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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杞县영어 Qi County
허난성 카이펑시의 현.
인구는 약 124만명으로, 현 치고 매우 많다.
기류 (杞柳) 버드나무가 많다. 옛 지명은 옹구 (雍丘)이다.
2. 역사
하나라 시기 왕족이 분봉된 기나라 (杞) 땅으로, 옹구 (雍丘)라 불렸다. 서주 시기인 기원전 740년 송나라의 공격으로 기나라는 옹구에서 순우 (淳于)로 천도하였고 기원전 445년 초나라에게 멸망하였다.옹구는 춘추시대에 정나라, 전국시대에 위나라가 지배했다. 진나라의 통일 후 탕군 (碭郡) 산하 옹구현(雍丘縣)이 설치되었고, 전한 시기 양국 (梁國)을 거쳐 진류군 (陳留郡)에 속하였다. 조위 시기에는 진류국 (陳留國)에 속했고, 223년 조식이 옹구왕 (雍丘王)에 봉해졌다. 227년 조식은 준의왕으로 이전되었다가 이듬해 옹구왕으로 돌아온 후 229년 동아왕으로 전임되었다.
영가의 난 후 진류국은 다시 진류군이 되었고, 후조 시기인 335년에 건창군 (建昌郡)으로 개칭하였다. 351년 동진이 수복한 후 진류군으로 환원시켰고, 358년 상실했다. 이후 전연, 전진, 후연, 후진을 거쳐 416년 동진이 재수복한 후 북진류군 (北陳留郡)에 편성했다가 420년 진류군으로 환원시켰다. 422년 북위가 일대를 정복했고, 동군 (東郡)으로 이관되었다. 528년, 옹구를 중심으로 양하군 (陽夏郡)이 설치되었고 양읍을 관장하였다.
534년 동위 건국 직후, 양하군은 진류군과 함께 양주 (梁州)에 소속되었다. 북주 시기인 578년, 양주는 변주 (汴州)로 개칭되었고 수나라 시기인 583년, 양하군이 폐지되어 변주에 직속되었다. 596년 변주의 양읍, 옹구현이 기주 (杞州)로 분리되었다. 607년, 기주가 폐지된 후 양읍과 옹구는 갈라져 각각 송주와 변주에 소속되었다. 당나라 건국 직후인 619년 (혹은 621년), 기주가 재설치되어 양읍과 함께 그에 속했다가 627년 (혹은 635년) 기주가 폐지되어 변주로 돌아갔다. 동시에 외황, 원성현이 옹구현에 병합되었다.
742년 변주는 진류군으로 개칭되었고, 756년 안록산이 일대를 점령한 후 양읍 및 옹구에 기주를 재설치했으나 이듬해 당군이 수복한 후 기존으로 환원되었다. 758년, 진류군은 다시 변주로 바뀌었다. 후량 건국 직후인 907년, 변주는 개봉부 (開封府)로 개편되었다. 후진 시기인 938년, 옹구현은 기현 (杞縣)으로 개칭되었다가 후한 대에 옹구현으로 환원되었다. 북송 시기에도 옹구현은 경기로 (京畿路) 산하 개봉부에 속했다. 금나라 시기 일대는 남경로 (南京路) 산하 개봉부에 속했다. 그리고 1162년, 금세종 완안옹의 피휘를 위해 옹구현은 재차 기현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원나라 시기에는 변량로 (汴梁路)에 속했고, 명청대에도 개봉부 관할이었다.
신해혁명 후, 1914년 기현은 개봉도 (開封道) 관할이 되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25년부터 공산당 조직이 있었다. 1928년에는 기현과 수현의 일부가 합쳐져 민권현 (民權縣)이 되었다. 1932년 하남성 제2행정독찰구에 편성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하남성 동부에는 중공의 수동군전구가 세워졌다.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기에 약 4천여 치현 청년들이 중공 하에 싸우다 전사하였다고 한다.
1948년 제12행정독찰구로 이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치현은 첸류전구 (陈留专区)에 소속되었다가 1952년 정저우전구 (郑州专区)를 거쳐 1955년 카이펑전구 (开封专区)로 이관되었다. 카이펑전구는 1969년 카이펑지구를 거쳐 1983년 카이펑시로 승격되었다.
2009년 6월, 인근 원자력 시설에서 방사능이 유출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치현 주민의 90% 가량이 타지로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