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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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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학문적 업적4. 국정교과서 편찬 성희롱 논란
4.1. 반전4.2. 기자와 짜고친 것이다?
5. 저서 및 논문6. 여담

1. 개요

대한민국 고고학자.[1] 주전공은 한국 선사 및 원사시대 복합사회(Complex Society)의 형성과 발전이다. 70~90년대에 한국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서구학계의 담론인 신진화론을 도입·소개하였고, 특히 신진화론의 발달단계 중 복합사회(Complex Society)에 해당하는 족장사회(Chiefdom)가 청동기시대 고인돌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2. 생애

1946년 9월 13일생. 1968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동대학원에서 '한국동과(韓國銅戈)에 대하여 -특히 형식분류를 중심으로 하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장광직 교수의 지도 하에 'A Study of the Yŏngsan River Valley Culture(영산강유역 문화 연구)'[2]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전남대학교 사학과 전임교수로 부임해 처음 강단에 섰고 1981년부터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자리를 옮겨 2012년까지 재직하였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이다.

3. 학문적 업적

최몽룡은 당시 서구의 최신 고고학 이론을 한국에 도입하는 데 부단히 노력하였다. 특히 그가 가장 주목하고 소개한 것은 당시 유행하던 신진화론적 발전도식이었다. 이 발전도식은 미국 인류학자인 엘만 서비스가 개발한 4단계 도식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는 인류 문명의 발전단계를 ‘무리사회(Band)-부족사회(Tribes)-족장사회(Chiefdom)-국가(State)’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최몽룡이 이 발전도식 중 주목한 것은 족장사회(Chiefdom)였다.[3] 족장사회란 사회적 계층이 제도화 되어 개인적 능력과 직접적 관계없이 각 개인의 사회적 신분이 혈통에 의하여 결정되고 혈연에 의하여 세습되는 특징을 가진 사회를 말한다(박양진 2006).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계급의 발생 파트가 이 족장사회에 해당한다. 그가 이를 주목했던 것은 이 발전단계가 민족의 형성(HW Park·K Wee 2016) 및 국가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청동기시대가 족장사회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고인돌을 축조하는데는 이를 끌기 위한 많은 인력, 이를 먹여 살리기 위한 잉여생산력 그리고 이러한 인력을 동원하고 다스리기 위한 통솔력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를 통제하고 다스리는데는 제도화된 중앙권력이 필요하며, 이러한 고인돌에는 족장(Chief)급만이 묻힐 수 있다고 보았다(최몽룡 1981).[4] 그의 이러한 학설은 고고학계에서 오랫동안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학자로서 내놓은 학문적 성과가 무엇이냐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 거릴 것이다. 아래에 제시해놓은 저서와 논문은 그 수적으로만 보면 엄청나지만, 실제 하나하나 차근차근 뜯어보면 기존에 발표했던 논문들을 두번·세번 중복 게재한 것이거나 간략한 유물 소개 또는 앞서 이야기한 외국 이론 소개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당시 한국 고고학이 갖고 있던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한국 고고학은 사실상 맹아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나온 유물/유적을 분석할 제대로 된 이론과 방법론적 틀이 없었다.[5]

학자들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전환하는 문화변동을 일제강점기(또는 제국주의)의 잔재였던 이주정복설(예를 들면 기마민족설)에 기대어 이를 설명하는데 불과했고(이성주 1995),[6] 유물 분류에 있어서도 일본에서 도입한 형식편년법을 초보적으로 적용해보거나 이 마저도 제대로 된 적용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7]
당시 이러한 사정이 말해주듯이, 그는 한국 고고학자로서 서구권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로는 1세대라고 할 수 있고,[8] 이는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한국 고고학의 발전을 위해 서구권에서 배운 그러한 이론과 방법론을 한국학계에 적극적으로 소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그러한 이론들을 실질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당시 한국 고고학의 발굴성과가 양적 수준으로 받쳐주지 못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그 외에도 다양한 복합적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는 교육자로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양성함으로써 이후 한국 고고학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할 수 있다.

