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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렐 엘도라도 오웬스 Terrell Eldorado Owe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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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73년 12월 7일 ([age(1973-12-07)]세) |
출신지 | 앨라배마 주 알렉산더시티 |
대학교 | 테네시 대학교 채터누가 캠퍼스 |
체격 | 191cm, 100kg |
포지션 | 와이드 리시버 |
프로입단 |
1996년
NFL 드래프트 3라운드 전체 89순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지명 |
소속팀 |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1996~2003) 필라델피아 이글스 (2004~2005) 댈러스 카우보이스 (2006~2008) 버팔로 빌스 (2009) 신시내티 벵갈스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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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마의 재능
前
NFL 선수로, 포지션은
와이드 리시버였다. 역사상 NFL 최고의 와이드 리시버를 논할때 항상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선수로,[1], 통산 리시빙 야드 2위[2][3], 리시빙 터치다운 3위[4]의 대단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은퇴할 때까지도 엘리트 수준의 폼을 보여줬다. 그러나 동시에 당대 최고의 문제아였으며, 이기주의적인 성향으로 인해 팀내 분열을 일삼았던 선수로도 잘 알려져있다. 때문에 팬과 안티가 뚜렷한 선수이며 은퇴한지 한참인 지금도 그의 기행은 계속 회자될 정도이다.
2. 커리어
터렐 엘도라도 오웬스는 1973년 12월 7일 앨라배마 주의 알렉산더 시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16살에 출산하였고, 편모였기 때문에 그의 육아는 할머니가 담당했다. 그의 할머니는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고 집안에 다양한 규칙들을 세우곤 했다. 또한 손자 손녀들이 운동을 하는 것을 금하여 오웬스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에 이르러서였다. 심지어 그의 주종목이 되었던 미식축구는 3학년이 되어서야 주전으로 뛸 수 있었다. 이렇게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NFL의 대스타로 성장했으니 타고난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오웬스는 장학생으로 테네시 대학의 채터누가 분교로 진학한다. 여기서 그는 농구와 미식축구, 트랙에서 모두 활동했으며 세 종목 모두 NCAA 토너먼트에 진출할 정도로 뛰어난 운동선수였다. 하지만 그가 가장 빛난 것은 그리드아이언 위에서였고 그 또한 어릴적 제리 라이스를 동경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NFL에 진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가 다녔던 채터누가 분교는 풋볼 파워하우스가 아니었고 팀 또한 위닝시즌보다는 루징시즌이 많았던지라 NFL 스카우트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3라운드까지 떨어졌고 제리 라이스를 받쳐줄 리시버가 필요했던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가 89순위로 드래프트하게 된다. 제리 라이스의 경기를 보고 자랐던 오웬스로써는 자신의 아이돌과 함께 뛰는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기라성같은 선배가 있었기에 오웬스의 루키시즌은 스페셜 팀과 와이드 리시버를 오고갔다. 그의 2년차 시즌에 이르러서는 기회가 왔으니, 제리 라이스가 십자인대 파열을 당하면서 주전 와이드 리시버로 출전하기 시작한다. 이 시즌 그는 1,000 리시빙 야드에 가까운 기록과 8개의 리시빙 터치다운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는다.
1999시즌을 끝으로 명쿼터백이었던 스티브 영이 은퇴하면서 팀의 성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웬스 본인에게는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이전 시즌들이 좋은 리시버로써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2000시즌에는 1,451 리시빙 야드와 13개의 리시빙 터치다운을 기록하면서 엘리트 와이드 리시버로 발돋움한다. 이후 8년동안 그는 7번 1,000+ 리시빙 야드를 기록했고 6번의 프로볼과 5번의 올프로에 선정되는 등 슈퍼스타로 군림한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이 기간동안 그가 팀을 2번이나 바꿨음에도 별다른 적응의 문제없이 최고 수준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NFL 전체역사를 통틀어서도 3개의 다른팀에서 올 프로에 선정된 사람은 오웬스를 포함하여 3명밖에 없을 정도다. 심지어 그의 NFL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0년 신시내티 벵갈스 소속으로 뛰면서도 팀의 No.1 리시버였던 채드 '오초싱코' 존슨보다도 높은 리시빙 야드를 기록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이견이 없는 당대 최고의 와이드 리시버였고 명예의 전당을 첫턴에 입성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커리어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3. 논란
I LOVE ME SOME ME
THEY HATE TO LOVE ME
문제는 그가 동시에 리그 최고의 문제아였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전에도 더러 잡음을 일으키는 선수들이 있었고 동시대에 뛰었던 선수들 중에 기행을 일삼았던 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당장 같은 포지션인 와이드 리시버만 놓고 봐도 랜디 모스 역시 미디어와 관계가 좋지 않았고, 채드 '오초싱코' 존슨 역시 온갖 기발한 터치다운 셀레브레이션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곤 했다.
