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5px -11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3E22, #B25530 20%, #B25530 80%, #803E22);"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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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명 | 클레멘스 3세(Clemens III) | ||||||||||
세속명 | 귀베르토(Guiberto) |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파르마 | ||||||||||
사망지 | 치비타 카스텔라나 | ||||||||||
생몰년도 | 1025년 또는 1029년 ~ 1100년 9월 8일 | ||||||||||
재위기간 | 1080년 ~ 11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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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빅토르 3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에 대적한 대립교황.2. 행적
11세기 토스카나 변경주를 지배한 카노사 가문의 코레지오 분파에 속한 가문 출신으로, 출생지는 파르마다. 형제 중 한 명은 훗날 파르마 백작이 된 귀베르토였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들어간 그는 1057년 신성 로마 제국의 아그네스 황후에 의해 이탈리아 제국 상서로 선임되어 1063년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1058년 12월 6일 시에나에서 열린 교황 선거에 참여해 니콜라오 2세를 추대했다. 1059년 1월 18일 수트리 공의회에 참석하여 주교들과 교분을 나누었다.1061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사망하자, 귀베르토는 새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개혁 정책에 반감을 품은 아그네스 황후가 내세운 대립교황 호노리오 2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가 알렉산데르 2세를 지지하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아그네스 황후에 의해 제국상서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제국 궁정과 관계를 유지했지만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다가 1072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에 의해 라벤나 교구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알렉산데르 2세는 과거 자신을 반대했던 그가 라벤나 대주교로 선임되는 것을 꺼렸지만, 알렉산데르 2세의 고문이며 소아나의 추기경인 힐데브란트가 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고 귀베르토 본인도 교황에게 복종하겠다고 맹세하자 1073년 승인했다.
얼마 후 알렉산데르 2세가 사망하고 1073년 4월 29일 힐데브란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등극했다. 그는 1074년 로마에서 그레고리오 7세가 소집한 첫번째 사순절 협의회에 참석했다. 이 협의회에서 성직자의 부패를 방지하는 중요한 법률이 승인되었지만,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라 여겼다. 특히 성직매매를 벌이고 첩을 들인 성직자들을 규탄하면서, 고위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가차없이 추방하겠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여겼다. 결국 1075년 2번째 사순절 협의회 참가를 거부했고, 이때부터 그레고리오 7세를 반대하는 세력의 일원이 되었다.
이 무렵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간의 성직자 서임권 분쟁이 벌어졌다.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주교 회의를 소집한 뒤 그레고리오 7세의 해임을 결정했다. 이때 그도 여기에 가담했고, 이로 인해 1076년 사순절 협의회에서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되었다. 이에 맞서 파비아에 반 그레고리오 7세 주교 및 부제들을 불러모아 그레고리오 7세를 파문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1078년 2월 사순절 혐의회에서 귀베르토와 그의 주요 지지자였던 밀라노 대주교 테알도 다 카스틸리오네를 파문하겠다고 재차 선포했다.
이후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가 화해하면서 갈등이 종식되는 듯했지만, 1080년 그레고리오 7세가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킨 독일 귀족들을 거의 진압하던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루돌프를 독일왕으로 지지한다고 선포하자, 황제는 1080년 6월 16일 지지자들을 브레사노네에 소집하여 공의회를 소집했다. 귀베르토를 포함한 주교들은 그레고리오 7세의 퇴위를 선언했고, 하인리히 4세는 이 결의안에 서명했다. 공의회는 귀베르토를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추대했다. 그러나 그는 황제가 직접 통제하는 영토 밖에서는 인정받지 못했고, 황제의 꼭두각시로 간주되었다.
1080년 10월 14일 엘스터 강 전투에서 루돌프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반란을 종식시킨 하인리히 4세는 1081년 로마로 진격해 4년여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1084년 3월 하인리히 4세는 로마에 입성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로마 시민과 성직자들은 클레멘스 3세를 인정했고, 클레멘스 3세는 1084년 3월 24일 종려주일에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봉헌되었다. 일주일 후인 부활절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하인리히 7세에게 제관을 씌웠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와 손잡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지배자 로베르 기스카르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오자, 하인리히 4세와 클레멘스 3세는 롬바르디아로 철수했다. 1084년 5월 27일 로마에 입성한 로베르 기스카르는 로마를 사흘 동안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봉기했고, 로베르 기스카르는 민병대의 기습을 받아 죽을 뻔했다가 아들 루지에로 보르사가 구원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노르만군은 민병대를 꺾고자 로마 곳곳에 불을 질렀고, 카피톨리누스와 팔라티누스 언덕을 포함한 수많은 지역에서 성당과 궁전, 고대의 신전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기록에 따르면, 콜로세움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사이의 건물들 가운데 불타지 않은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로베르 기스카르는 신변 보호를 명분삼아 그레고리오 7세를 본거지인 살레르노로 이송시켰고, 그레고리오 7세는 살레르노에 억류되어 있다가 1085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그레고리오 7세의 지지자들은 작센의 퀘들린부르크에서 공의회를 소집해 클레멘스 3세를 비난했다. 반면 하인리히 4세의 지지자들은 마인츠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클레멘스 3세를 교황으로 지지했다. 1086년 라벤나로 돌아온 그는 로마 교회의 여러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의회를 소집해 자신을 지지하게 했다.
1086년 로마로 진군해 그레고리오 7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교황이 된 빅토르 3세를 몰아내고 라테라노 대성당에 들어갔지만, 1087년 5월 9일 빅토르 3세의 지지자들이 무력을 동원해 클레멘스 3세를 축출하고 빅토르 3세를 라테라노 대성당에 입성시켰다. 1087년 9월 16일 빅토르 3세가 몬테카시노에서 사망하자 재차 로마로 들어간 뒤 1089년 부활절에 로마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1089년 7월 3일 우르바노 2세가 로마를 장악했고, 클레멘스 3세는 티볼리로 피신했다. 1091년 친 황제파인 기벨린파가 로마에서 봉기해 우르바노 2세를 축출하고 클레멘스 3세를 로마로 재차 모셔왔다. 그러나 1094년 로마 민병대장이 우르바노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를 축출했다.
이후 하인리히 4세가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독일로 가야 했고, 클레멘스 3세의 영향력은 라벤나와 이탈리아 북부의 몇몇 지역에 국한되었다. 1099년 우르바노 2세가 사망하고 교황 파스칼 2세가 선출되자, 클레멘스 3세는 로마로 돌아가고자 알바노로 진군했지만 곧 격퇴된 뒤 치바타 카스텔라나로 피신했다가 1100년 9월 8일에 사망했다. 이후 치바타 카스텔라나 대성당에 묻힌 클레멘스 3세의 유해에서 신비한 향액이 흘러나오며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는 지역 주민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파스칼 2세는 이를 이단으로 규탄하고 그의 유해를 파낸 뒤 테베레 강에 흩뿌렸다.
클레멘스 3세의 추종자들은 그가 사망하자 테오도리코를 새 교황으로 옹립했다. 테오도리코는 파스칼 2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라테라노 대성당을 접수해 한동안 버텼지만, 1101년 로마로 돌아온 파스칼 2세의 반격으로 생포된 뒤 카바 데 티레니의 삼위일체 수도원에 보내졌다. 이에 클레멘스 3세 지지자들은 아달베르토를 새 교황으로 세워서 맞섰으나 역시 체포되어 아베르사에 있는 산 로렌초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