  • 참고문헌
강봉원, 1998, 한국 고대 복합사회 연구에 있어서 신진화론의 적용 문제 및 '국가' 단계 사회 파악을 위한 고고학적 방법론, 한국상고사학보 28.
김정배, 1986,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학교 출판부.
박양진, 2006, 한국 지석묘사회 "족장사회론"의 비판적 검토, 한국상고사학보 14.
이성주, 1995, 제국주의시대 고고학과 잔적, 고문화 47.
최몽룡, 1981, 전남지방 지석묘 사회와 계급의 발생, 한국사연구 35.
최몽룡, 1993, 토플에 두번이나 낙방하고, 월간 샘터 24.
HW Park·K Wee, 2016, The Nationalistic Trend in South Korean Archaeology: Documenting the Development of a Unilinear Evolutionary Trajectory of a Homogeneous Korean Peoples, Archaeologies 12, pp.304-339.

4. 국정교과서 편찬 성희롱 논란

박근혜 정부 집권 당시에 역사 교과용도서의 집필진으로 초빙, 참여했었다.

고고학계에서 대표적인 원로이고 대학자인지라 후배 학자들이 함부로 할 수 없어 얼굴 마담으로 초빙했다는 말이 많았고, 본인도 치매기가 있다며 한사코 거부를 했었다. 처음부터 치매기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당초에는 수락했으나 제자들의 만류로 치매 핑계를 대며 빠지려 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2015년 11월 자택에서 제자들과의 술자리를 가졌는데, 이때 언론사 기자들이 합석하였다. 집필진에 초빙된 직후 그의 제자들이 교과서 집필을 중단하라고 강하게 권유했기 때문에, 이 술자리에서 교과서 집필에 대한 기사 소재를 찾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합석한 기자 중 조선일보 소속의 여기자에게 섹드립을 쳤다는 의혹[9]이 일어났다.

결국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성희롱 의혹을 인정하고 치매 등의 병증까지 주장하다가, 성범죄자라는 오명과 함께 국정교과서 집필진에서 굴욕적인 사퇴를 하게 되었다. 이것만 보면 학자라는 사람이 성희롱이나 날리다 몰락한 이야기 같겠지만...

4.1. 반전

거짓으로 어리석은 척하되 미친 것은 아니다.[10]
- 삼십육계 중 병전계 제 이십칠계, 가치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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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 새벽 3시 보도 직후 아침 8시에 사퇴를 선언하며

사고를 치고 불명예스럽게 떠나는 사람치곤 표정이 너무나도 밝아[11] 뒤에 있는 기자는 당황 화제가 되었다.

파일:해-맑.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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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사진이 저렇게 찍힌 것이 아니라, 정말 인터뷰 내내 표정이 순수하게 해맑다. '성추문이란 불명예를 안고 사퇴하는' 사람이 어떻게 저리 해맑은 얼굴을 지을 수 있는지 궁금한 수준이다.

사건의 흐름도 정말 놀라울 정도로 깔끔했다. 그렇다보니 처음부터 다 계획되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 11월 4일 밤: 최 교수가 기자, 제자와 동석한 술자리에서 낮은 수위의 섹드립을 날림.
  • 11월 5일: 최 교수, “국정교과서 집필진 명단 공개해야 한다” 발언.
  • 11월 6일 새벽 3시경: 성희롱 관련 조선일보 기사가 게재됨.
  • 11월 6일 아침 8시경: 최 교수, 날이 밝자마자 해맑은 미소로 국정교과서 집필진 사퇴 선언.
  • 11월 6일 아침: 최 교수, “군부가 교과서에 개입하면 그건 책이 아니다” 발언.
  • 이후 최 교수가 직접 조선일보에 방문해 해당 여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여 완전히 마무리.

인터넷상에서는 최 교수와 당시 동석한 여기자가 짜고 쳤거나, 최 교수가 의도적으로 기자 앞에서 쇼를 하고 자초지종을 말하며 사과를 한 것을 정설로 여기고 있다. 단순히 의혹만 있는 것도 아닌데 초기에 치매를 핑계로 국정교과서 참가를 거부했던 사람이 이후엔 정상적으로 연구 및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결국 처음부터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저지른 일이라는 의혹이 대중들 사이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국정교과서 참여를 피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받게된 이유는 박근혜 정부에게 찍힌 사람들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나 과학기술계 블랙리스트 같은 각종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매장당했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것은 최순실 게이트 이후였지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당시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소문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 네티즌은 “역사적으로 폭군 아래에서 몸을 사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바로 병환(치매)과 추문(성적 농담)이었다.”는 코멘트를 남겼다.[12]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최몽룡 교수가 던졌던 농담도 사실 신중히 선택된 중의적인 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랑이 끝났다’를 한 글자로 줄이면?
(나를 좀 편찬위에서) 빼.