하지만 터렐 오웬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라커룸내 분열을 일으키는 선수였다는 점에 있다. 포티나이너스 시절의 제프 가르시아와의 다툼, 이글스 시절 도노반 맥냅과의 다툼은 당시 NFL을 시청하던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다. 특히 후자의 경우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현지에서는 '이혼(Divorce)'라고 칭할 정도로 극적인 전개가 이루어졌던 사건이다.
댈러스 카우보이스에 가서도 자살 소동을 일으키거나 그 유명한 'That's my quarterback' 인터뷰를 한 다음 시즌 바로 카우보이스의 오펜스와 토니 로모를 비판하는 등 가는 곳마다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선수였다. 이러한 사건들의 주요 골자는 나는 잘하는데 왜 너희는 못하니 혹은 내가 이렇게 잘하는데 왜 나를 중심으로 공격전술을 짜지 않니였고,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적인 성향으로 비판을 받았다. 말년에 신시내티 벵갈스로 이적하면서 당대 또다른 문제아였던 채드 존슨과 같은 팀을 이루게 되어 사람들은 핵폭탄이 터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으나 의외로 잘 어울리면서 조용한 시즌을 보냈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선수로써 이룬 업적이 대단했음에도 명예의 전당에서 번번이 물을 먹었고 삼수 끝에 입성하게 된다. 동시대 거의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던 랜디 모스가 첫턴에 입성한 것과 비교하면 (물론 커리어 누적 스탯이 아닌 전성기 임팩트가 보면 랜디 모스가 우위에 서긴 한다), 오웬스에게 얼마나 미운털이 박혔는지 알 수 있다.[5] 심지어 그가 삼수에서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것도 랜디 모스가 입성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로 NFL 역사에서 터렐 오웬스만큼 양분된 평가를 받는 선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 반론을 하자면 애초에 와이드 리시버가 명전에 가기 엄청 어려운 포지션이다. 오웬스 전에 시대를 풍미했던 크리스 카터 같은 경우 6년의 기다림 끝에 입성을 했으며 (모스, 오웬스가 깨기 전에 리시빙 터치 다운 2위 기록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아트 몽크도 8년을 기다리고 나서야 간신히 입성했다. 댈러스 카우보이스 전성기를 이끈 마이클 어빈이나 페이튼 매닝과 같이 콜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마빈 해리슨도 마찬가지로 3수 째에 입성했다. 라인배커, 리시버 같은 포지션에 위치한 선수라면 명전에 들기 위해서는 누적 스탯보다는 랜디 모스같이 코너백들을 산채로 씹어먹으며 다른 리시버들은 그냥 안드로 보내는 미친 전성기를 보여주는게 훨씬 더 유리하다. 랜디 모스를 포함하면 첫해에 명전 입성한 와이드 리시버들은 제리 라이스, 스티브 라전트, 레이몬드 베리, 폴 워필드, 랜스 올워스 정도로 고작 6명 밖에 없고 제리 라이스를 뺀 다른 4명은 90년대 전에 은퇴했던 한참 선배들이다. 라전트, 베리, 워필드, 올워스가 입성했던 때보다 현재가 리시버가 입성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두번의 실패를 겪은 이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사실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는지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반응은 엇갈리는 가운데 이럴거면 명예의 전당에 입성시키지 말았어야 했다는 반응이 더 많은 편이다. 이후, 터렐 오웬스는 자신의 모교인 테네시 대학교 채터누가 캠퍼스에서 단독으로 기념식을 하겠다고 했고 NFL 명예의 전당 측은 헌액식에서 터렐 오웬스의 이름을 따로 호명하기 않겠다고 선언했다. # 이 발표 이후 오웬스는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명예의 전당 선정 과정에서 실력뿐만이 아닌 외부적인 요소까지 비중을 많이 두는 것을 자신에 대한 무례함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
4. 과연 그는 나쁜 사람이었는가?
