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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축구인 최강희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2. 클럽 경력
2.1. 프로 이전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축구만 좋아하던 아이였다. 그러다 5학년에 전학 간 서울 용두초에 축구부가 있었고 곧바로 가입하며 축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추첨을 통해 진학한 대광중엔 축구부가 없었기에 중학교 3년간 축구를 그만두고 공부만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서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공고로 진학해 우상권 감독 아래 선수 생활을 다시금 시작했다.3년의 공백은 너무 컸기에 6월에 남대문중학교로 직접 유급해 6개월간 기본기를 다진 후, 우신고로 진학했다. 우신고 장원직 감독 아래 미드필더로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고교 2학년에 명지대학교의 스카우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축구부가 좋지 못한 일로 징계를 받으며 대학 진학이 물거품됐고 축구를 그만둘 위기에 빠진다.
그때 동기 일곱 명과 한일은행 축구단 입단에 성공해 1년 반 정도 뛰다가 육군 축구단에서 복무 후 한일은행으로 복귀했다. 여기서 김호 감독을 만나 윙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실력이 만개하고 한일은행이 10년 만에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을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2.2. 포항제철 돌핀스 (1983)
프로 원년인 1983년에 한홍기 감독의 요청에 의해 포항제철 돌핀스에 임대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포항에서는 발목 부상으로 3경기 출장에 그치고 만다.2.3. 현대 호랑이 (1984~1992)
1984년 현대 호랑이 창단 멤버 |
구단의 주장도 맡았으며 1991년 은퇴할 때까지 현대 호랑이에서 뛰었다.
대우 로얄즈 선수와 경합을 하고 있다. |
선수 시절에 강인한 체력으로 필드를 누비던 그는 이른바 스태미나의 화신으로 추앙을 받았다. 강인한 체력으로 필드를 누비며 '스태미너의 화신'으로 불렸다.[1] 그리고 뛰어난 활약으로 1985년 아디다스컵을 들어올렸다.
개인 수상으로는 1986년 K리그 리그컵에 해당하는 프로축구선수권대회 MVP를 받았다.[2] 특히 한일은행 시절 은사인 김호 감독이 1988년에 부임한 뒤로는 팀의 주장을 역임하며 1985년, 1986년 1988년 수비수로서 세 차례 베스트일레븐, 1991년에 미드필더로서 한 차례 베스트일레븐을 지내는 등 총 네 차례 베스트일레븐을 수상했다.
1991년 현대 선수 시절 |
1991년 현대 호랑이의 감독으로 취임한 차범근과 갈등을 빚었고, 1992년을 마지막으로 팀이 젊은 선수 위주의 세대교체를 단행하면서 현역에서 은퇴했다.[3]
현대에서만 프로 통산 202경기 10득점 22도움을 기록하며 여전히 현대 호랑이의 레전드로 남아 있다.
3. 국가대표 경력
1988 서울 올림픽 대표팀 |
1988년 카타르 아시안컵 대표팀 |
1989년 한일 정기전 |
신문에서 1990년 월드컵 대표로 소개되는 최강희 선수 |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선수단이 이회택 감독에게 전술 지시를 받고 있다. |
대표팀에서 훈련 중인 모습 |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황선홍 선수의 골에 기뻐하고 있다. |
김포국제공항에서 이탈리아로 출국하는 선수단 |
이탈리아 월드컵 벨기에전 선발 라인업 |
벨기에전, 헤딩 클리어를 하고 있다. |
이탈리아 월드컵 스페인전 |
홍명보 선수와 수비벽을 쌓고 있다. |
황보관 선수의 골에 기뻐하고 있다. |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7세이던 1986년에 리그컵격인 프로축구선수권대회 MVP로 선정되고 28세이던 1987년에 1988 서울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면서부터였다. 이후 1989년 한일 정기전 등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되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어 1990 월드컵 24강 본선 조별 리그 세 경기에 모두 풀타임 출장했다.
[1]
K리그 최다 출전 대기록을 세운
김병지가 선정한 베스트 일레븐에 우측 풀백으로 선정되었다. 김병지는 최강희의 선수 시절을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화신. 영리한 경기 운영이 돋보인다."고 설명했다.
[2]
이전에는 K리그 최초의 수비수 MVP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리그컵에 해당하는 프로축구선수권대회의 MVP였고 리그 MVP는 이흥실 단독 수상이었다. 이는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여러 사이트에서 프로축구선수권대회와 당시 K리그의 명칭이었던 축구대제전을 혼동하여 공동 MVP로 오기한 것이다.
[3]
본래는 1994년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독일식 선수단 관리 체계를 적용하려는
차범근 감독과 주장 최강희 사이에 갈등이 생겨 일찍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고 한다. 최근까지 서로 감정이 담긴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2015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차두리 선수가 강력하게 의지를 피력하며 팀최강희의 선수가 되고, 최강희 감독의 어깨를 주무르며 팀최강희 주장이 되는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아버지 세대의 앙금을 어느 정도 봉합하는 모양새다. 여담으로, 차범근 감독이 취임한 1991년 최강희는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해 리그와 리그컵을 포함해 총 37경기에서 5득점 4도움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