참고로 이 과정에서 여러 주옥같은 명언을 남겼다.
(국방부가 국정교과서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하자) “군부가 개입하면 그건 책이 아니다.”
“진짜 대표는 근현대사 집필진이다. 그냥 난 ‘방패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노컷뉴스 인터뷰
경향신문에서는 이를 청와대의 국정교과서 개입을 시사했던 것이라고 해석.
“집필진 공개를 그렇게까지 꺼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관들은 내정되면 공개를 한 뒤 비위가 밝혀지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물러난다. 그런 부분들을 선용(善用)하면 좋을 것이다.”
“이념과 관계없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 귀납적으로 써야 해요. 역사학자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역사인데, 제대로 된 교과서가 나오지 않으면 후세에 비판을 받을 겁니다.”

4.2. 기자와 짜고친 것이다?

이 사건이 유명하긴 한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기자와 처음부터 짜고 친 것이라더라'라거나 '기자가 원래 제자였다더라'라는 루머도 같이 퍼져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알 수 없다.

우선 최몽룡 교수의 해명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동일 신문사의 후속보도가 없었을 뿐 아니라 성희롱을 당했다는 익명의 여기자는 정작 소송을 하지도 않았다. 합의금을 요구하거나 민사로 배상금을 청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보니 '애초에 조용히 마무리지을거라면, 왜 굳이 처음부터 시끄럽게 논란을 일으켰을까?'라는 식으로 이런 루머가 퍼지는 데 한 몫 했다.

하지만 직장내 성희롱과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이 아니라면 형사상의 처벌 대상이 아니다. 형사상 처벌 대상이 아니므로 형사 고소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금을 요구할 수 없다. 따라서 합의금 등이 없었다고 하여 '조용히 마무리지었다'라고 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덤으로, 조선일보의 사내 분위기상 '취재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앞으로의 평탄한 회사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2015년은 아직 조선일보-청와대 간 갈등이 본격화되기도 전이며, 조선일보 여기자가 국정교과서 집필진 대표에게 성희롱당했다는 기사가 새벽 3시에 온라인으로 올라왔다는 점도 이상하다'라는 주장도 있으나, 원래 지면에 실리는 모든 기사는 새벽 3시에 올라온다. 해당 기사는 지면에도 실렸고, 새벽 3시에 온라인 기사가 나온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즉 결국 민사소송을 가지 않은 이유는 형사상 처벌이 불가능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사건이 흐지부지 끝난 것도 아니고, 최 교수가 분명히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의 특이한 점이라면 아무리 그래도 이런 스캔들이 있었던 이상 성추행범 낙인이 찍히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마련인데도 거의 그러한 것이 없었다는 것 뿐.

마지막으로 ‘기자가 원래 최 교수의 제자였다더라’라는 건 아예 틀렸다. 아마도 '당시 제자들과의 술자리에 기자들이 합석한 것'이라는 말이 와전되면서 나온 루머인 듯 하다. 해당 기자는 최 교수의 학부에 재직한 적도 없다고 한다.

결론은 '기자와 짜고 친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소문이 자칫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하자.

