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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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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해석3. 성경적 모티프4. 다른 아포칼립스, 전체주의 비판 작품과의 비교5. 황궁아파트 세력이 몰락한 다양한 원인

1. 개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해석을 모은 문서.

각 해석은 개개인의 주관이 들어가 있고 한 상징에 대해서도 저마다 이견이 갈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 문서에 작성된 특정한 해석이 곧 정답이라고 할 수 없음을 유의할 것.

2. 해석

  • 영화의 엔딩에서 90도로 넘어진 집 내부는 수직적인 황궁아파트와 달리 수평적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발상의 전환을 의미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1]
  • 감독 엄태화는 영화의 전반적인 색채에 대해서 영화의 전반부는 파란색과 회색의 어두운 톤으로 가다가 점점 빨간색 톤으로 바뀌는데, 이 변화에서 영화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날씨가 풀리고 있다는' 것을 언급했다. 실제로 영하의 날씨라서 입김이 나오는 전반과 달리 후반부에는 아파트로 물줄기가 생기는 등 기온이 올랐음을 알려주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아파트가 항구적인 식수원을 확보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날씨가 영상의 날씨로 돌아왔음을 은연중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파트 밖으로 나간 사람들도 초반에 쫓겨난 사람들은 멀리 못 가 동사한 반면, 후반부에 나가는 인물들은 더 멀리까지 가서 정착하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따뜻한 느낌의 노란색으로 마무리했다. #
  • 황궁 아파트는 대표 한 명의 집권 아래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주의 유사 체제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2018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은 유고슬라비아가 1948년부터 1984년까지의 공산 체제 시절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며 콘크리트로 지었던 건축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 전시회 이름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향해: 유고슬라비아의 건축, 1948-1980> 이었다. # 다만 정확히 말하면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시스템이므로, 황궁아파트는 결국 생산에 실패한 사회주의 체계, 마지막에 등장한 마을은 생산능력을 갖추며 성공한 사회주의 체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 성경적 모티프

영탁의 행적은 모세 히브리인 출애굽기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 영탁의 본명은 모세범이다.
  • 영탁은 평소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한강을 넘어가서 공격을 당했을 때 지팡이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도망쳐 나오는 과정에서 이를 별 수 없이 버리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권력 또한 지팡이와 같이 증발한다. 성경에서 모세의 지팡이는 그것을 들고 있는 동안은 전쟁을 이길 수 있지만, 들지 못하고 내려놓으면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 아파트 주민들에게 "선택받았다"라고 말하는 영탁의 행동은 유대교 선민사상을 연상시킨다.
  • 영탁의 정책에 반발한 인물들의 집 문설주에 빨간색 페인트를 칠하는 부분도 성경의 레위기에서 따온 모티브(흠 없는 양의 피)로 보인다.
  • 방범대 활동이 시작되고 한동안 아파트 밖에서 높게 솟아오르던 불기둥은 혹독한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을 보호하던 불기둥과 구름 기둥 중 불기둥을 연상시킨다.
  • 식량부분에 대해서는 광야에 떠돌다가 먹은 식량인 만나로도 해석이 가능한데 이는 출애굽 당시 광야를 떠도는 도중 최소한 배고프지 않고 살게 되는 것이 흡사하다. 실제로도 식량에 대한 걱정은 정말 많이 나오는 편이나 황궁아파트가 침공당하기 전까지 배고파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영화 초반, 모세범이 소화전을 작동시키려다가 기어이 작동시키는 장면, 중반부에 흙벽에서 물이 터져 나와 주민들이 물을 담는 장면은 출애굽기에서 물이 없다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줄기를 터트린 장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 정찰대가 물이 사라진 한강을 걸어서 건너는 장면은 모세가 이끄는 히브리인들이 기적을 통해 홍해 요단강의 물을 가르고 마른 바닥을 밟고 건넜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 영탁을 구약으로, 명화를 신약으로도 볼 수 있다.
  • 더 넓게 해석하면 황궁아파트 자체를 이스라엘 자체로 볼수 있는데 이스라엘이 고대에 멸망했을 당시의 상황과 흡사하다. 아무도 못들어오게 공성전을 펼치다, 역으로 자신들도 못빠져나가게 되는 상황이 되자 되려 자신들이 멸망의 길을 가게 된 것인데, 이를 의식하듯이 작중엔 끊임없이 식인에 관련된 언급이 등장한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 당시 먹을게 없어지자 식인을 펼치게 된 것을 의식한 듯 하다.
  • 마지막에 주명화가 김민성의 시체를 끌어안고 만나는 세명의 사람들은 동방박사, 무너진 아파트로 이주한 이후 그녀가 받는 하얀 주먹밥은 성체성사의 빵인 제병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누는 대화에서 여기서 살아도 되냐고 묻는 주명화에게 누구 허락받고 살아가냐며 되묻는 장면은 외부의 배척에 대한 내용이 가득한 구약에서 보편적 사랑과 베품을 말하는 신약으로 넘어가는듯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평] ‘콘크리트 유토피아’, 우리는 영탁을 부정할 수 없다 - 송경원

