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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6대 공 케메니 야노시 Kemény Ján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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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케메니 야노시 (Kemény János) |
|
출생 | 1607년 12월 14일 | |
트란실바니아 공국 마자르부쾨스(현재 루마니아 마로스 카운티 비치슈) | ||
사망 | 1662년 1월 23일 (향년 54세) | |
트란실바니아 공국 나지스졸로스(현재 루마니아 마로스 카운티 셀레우시) | ||
재위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 |
1661년 1월 1일 ~ 1662년 1월 23일 | ||
배우자 | 칼라이 주잔나 (1632년 결혼 / 1659년 이전 사망) | |
로냐이 언너 (1659년 결혼) | ||
자녀 | 케메니 페렌츠, 케메니 시몬 | |
아버지 | 케메니 볼디자르 | |
어머니 | 토르니 조피아 | |
종교 | 칼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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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16대 공.2. 생애
1607년 12월 14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마자르부쾨스에서 케메니 볼디자르와 토르니 조피아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케메니 가몬은 후녀디 야노시의 시종으로, 후녀디 야노시로 변장해 주인 대신 오스만 장병들에게 살해된 케메니 시몬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베틀렌 가보르와 라코치 죄르지 1세 치세 동안 다양한 정치 및 군사적 지위에 올랐다. 베틀렌 가보르 치세 동안 빈, 폴란드-리투아니아 및 오스만 제국의 대사를 맡았다. 그리고 라코치 죄르지 1세 치세 동안 페헤르 카운티의 이슈판(Ispán, 군 사령관)이자 재무관을 맡았으며, 트란실바니아 야전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637년 11월,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지시에 따라 세케이인 보병 및 기병대를 이끌고 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의 군대와 연합한 뒤, 몰다비아 보이보드 바실레 루푸를 격파하여 몰다비아에서 축출했다. 1644년 라코치 죄르지 1세가 스웨덴 왕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로 진군할 때 참여했고, 1645년 합스부르크 제국과 린츠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을 때 협약 초안 작성자 중 한 명이었다.1648년 라코치 죄르지 2세가 트란실바니아의 새 공이 된 뒤 수석 고문으로 발탁되었으며, 1653년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지시에 따라 몰다비아 공국으로 진격해 몰다비아 보이보드 바실레 루푸를 몰아내고 게오르게 슈테판을 옹립했다. 1657년 1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상대로 벌인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트란실바니아군은 귀환 도중인 1657년 7월 26일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에게 스카와트에서 급습당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케메니 야노시에게 군대를 맡긴 뒤 홀로 본토로 돌아왔지만, 트란실바니아군은 끝내 궤멸되어 25,000명 중 함께 돌아온 이는 수백 명에 불과했고, 11,000명이 생포되어 크림 반도로 끌려갔다. 케메니 야노시는 크림 칸국에서 2년간 억류 생활을 하다가 1659년 8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는 크림 칸국에 억류된 동안 자서전을 집필했다.
1660년, 국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대거 상실하고 막대한 연공을 지불하게 한 트란실바니아 공 버르처이 아코시에게 반감을 품은 트란실바니아 귀족 상당수가 케메니 야노시를 추종했다. 그 해 11월 22일, 케메니 야노시는 자신이 진정한 트란실바니아 공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에 맞서 형제인 버르처이 가슈파르에게 군대를 맡겼지만, 1660년 11월 말 외르메니예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결국 그는 저항해 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케메니 야노시와 협상한 끝에 1660년 12월 31일 의회를 소집한 뒤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퇴위를 선언했다. 케메니 야노시는 1661년 1월 1일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공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는 버르처이 아코시가 나중에 복위를 꾀할 거라 여기고, 1661년 7월 초 코즈마텔케에서 추종자인 부다이 지그몬드, 코넷 연주자 쇼베르디와 함께 처형했다. 여기에 버르처이 아코시의 또다른 형제인 버르처이 언드라시는 버르처이 아코시의 권유에 따라 포가라스 성을 케메니 야노시에게 넘겨줬지만, 1661년 5월 16일 케메니 야노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케메니 야노시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선출권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오스만 제국의 태도를 보고, 이러다가는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이 누려온 자치권이 완전히 박탈될 것을 우려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움을 받고 오스만 제국에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1661년 4월, 케메니 야노시가 이끄는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트란실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선언하고 빈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오스만 궁정은 그 해 6월 크림 칸국과 함께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고, 케메니 야노시는 이들에게 축출된 뒤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피신했다. 오스만 제국은 그를 대신해 어퍼피 미하이 1세를 새 공으로 옹립했다.
1662년 1월, 케메니 야노시는 합스부르크 장성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는 식량난에 시달리다가 클루지만 점령한 뒤 철수해 버렸고, 케메니 야노시는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다가 그해 1월 23일 세게스바르 인근 나지스졸로스에서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군과 맞붙었지만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스나다스(현재 루마니아 나데슈)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케메니 야노시는 버르처이 아코시를 살해한 일로 동시대인들에게 강한 비난을 받았고, 19세기 헝가리 역사가 실라기 산도르(Szilágyi Sándor, 1827 ~ 1899)는 1662년 1월 23일 케메니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군과 싸우다 전사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경건하고 자비로웠던 버르처이 아코시의 무고한 죽음을 갚아주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