5. 저서 및 논문

[ 저서 목록 펼치기 · 접기 ]
최몽룡, 1975, 전남고고학 지명표, 전남매일 신문사 출판국.
최몽룡, 1977, 도시의 기원, 백록출판사.
최몽룡, 1983 인류문화의 발생과 전개, 동성사.
Choi Mong-Lyong, 1984, A Study of the Yŏngsan River Valley Culture -the rise of chiefdom society and state in ancient Korea-, 동성사.
최몽룡, 1990, 고고학에의 접근, 신서원.
최몽룡, 1991, 재미있는 고고학 여행, 학연문화사.
최몽룡, 1993,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학연문화사.
최몽룡, 1997, 도시.문명.국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최몽룡, 2000, 흙과 인류, 주류성.
최몽룡, 2006, 최근의 고고학 자료로 본 한국고고학.고대사의 신연구
최몽룡, 2007, 인류문명발달사, 주류성.
최몽룡, 2008, 청동기.철기시대와 고대사회의 복원, 주류성.
최몽룡, 2008, 한국상고사연구 여적, 주류성.
최몽룡, 2011, 한국 고고학 연구의 제문제, 주류성.
최몽룡, 2013, 인류문명발달사(개정5판), 주류성.
최몽룡, 2014, 고구려와 중원문화, 주류성.
최몽룡, 2014, 한국고고학연구 -세계사속에서의 한국-, 주류성.
최몽룡, 2015, 인류문명발달사(개정6판), 주류성.
최몽룡, 2016, 한국선사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주류성.
최몽룡, 2018, 중국 고고학 -중요주제, 항목별로 본 중국 문화사 서설-, 주류성.
최몽룡, 2021, 세계 문화유산 -글로벌 문화사의 이해-, 주류성.


[ 번역, 공저, 편저 목록 펼치기 · 접기 ]
네드우달(최몽룡 譯), 1984, 신고고학의 개요, 동성사.
브라이언 페이건(최몽룡 譯), 1987, 인류의 선사시대, 을유문화사.
조나단 하스(최몽룡 譯), 1989, 원시국가의 진화, 민음사.
최몽룡 외, 1989, 韓國の考古學, 講談社.
최몽룡 외, 1991,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최몽룡 외, 1991, 한국선사고고학사, 까치.
최몽룡 외, 1993, 한강유역사, 민음사.
최몽룡 외, 1994, 러시아의 고고학, 학연문화사.
찰스 레드만(최몽룡 譯), 1995, 문명의 발생, 민음사.
콘라드 슈핀들러(최몽룡 譯), 1995, 5천년 전의 남자, 청림출판사.
최몽룡 외, 1996, 고고학과 자연과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최몽룡 외, 1997, 한국의 문화유산,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최몽룡 외, 1997, 한국고대국가형성론, 서울대학교 출판부.
최몽룡 외, 1997, 인물로 본 고고학사, 한울.
최몽룡 외, 1998, 백제를 다시 본다, 주류성.
최몽룡 외, 1998, 고고학 연구방법론, 서울대학교 출판부.
최몽룡 외, 2000, 한국지석묘 연구 이론과 방법, 주류성.
최몽룡 외, 2001, 단군, 서울대학교 출판부
최몽룡 외, 2002, 한국사1, 탐구당.
최몽룡 외, 1997, 한국사3, 탐구당.
최몽룡 외, 1997, 한국사4, 탐구당.
최몽룡 외, 2003, 시베리아 선사고고학, 주류성.
최몽룡 외 2004,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 연구, 주류성.
최몽룡 외 2005, 한성시대의 백제와 마한, 2005, 주류성.
최몽룡 외, 2007, 경기도의 고고학, 주류성.
최몽룡 외, 2008, 21세기 한국고고학1, 주류성.
최몽룡 외, 2009, 21세기 한국고고학2, 주류성.
최몽룡 외, 2010, 21세기 한국고고학3, 주류성.
최몽룡 외, 2011, 21세기 한국고고학4, 주류성.
최몽룡 외, 2012, 21세기 한국고고학5, 주류성.
최몽룡 외, 2016, 세계사속에서의 한국, 주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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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몽룡, 1967, 「전라북도 해안 일대의 선사유적(二)」, 『미술사학연구』82.
최몽룡, 1967, 「전라북도 해안 일대의 선사유적(三)」, 『미술사학연구』83.
최몽룡, 1968, 「홍성군 팔괘리 출토 마제석기류」, 『미술사학연구』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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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몽룡, 1973, 「원시채석문제에 대한 소고(小考)」, 『미술사학연구』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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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 1년 후인 2016년 11월 24일, 법원에서 국정교과서 집필진을 공개하라는 판결이 나오면서 다시 한 번 폭탄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판을 짰던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 치매가 걸렸다는 과거 주장과 달리 왕성한 학문 활동을 보이고 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2016년 10월에는 도 새로 집필하였다.
  • 굉장한 아날로그 카메라 전문가였다고 한다. #
  • 간혹 도조 히데키 뒤통수 짤방으로 유명한 오카와 슈메이에 비견되기도 한다. 물론 치매에 걸린 척을 해서 안좋은 상황을 빠져나간 것으로 여겨지고, 이후 학문 활동이 왕성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오카와 슈메이는 최몽룡과는 달리 병신 씹새였고 자신의 잘못으로 자초한 상황은 아니었다.