그러나 그를 위한 변호도 존재한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현역 시절 불화를 일으켰던 포티나이너스의 스티브 마리우치 감독, 이글스의 앤디 리드 감독 모두 그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사람 자체의 됨됨이가 잘못되었다고 보진 않는다. 오웬스의 선수시절 초창기를 함께했던 스티브 영의 경우도 그에 대한 첫 인상에 대해 '매우 예의바른 청년'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처음부터 그가 사고뭉치 선수였던 것은 아니다.이러한 그의 성향은 어린 시절 그가 받았던 교육과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할머니는 오웬스와 그의 형제자매들을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키웠는데, 이 때문에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기회가 적었다. 일종의 사회성 형성에 장벽이 쳐진 셈이다. 여기에 그가 11살이 되던 해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웃에 살던 가족의 아버지가 실은 자신의 친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겪은 후 타인을 신뢰하는데 문제를 겪게 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가 NFL 커리어 내내 보여줬던 '나와 동료가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태도도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누구보다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선수이다. 여타 사고뭉치들과 다르게 그는 마약, 음주 등으로 사생활에 논란이 되었던 적이 없었으며 필드 위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특히 슈퍼볼 39에서 비골이 골절된 상태에서도[6] 패스 9개를 잡으며 122 리시빙 야드를 기록하는 등 그가 보여준 투혼은 오늘까지도 이글스 팬들 사이에 회자될 정도이다.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의 퍼포먼스를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절 본인의 기록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했던 쿼터백들의 기록들이 이를 반증한다. 제프 가르시아부터 시작해서 도노반 맥냅, 토니 로모 모두 패싱야드나 패서레이팅, 터치다운 중 최소 한 부문 이상에서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사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그가 조금만 팀원들을 배려했더라면 기록적으로나 인성적으로도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경향이 크다. 그가 리그에 처음 입성했을 때의 멘토가 근면성실함의 화신이자 모범생이었던 제리 라이스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5. 여담
* 은퇴 이후 무절제한 과소비, 부동산 투자 실패 등으로 현역시절 벌었던 900억원에 가까운 재산을 몽땅 날리고 2012년 파산신청을 했다.[7] 파산 이후 젊은 선수들에게 자산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자신을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조언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재정적으론 말아먹었지만, 꾸준한 자기관리로 48살의 나이에도 현역 선수 못지 않은 몸매를 자랑하며,FCF(실내 풋볼 리그) 선수로 활약중이다. 보통 사고뭉치 리시버들이 자기관리에 실패하면서 신체능력이 하락해 은퇴하는데 이 아저씨는 은퇴하고 나서도 몸짱이다(...).
[1]
허나 전문 패널이 뽑은 NFL top 100 에서는 와이드 리시버 top 10 에 끼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다.
[2]
15,934 야드
[3]
1위는 당연히 역대 최고의 와이드 리시버인
그 분이고 3위는 카디널스의
레전드 리시버.
[4]
153개
[5]
모스 역시 현역시절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있었음에도 첫턴에 입성하였다. 이는 달리 말하면 웬만한 잡음으로는 선수의 명예의 전당행 평가가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
[6]
그 때 같이 뛰었던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웬스는 다리 하나만으로 경기를 했다고 한다.
[7]
타 스포츠 종목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많으며 그래서 연봉을 20~30년에 걸쳐 연금식으로 분할지급 받는 방식을 택하는 선수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