타나고 있다. 물론 작곡자에 의한 권위있는 유언이라고 해도, 원곡 자체가 미완성이라 완벽한 해결책은 절대 아니다.

4.1. 정치적 수난사

하지만 완전한 악보가 늦게 나온 것과는 별도로, 이 곡은 나치 집권기 동안 의도적으로 무시당한 흑역사도 갖고 있다. 나치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선전 도구로 활용하려고 어용 음악학자나 음악평론가를 동원했는데, 이들은 종교음악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폄하하는 내용의 글들을 신문과 잡지에다 쓰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심지어 브루크너의 음악과 반유대주의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논문까지 쓰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다.[9] 이 때문에 이 곡도 나치 시기에는 연주 빈도가 갑자기 뜸해졌고, 전쟁 종결 후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다시 받게 되었다.


[1] 소프라노: 마리아 슈타더, 알토: 지글린데 바그너, 테너: 에른스트 헤플리거, 베이스: 페터 라거 [2] Herman Levi, 1839~1900, 독일의 유대인 지휘자. 1882년에 리하르트 바그너 파르지팔의 초연을 지휘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1887년에는 브루크너가 막 완성한 8번 교향곡의 초연 요청을 거부하면서 브루크너가 이 곡을 포함한 다른 교향곡들까지 개정 작업을 하게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3] 7번 교향곡과 맞물려 있는데, 교향곡 7번이 이 곡의 개정판보다 먼저 완성된 것을 보면 창작 우선 순위는 교향곡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4] 참고로 초고의 스케치는 간략한 총보 형식으로 써져 있으며 3악장이 통상판과 매우 다른 데다가 엄청나게 짧고, 5악장의 이중 푸가 합창은 작곡되지 않았다고 한다. [5] 여담으로 브루크너의 마지막 공식 무대는 1896년 3월 29일에 있었는데, 이 연주회는 한스 리히터가 빈 필하모닉과 빈 남성합창단을 지휘하는 특별 종려주일 음악회였는데, 여기서 연주된 곡은 평생 흠모해온 리하르트 바그너의 남성 합창곡인 '사도들의 만찬'이었다고 전해진다. [6] 자필 악보에는 오르간의 생략 가능 지시(ad libitum)가 기입되었지만, 노바크판은 이 지시를 채용하지 않았다. [7] 음악학자들의 집계에 의하면, 약 30회 가량 공연되었다고 하는데, 참고로 브루크너의 생전에 가장 많이 연주된 브루크너의 작품인 7번 교향곡은 전곡 공연과 부분 공연 합해 약 32회 연주되었다. [8] 레티히는 이 곡의 작품료로 50굴덴을 지급했는데, 이는 브루크너가 생전에 처음으로 받은 작품료였다고 한다. [9] 나치는 기본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경멸하고 있었는데, 다만 비당원이 다수인 국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척 하면서 성직자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세금을 물리거나 설교와 예배를 방해하는 등 뒷담화식 탄압을 자행했다. 브루크너의 작품을 언급하면서 종교음악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린 것도 이러한 행위와 크게 관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