4. 다른 아포칼립스, 전체주의 비판 작품과의 비교

  • 코맥 매카시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인 더 로드의 오마주로 여겨지는 부분들이 다수 있다.
    • 원작인 유쾌한 왕따에서는 지진 말고도 인위적인 재해인 핵전쟁 또한 벌어졌음을 암시한다. 반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더 로드에서 어느 날 갑자기 천재지변의 연속으로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지진에 의해 인간이 멸망한 것으로 표현한다.(재난 직전 쌍둥이 자리 유성우가 밤하늘을 수놓을 거라는 뉴스가 등장한다.) 재난 후엔 무색무취의 폐허로 변해버린 삭막한 풍경이나 사시사철 한겨울 같은 추위가 몰아치는 끔찍한 환경도 비슷하다.
    • 민성 부부의 결말 또한 영화 더 로드의 엔딩을 연상시킨다. 가족 중 보호자 역할의 남성[2]이 부상을 입은 후 밤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사망하지만, 그 가족의 남은 생존자는 다른 선의의 생존자들에 의해 구조되어 다른 곳으로 떠난다.
  • 소설 〈 파리 대왕〉과 〈 동물농장〉도 참고한 듯 보인다.
    • 파리대왕과는 기본적인 플롯 자체가 처음에는 재난 전의 문명과 사회체제에 맞추어 민주적으로 공동체를 운영하는 시늉이라도 하다가, 무력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세력[3]으로 점점 무게추가 넘어가면서 공동체가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을 공유하고 있다.
    • 김영탁이 외부세력에게서 공동체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세운 공적을 통해 자기 통치를 공고히 하는 것은 동물농장의 독재자 돼지인 '나폴레옹'의 행적과 유사하다. 이후에 완전히 독재자로 등극한 나폴레옹이 저지른 동물 대숙청처럼, 영탁도 자신의 정책에 반한 행동을 한 주민들을 솎아내 조리돌림하고 자아비판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둘 모두 독재자의 부족한 자질 때문에 외부 세력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외부인의 2차 침공을 받게 되고, 1차 침공과는 달리 큰 피해를 입는다. 그나마 외부세력을 패퇴시키는 데는 성공해 전면적인 세뇌정책과 숙청으로 겨우겨우 위기를 수습한 나폴레옹과는 달리 황궁아파트는 외부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영탁 또한 몰락한다.
  • 영화 < 설국열차>와도 유사하다. 대재해에도 안전한 실내와 동사하는 바깥, 열차 총리 메이슨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부녀회장, 아이들을 납치하는 무장병력들, 비천한 출신과 깊은 연관이 있는 1인자, 보호자를 잃고 생존한 여성, 벌레로 만든 음식, 식인이 주요 소재로 인물들의 대사에 언급되는 것 등.