[1] 보통 대중들 사이에서는 사학자와 고고학자를 잘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둘은 과거를 다루는 학문인 것에서 동일할 뿐 엄연히 별개의 학문이다. 최몽룡 교수 역시 고고학계에서 원로이지 사학계에서 원로가 아니다. 다만 고고학자나 사학자는 연구 방법과 수단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인 연구 주제는 동일한 데다가 이마저도 고대사로 갈수록 서로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게다가 진짜 고고학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고고학과가 정식으로 개설되어있는 대학은 전국에서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수가 작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문화인류학이나 고고미술사와 합쳐저 있거나 사학과 내부에 고고학과 커리큘럼이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고고학자와 사학자의 구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2] 같은 제목으로 1984년 동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번역은 되지 않아 영어로 되어 있다. 또 진단학보에도 같은 제목으로 3편에 걸쳐 논문으로 제출되었다. 역시 영어이다. [3] Chiefdom은 이 외에도 '군장사회', '수장사회', '추장사회', '추방사회' 등 다양한 번역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최초의 입안자인 최몽룡의 견해를 존중하면서도 Chiefdom이 친족 또는 혈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족장사회(族長社會)가 가장 적절한 용어라고 본 강봉원(1998:8~9)의 견해에 따라 이를 따른다 [4] 이러한 신진화론적 발전도식에 대해 당시 고대사학계에서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김정배는 하와이대학교에서 수학 후 최몽룡보다 몇년 앞서 이 학설을 고대사학계에 소개하였는데, 그는 Chiefdom을 '군장사회'로 번역하고 최몽룡과 달리 Chiefdom은 삼한사회(김정배 1986)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당시 이러한 논쟁 역시 고고학계의 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5] 그가 최연소로 전남대 교수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안 있어 미국으로 유학을 간 것은 당시 전남지방에서 출토했던 유물들을 해석할 이론적 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최몽룡 1993:111). [6] 당시 주류를 이루고, 지금도 인터넷에 떠도는 민족교체설이 대표적이다. 모든 문화변동의 원인을 외부민족 특히 만주나 시베리아의 북방 민족들이 한반도를 침략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다른 사례이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인터넷에서 보는 ‘신라 흉노인설’도 이와 유사한 주장이다. [7] 예를 들면 당시 고인돌의 형식분류는 분류를 위한 분류에 불과했다. 고고학에서 형식분류는 공간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편년상으로든 그 의미를 가지는 속성들을 파악하여 분류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고인돌의 상부구조(우리가 잘 아는 탁자식, 기반식, 개석식)를 나눈 후 그 하위분류로서 하부구조를 많게는 십여개 이상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못하였다. [8] 서울대학교에 재직하던 김원용의 제자로서 해외 유학, 주제별 연구를 한 제자들이 학맥을 이루고 한국 고고학을 개척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 최몽룡은 이 중 가장 이른 시기 제자에 해당한다. [9] "사랑이 끝났다를 한 글자로 줄이면? 빼"라는 말을 했다고. [10] 원문의 해설 부분: 일부러 어리석거나 딴전을 부리는 편이, 아는 척하거나 경거망동하는 것보다 유리하다. 조용히 계략을 가다듬고 실력을 기른다. 이는 우레가 가만히 때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寧僞作不知不僞,不僞作假知妄僞/ 靜不露機,雲雷屯也. [11] 마이크로소프트 감정 분석 API인 '이모션'에 적용해보면 행복이 100%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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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실제로 구성군 이후 거의 모든 왕족들은 자신들을 숨기거나 추문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월산대군 제안대군인데, 제안대군의 경우 성종보다도 왕위계승 서열이 높았지만(선왕인 예종의 친아들) 너무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빼앗긴 뒤 성장하면서 바보로 이름을 날려 아무도 임금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를 두고 진짜 바보였는지는 아니면 숙청을 피하기 위한 연기였는지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