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5px -11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3E22, #B25530 20%, #B25530 80%, #803E22);"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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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명 | 아나클레토 2세(Anacletus II) | ||||||||||
세속명 | 피에트로 피에르레오니( Pietro Pierleoni) | ||||||||||
출생지 | 로마 | ||||||||||
사망지 | 로마 | ||||||||||
생몰년도 | ? ~ 1138년 1월 25일 | ||||||||||
재위기간 | 1130년 2월 14일 ~ 1138년 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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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 대적한 대립교황.2. 행적
로마 집정관을 역임한 피에트로 디 레오니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가 속한 피에틀레오니 가문은 본래 유대인 출신이었다가 11세기 중반에 교황 레오 9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상업과 금융 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로마 귀족 가문 사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신학 공부를 수행했다. 젊은 시기에 파리 대학교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면서 프랑스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의 강의를 받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6세가 될 루이 왕자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 또한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가서 청빈 활동에 전념했다.이후 로마로 돌아간 뒤 여러 공직을 맡았다가 1116년 교황 파스칼 2세에 의해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 성당의 부제이자 추기경으로 선임되었다. 1118년 교황 젤라시오 2세의 선거와 1119년 교황 갈리스토 2세의 선거에 잇따라 참여했다. 1120년 12월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마리아 성당의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이후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교황 특사를 맡았다. 영국 역사가 맘스베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그는 잉글랜드 특사를 맡았을 때 국왕으로부터 막대한 선물을 받고 로마로 돌아와서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124년 교황 선거 당시에는 프랑스 특사였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테오발도 보카페치 추기경을 지지했다. 선거 결과 테오발도가 당선되어 첼레스티노 2세로 즉위했지만, 즉위식이 열린 1124년 12월 15일 프란지파니 가문의 수장 로베르토 프란지파니와 무장한 무리가 수도원에 침입해 람베르토 스칸나베키를 일방적으로 교황 호노리오 2세로 추대했다. 결국 무력에서 밀린 피에틀레오니 가문은 호노리오 2세의 집권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이 일로 깊은 앙심을 품었다.
1130년 2월 호노리오 2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피에트로는 자신이 직접 교황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그는 상당한 부와 관대함, 뛰어난 학식, 풍부한 공직 경력으로 인해 많은 귀족과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추기경단 사이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의 야심을 읽은 교황청 장관 아마리 데 라 샤트르는 그가 집권하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거라 예측하고, 그의 선출을 방해하기로 했다. 아마리는 호노리오 2세가 자신이 매우 사랑하는 수도원에서 여생을 마감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산탄드레아 수도원으로 옮겼는데, 이 수도원은 프란지파네 가문의 세력권에 있었기에 피에틀레오니 가문으로부터 아마리 추기경이 교황이 사망할 경우 피에틀레오니 가문에 반대하는 인사를 세우기 위한 합의를 조직할 시간을 갖기 위해 교황을 그곳으로 옮겼다고 비난했다.
1130년 2월 11일, 아마리는 자신을 지지한다고 여긴 추기경들을 산탄드레아 수도원으로 소환했다. 이에 다른 추기경들은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교황이 죽기 전에 선거를 준비했던 8명의 추기경들을 비난하는 교령을 내렸던 것을 상기시키며 아마리의 조치를 비난했다. 2월 13일 호노리오 2세가 사망했는데 아마리가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로마 전역에 퍼지자, 성난 군중은 산탄드레아 수도원으로 달려들었다. 이에 아마리는 호노리오 2세를 발코니에 내세웠고, 주민들은 소문이 거짓임을 확인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은 호노리오 2세는 그날 밤 사망했다.
교회 규정에 따르면, 사망한 교황의 시신은 후임자가 선출되기 전에 사흘 동안 신자들에게 노출된 후 매장해야 했다. 그러나 아마리는 예배가 끝나자마자 교황의 시신을 라테라노 교회 지하실로 옮긴 뒤 16명의 추기경들을 불러모아 산탄젤로 성당의 부제이며 종교적 열정으로 유명한 추기경인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를 교황 인노첸시오 2세로 추대했다. 그들은 반발이 있을 것을 예상해 프란지파네 가문의 세력권인 산타마리아 교회로 이동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나머지 14명의 추기경은 산 마르코 성당에 모여 인노첸시오 2세의 선출은 불법이라고 규탄하고 피에트로를 교황 아나클레토 2세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두 교황 모두 물러서길 거부했고, 같은 날인 2월 23일을 축성일로 정했다.