5. 황궁아파트 세력이 몰락한 다양한 원인

물론 근본적으로는 너무나 큰 재난이 일어나서 한국의(혹은 그 이상의)[4] 모든 시스템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며, 혹한 때문에 밖에서의 생활도 극히 어려워서 어떤 개인도 뚜렷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우화 형식의 이야기를 통해 체제가 무너지는 원인들을 다방면으로 고찰하고 있다.
  • 명화(박보영 분)를 안 좋게 보는 관객들은 명화의 행동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명화 자체가 아파트 생활방식을 개인적인 행동으로 반발하고 무너뜨리는 역할이기 때문.
    • 그러나 명화가 룰에 반발하여 음식을 나눠주느라 피해를 입었다고 해석이 가능한 사람은 명화 본인과 남편 민성뿐이며, 아파트 전체로 보면 아파트에서 의료 기술을 통해 기여한 유일한 사람으로 보인다. 민성에게 자신의 배급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충분하다고 말하며, 번데기를 배급받을 정도로 상위 계층에 해당함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마지막에 김영탁을 모세범이라고 고발한 것도 다수결로 정해진 룰에 의거해 대표 자격이 없다고 제기한 것이다.[5]
  • 다른 측면에서는 체제가 목표로 하는 외부인 배척을 살펴볼 수 있다. 영화가 아파트 주민, 그 중에서도 방범대에 초점이 맞추어져 명확히 짚어주지는 않았으나 침입한 외부인들 중에는 쫓겨난 국회의원 보좌관 등 추방당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외부인을 거세게 내쫓으면서 성립된 체제 자체가 외부인의 방범대 습격을 불러왔고 결국 그들이 아파트로까지 이어 습격한 것이다.
    • "리셋"이 왔음을 인지하면서도, 대지진 이전의 시스템인 주택 소유 여부로 계층을 나누는 모순적 관점이 집단의 생존에 한계를 짓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대지진 이전의 사회적 질서를 껍질이나마 지키고 보호하여 구성원들을 결속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 정말 영탁이나 부녀회장이 생존주의적 전략을 펼치려 했다면 주민 중 노약자를 내보내지는 않더라도 외부인 중 생존에 도움이 될만한 기술을 지닌 사람[6] 위주로 수용했어야 했겠지만 그저 주민 여부에 집착했다. 하다못해 뚜렷한 기술을 지니고 있지는 않을 정치인이더라도 고학력자이며 사람과 조직을 다루는 데에 능숙할 것이므로 괜찮은 인력이 될 수 있음에도 거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했다.[7] 하물며 거주민에게 호의적이고 아파트에 대해 잘 알던 경비원까지 서류상의 거주자는 아니기에 외지인으로 간주하여 쫒아낸 것도 크나큰 무리수였다.
    • 물론 외부인들을 무턱대고 수용했다면 내부의 자원고갈이나 치안 문제가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일단 무정부 상태라 살인, 약탈 등의 범죄들이 일상이 되었고, 아파트 바깥이 지옥이라는 언급을 보면 이런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집단도 있는 듯하니... 그러나 외부인을 앞뒤 안 가리고 추방하여 그 문제를 해결할 다른 가능성들을 모두 없애고 적만 많이 만든 것은 잘못이다. 편이 아니더라도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어딜가나 중요하며 극단적인 상황에선 더욱 그러하다. 이렇듯 당장은 힘들더라도 어렵레나마 연합을 했더라면 좀더 조직적으로 식량을 구하러 다닐수도 있었을 뿐더러 외부의 침공도 한결 수월하게 막아낼수 있었을 것이다. 돌과 막대기가 전쟁의 무기가 된 상황에서 인구 수는 절대적인 강함을 의미한다. 애초에 인류 역사에서 인구수가 힘의 근본이었던 시기가 수천년이다. 결국 이들은 시작부터 자멸의 길을 택한 것이다.
    • 사람의 수를 조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기술에 따라 사람들 구분하여 수용하는 것에는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이는 또다른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있다. 그나마 입주민 여부로 구분하는 것은 확실한 기준하에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다.
      • 물론 이 자체는 완벽히 객관적이지는 않다. 당장 영탁 그 자신이 기준을 벗어난다.
    • 방범대 조장 임명 과정에서 자가와 대출 운운을 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점은 철저한 생존주의 아포칼립스물 이전에 아파트로 대표되는 계급사회에 대한 우화와 풍자 의도가 매우 강하게 배어 있음을 드러낸다. 즉 메시지를 위해 개연성을 일부 희생한 것이다.
  • 체제 자체의 내부 모순과 그로 인한 추방파 아파트 주민 간의 갈등도 주요 원인이다. 명화가 영탁을 고발하기 전에도 이미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집권세력이 갈라지고 대처할 병력도 남지 않았으므로, 잘 풀려도 어쩌다 습격을 한 번 막아내고는 뒤이어 뚫리거나 자멸할 만한 상황이었다.
