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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동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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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대 | ||||
야만두 오르시 | }}}}}}}}} |
<colbgcolor=#0035a9><colcolor=#fff> | |||
본명 |
타바레 라몬 바스케스 로사스 Tabaré Ramón Vázquez Ros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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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0년 1월 17일 |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
사망 | 2020년 12월 6일 (향년 80세) |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
재임기간 | 제39대 대통령 | ||
2005년 3월 1일 ~ 2010년 3월 1일 | |||
제41대 대통령 | |||
2015년 3월 1일 ~ 2020년 3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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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5a9><colcolor=#ffffff> 부모 |
<colcolor=#373a3c,#ddd>아버지 엑토르 바스케스 어머니 엘레나 로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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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마리아 오실리아도라 델가도[1] | ||
자녀 | 4명 | ||
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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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전 정치인, 대통령.2. 생애
1940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엑토르 바스케스는 우루과이 국영석유회사(ANCAP)의 직원이였다. 공화국 대학교 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종양학자로 졸업했다. 이후 1979년부터 1989년까지 CA 프로그레소의 팀 회장을 지냈다.1990년부터 1994년까지 몬테비데오 주지사직을 수행,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대선에 광역전선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콜로라도당의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후 1996년 광역전선의 당대표로 선출, 1999년 대선에 재출마했고 1차 투표에서는 승리했지만 2차 투표에서 호르헤 바트예 후보에게 패배했다.
2004년에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넘은 50.4%의 득표율을 올리며 드디어 3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임기 내내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였으며, 중도 진보적인 경제 정책을 펼쳤다. 최저임금은 2배 넘게 상승했고, 빈곤율은 30.9%에서 12.7%로 절반 넘게 감소하였으며, 실업률 또한 한자리수인 7%로 줄었다.
외교적으로 특기할 점은 아르헨티나와 펄프 공장 건설 문제로 지속적인 갈등을 벌여왔다는 것이다. 이 당시 부시에게 아르헨티나와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면 도와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또 한국을 방문한 첫 대통령으로 당시 대통령이던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9년 대선 결과 호세 무히카 후보가 승리하면서 정권 재창출의 성공하였다. 이후 2014년 대선에 재출마, 2차 투표에서 국민당의 루이스 라카예 포우 후보를 꺾으며 재선에 성공했다. 2기때도 의로보험 확대, 돌봄 시스템, 디지털 격차 해소 등 여러 복지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또 트랜스젠더법을 통과시켜 성 정체성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다만 2017년 부통령인 라울 페르난도 센딕이 법인카드 개인 사용 의혹에 사임하였고, 무엇보다도 1기와는 다르게 임기 내내 지지율이 낮았기 때문에 큰 위기를 겪었다. 결국 2019년 대선에서 야당 국민당의 루이스 라카예 포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퇴임한지 7개월만인 2020년 12월 6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1]
María Auxiliadora Delgado, 1964년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