이리하여 교황 2명이 동시에 세워진 상황에서, 아나클레토 2세는 막대한 부를 활용해 로마의 대다수 주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2월 15일 라테라노 대성당을 장악하고 2월 16일 성 베드로 대성당도 장악했다. 이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를 등졌고, 아나클레토 2세는 로마의 유일한 교황이 되었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2세는 포기하지 않고 피사, 제노바, 프랑스, 영국, 신성 로마 제국을 잇따라 돌며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성직자였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지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고, 이로 인해 유럽 각지의 성직자들은 인노첸시오 2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받들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아나클레토 2세는 시칠리아 백국의 군주 루제루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제루 2세는 자신을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대관식을 치러준다면 교황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나클레토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1130년 9월 27일 루제루 2세와 그의 후손에게 시칠리아, 아풀리아, 칼라브리아에 대한 왕권을 인정하겠다고 선포했다. 1130년 12월 25일, 아나클레토 2세의 사절인 코스마스 추기경은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루제루 2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 카푸아의 로베르토 추기경은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한편, 아나클레토 2세는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에게 그의 라이벌인 호헨슈타우펜의 콘라트 3세를 파문할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로타르 3세는 이를 무시하고 1130년 10월 뷔르츠부르크에서 16명의 독일 주교를소집한 뒤 인노첸시오 3세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루제루 2세가 시칠리아 국왕을 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탈리아 남부를 제국의 영역으로 여겼던 로타르 3세는 이에 분개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133년, 로타르 3세는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에 올리고 신성 로마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다. 그 해 4월 30일, 로타르 3세와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에 도착한 뒤 아나클레토 2세가 농성하고 있는 산탄젤로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산탄젤로 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입성하려던 계획 역시 아나클레토 2세의 추종자들이 결사적으로 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로타르 3세는 1133년 6월 4일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교회에서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제관을 썼지만, 식량과 자금이 바닥나서 원정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자 독일로 철수했다. 인노첸시오 2세 역시 황제를 따라 피사로 도주했다.
1137년, 로타르 3세는 재차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볼로냐에 입성한 뒤 군대를 둘로 나눴다. 황제 본인은 인노첸시오 2세와 함께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남하했고, 사위인 하인리히는 토스카나와 교황령을 거쳐 나폴리로 진군한 뒤 바리에서 로타르 3세와 합세하기로 했다. 로타르 3세는 신속하게 진군했고, 하인리히는 로마를 공략하는 데 실패했지만 베네벤토와 몬테 카시노를 복속시켰다.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루제루 2세는 시칠리아로 철수했고, 아나클레토 2세는 고립되었다. 1137년 5월, 로타르 3세와 하인리히의 군대가 바리에서 합세한 뒤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 가신들이 귀국을 강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가지 못했고, 1137년 8월 라눌프 2세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승격시킨 뒤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
제국군이 이탈리아를 떠난 후, 전력을 재정비한 루제루 2세는 137년 10월 반격에 착수했다. 카푸아는 시칠리아군에 재차 넘어갔고, 로베르토는 다시 도주했다.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루지에로에게 또다시 충성을 서약한 뒤 리그나노에서 반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루지에로는 나폴리를 왕실 직할지로 삼고 군대를 주둔시켜서 그곳을 확고히 통제했다. 이렇듯 로타르 3세와 루제루 2세간의 전쟁이 쉽사리 승패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 아나클레토 2세의 입지는 갈수록 약해졌다. 1136년 밀라노가 인노첸시오 2세 지지로 돌아섰고, 교회법학자인 피사의 피에트로를 포함한 다수의 지지자들이 베르나르도의 영향을 받아 인노첸시오 2세 쪽으로 돌아섰다. 심지어 1137년 11월 루제루 2세가 개최한 살레르노 공의회에서마저 다수의 성직자들이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1138년 1월 25일, 아나클레토 2세는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빅토르 4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했지만, 얼마 후 로마로 귀환한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축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