    • 자체 생산하는 물자가 없고 수집 및 약탈에만 의존했다. 위험한 방범대로 차출 가능한 인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유지해야 할 시설과 인원은 너무 많다. 한강을 넘어서 백화점까지 걸어서 가고 수십 명이 먹을 식량을 옮겨야 하는데 체력적으로 성인 남성이라도 힘든 일이다. 거기다가 다른 피난민들과 만나서 충돌이 있을 수 있고, 식량을 옮기고 지쳤을 때 기습을 당하면 몰살당하기 쉽다. 이렇게 한강 너머까지 약탈하러 갈 동안 물자를 자체 생산하지 못한 이유로는 황궁 아파트가 폐허 이전의 문명이었기에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폐허 이전의 물자를 얻고 이용하는 습성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자기 말마따나 선택받은 주민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죽기 위해 선택받은 주민이라는 역설이 성립하게 된다.
기존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물론, 이후에 황궁 아파트를 습격하여 물자를 얻어내는 사람들 또한 결국에는 '죽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수평으로 눕힌 아파트의 주민들은 폐허에서 계단, 공공재 등의 새로운 물자들을 생산해 내는 데 성공한 것과 대조적이다.
  • 환경적으로도 장기적인 대책이 될 수 없는 약탈 경제가 유일한 선택지였다. 애초에 아파트는 산을 옆에 낀 고지대에 지어져 있고, 외부는 농경은 커녕 작은 텃밭조차 꾸릴 수 없는 콘크리트 더미로 뒤덮여 있는 상황이다. 농업에 필수적인 물조차 뒷산의 샘과 눈이 유일하기에 자급자족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설사 외부인의 침공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황궁아파트 인근에서 식량을 구해올 수 없는 한계점이 오게 되어있다. 영화 후반에 말라버린 한강까지 건너서 물자를 공수해오는 것도, 아파트 인근의 자원이 고갈된데다 아파트 주민들이 식인을 한다는 소문에 다들 일찌감치 멀리 떠나서 약탈조차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식량과 수도 공급이 배제되고, 바위투성이 황무지로 전락한 서울에 야생동물이 찾아올리는 만무하니 사냥 역시 가당치 않다. 따라서, 언젠가는 생존자들 모두가 황궁아파트뿐만 아니라 서울, 최소한 시내를 벗어나야 하는 운명이었다.
  • 또한 차등주의적 지원에 의거해, 체제의 업무를 수행하다가 다리를 다쳐 장애가 생긴 소장에게 박한 대우를 해주다 배신당한 것이 외부인이 쳐들어오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1] 또한 황궁아파트와 상반되는 모든 생존자가 아무 대가 없이 평등하게 의식주를 제공받고 다 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제목인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의미하는 곳이 황궁아파트가 아닌 바로 그곳이었음을 보여준다. [2] 더 로드에서는 아버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남편 민성. [3]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김영탁과 방범대 대원. 파리대왕에서는 사냥꾼 소년들과 그들이 새로운 두목으로서 추앙하는 잭. [4] 만약 수도권만 무너진 상태라면 남부 지방 지역 방송국이나 군부대 등이 보도와 구조를 위해 들어왔을 것이고, 한반도 전체가 붕괴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범국가급 재난에 다른 나라들이 멀쩡한 가운데 외부 개입이 전혀 없이 한반도를 철저히 방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외국에서 구조 혹은 구조까진 하지 않아도 하늘에서 헬기나 비행기를 띄워서 재난 상황을 글로벌 뉴스로 보도했을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전 지구적인 타격을 입고, 인류 문명 전체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5] 물론 상술하였듯이 명화 때문이었으면 어디까지나 부수적이어도 굳이 명화가 아니어도 내용이 전개 될수록 이미 무너질 조짐도 따로 있었다. 게다가 이미 외부인들이 아파트를 침공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으며, 침범한 규모를 봤을 때 황궁 아파트 사람들이 이들을 막아내더라도 처참한 몰락은 기정사실이었다. 심지어 이미 물자를 운송하던 중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이들은 탄약이 얼마 없는 총을 빼곤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는 상태였다. [6] 의료인, 군인, 경찰관, 소방관, 무술가, 배관공, 재봉사, 요리사, 농업인, 용접공, 토목 및 전기기사 등 [7] 게다가 아직 외부인-주민 간 갈등이 폭발하기 이전인 김영탁이 외부인들에게 단지 외부로 나가달라고 소리치는 장면에서 국회의원을 따르는 외부인들이 많았던 것을 보면 국회의원에게 주민과 외부인 간의 협상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겼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화되지는 않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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