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4-18 16:35:20

천사일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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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1. 개요

天使一路日記. 조선 중기의 문신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1537년( 중종 32)에 중국 사신들을 영접하며 그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긴 일기. 현재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1537년(중종 32) 2월 20일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龔用卿), 오희맹(吳希孟) 등이 조선에 왔을 때 원접사(遠接使)로 임명된 정사룡(鄭士龍)이 의주(義州)에서 이들을 처음 맞이한 후 한성(漢城)의 왕궁에 도착하기까지 있었던 매일의 일들과, 한양에서 사신으로서의 일을 모두 마친 후 이 일행을 요동(遼東)으로 전송(餞送)하기까지까지의 모든 일들을 기록하여 남긴 일기이다.

1972년에 조선 건국 초기에 만들어진 대명률 목판, 효종 대의 문신 허목이 남긴 친필 월령고증, 숙종 대의 문신 신유한의 일본 기행록 청천집, 진본 유한당사시언행록 등과 함께 이 일기가 발견되었다. 매일경제(1972.07.18) : 대구서 법전 대명률 목판본 발견, 다른 희귀한 책들도

이 일기를 남긴 정사룡(1491~1570)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이다. 창원도호부사 정광보(鄭光輔)의 아들이고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로서 1491년(성종 22)에 태어났다. 19세가 되던 1509년(중종 4)에 별시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였다.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1516년 황해도 도사(都事)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으며 사간(司諫)을 거쳐 1523년에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34년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에 명나라의 사신 공용경(龔用卿), 오희맹(吳希孟) 등이 조선에 올 때 원접사가 되어 이들을 맞이하여 내내 동행하였다. 이 일기는 당시의 기록이다. 1542년 예조판서로 승진이 되고, 1544년 공조판서로 다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4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1558년 과거의 시험문제를 응시자 신사헌(愼思獻)에게 누설하여 파직되었다. 이해 판중추부사로 복직되고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562년 다시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1570년(선조 3)에 졸하였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동안 중국인과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 현재 남아있는 저서로 중국에 다녀와서 지은 조천록(朝天錄)이 있고, 그 외에 호음잡고(湖陰雜稿) 등이 있다. 친필 글씨로는 광주(廣州)에 있는 이둔촌비(李遁村碑)가 있다

당시 명나라 사신 공용경 등은 명나라의 황태자 탄생을 알리고자 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왔으며, 2월 20일 의순관(義順館, 의주義州)에서부터 21일 소곶관(所串館), 양책관(良策館, 용천龍泉), 23일 동림성(東林省), 거련관(車輦館, 철산鐵山), 임반관(林畔館, 선천宣川), 운흥관(雲興館, 곽산郭山), 25일 납청정(納淸亭, 정주定州), 가평관(嘉平館, 가산嘉山), 26일 안흥관(安興館, 정주定州), 28일 운암원(雲巖院, 안주安州), 숙령관(肅寧館, 숙천肅川), 안정관(安定館, 순안順安), 29일 부산원(斧山院), 30일 대동강루(大同江樓, 평양平壤), 생양관(生陽館, 중화中和), 3월 1일 저복원(貯福院, 황주黃州), 2일 어초천(於草川), 극성원(棘城院), 사리원(沙里院, 봉산鳳山), 3일 검수관(劍水館), 4일 안성관(安城館, 평산平山), 5일 금암관(金巖館), 흥의관(興義館, 우봉牛峯), 6일 금교관(金郊館, 강음江陰), 영빈관(迎賓館, 개성開城), 8일 벽제관(碧蹄館, 고양高陽), 10일 홍제원(洪濟院, 한성漢城), 태평관(太平館), 모화관(慕華館)으로 이동하며 그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과 경관을 모두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들과의 우리나라 건국(建國), 세계(世系), 역년(歷年), 문물(文物)에 대한 문답, 판상(板上)의 시문과 게시된 그림, 정자의 제액
(題額) 등에 대한 이야기, 명나라 사신의 평양 기자묘(箕子墓) 참배와 단군묘(檀君墓) 읍례(揖禮), 평산부(平山府) 자수산(慈秀山)에 있는 동월(董越)의 비석이 마모된 데에 대한 중국 사신의 질책, 역관, 의원에게 대학의 서문(序文)과 대문(大文)을 배강(背講)하게 한 후 주찬(酒饌)을 내린 일, 과거(科擧) 식년시(式年試)와 별시(別試)에 대한 문답, 음직(蔭職)에 대한 문답, 연회(宴會) 때 여악(女樂)을 사용한 일, 환관(宦官)에 대한 문답, 중국 서적에 대한 문답, 정자(亭子)의 제명(題名)과 개액(改額), 효녀 정려(旌閭), 경기도 마전군(麻田郡, 연천군漣川郡) 숭의전(崇義殿)에서 벌인 고려 태조 왕건(王建) 향사(享祀)에 대하여 전 왕조의 제를 잇는 모습이 아름답다 한 내용 등 당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일기로 기록하였다.

그 내용이 너무나도 상세하여 사신 일행이 고양(高陽)의 벽제관(碧蹄館)에 잠시 유람왔을 때 한 선비가 지은 절구(絶句)까지 모두 기록해놓았다.
溪水灣灣柳色新 : 시냇물 굽이굽이 버들 빛 새로운데
驅車鎭日逐紅塵 : 수레는 진종일 홍진을 쫓아가네.
天涯何事猶奔走 : 하늘 끝에 무슨 일 있어 아직도 분주한지
語燕流鶯笑殺人 : 지저귀는 제비, 우는 꾀꼬리가 사람을 비웃네.
山色濛濛晝已昏 : 산 빛 어둑하니 낮인데도 침침하고
叢林深處鵲聲喧 : 사찰 깊은 곳에는 까치소리 시끄럽네.
海潮似是春山雨 : 설법 소리(海潮音)가 봄 산에 비 뿌리니
小浦平添過水痕 : 작은 포구에 보태어 지나간 물 흔적 있네.

책의 끝에는 두 사신 일행이 이듬해에 중국으로 돌아가며 정사룡에게 선물로 준 유별시(留別詩)와 성사승람(星槎勝覽), 교사주의(郊祀奏議), 시정주의(時政奏議) 등의 글들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1537년, 약 1년간 한 문신이 외교일을 전담하며 기록한 사신일기로, 국내에 남아 있는 최초의 원접사 기록물이다. 60년 뒤에 율곡 이이(李珥)가 기록한 율곡선생원접사시일기(栗谷先生遠接使時日記)와 함께 조선 초중기의 원접사 임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일기류 기록물이다. 또한 이 당시 명나라 사신일행에 대한 기록으로 정사룡 일행에 상사(上使)로 참가한 공용경(龔用卿) 쓴 사조선록(使朝鮮錄)과 중종의 명으로 1537년에 간행한 황화집(皇華集)도 남아 있으며, 이런 여러 기록물들을 통해 1537년 명나라 사신 원접 사건과 한중 외교 상황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연구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