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3:50:16

창문세

Window Tax

1. 개요2. 역사3. 기타

1. 개요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조세 제도 중 하나.

말 그대로 창문을 가지고 세금을 매기는 제도를 뜻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이런 게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 만하겠지만 정말로 있었다. 당시 중세 유럽에는 난로세, 장갑세, 모자세, 수염세, 벽지세 등 지금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별의별 황당한 조세 정책이 있었는데, 창문세가 그중 으뜸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뭐하러 이런 이상한 수단을 사용하나 싶겠지만, 당연히 이유가 있다. 지금처럼 개개인의 재산이 전산망을 통해 낱낱히 추적되는 시대에도 '밭에 현금을 묻는' 등의 조세회피를 하는데, 과거에는 개인이 얼마나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 재산이 얼마나 늘거나 줄었는지 알아내기가 매우 힘들었다. 농민, 어민들이야 산출물의 비율이라는 원칙을 세워두고 그것을 기준으로 징수할수 있어도 상인이나 귀족 같이 복잡한 수익구조와 분산된 재산을 가진 자들의 재산증감을 추적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사치품의 소유를 검사해 징세하거나, 상류층으로서의 생활을 하기 위한 자기관리를 추적하는 등의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일종의 재산세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창문세 역시 행정력으로 비교적 명확하게 추적 가능한 대상인 부동산의 가치를 산정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특수한 세금들은 그 특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민 보편적인 전통적인 세금이 아니라 중산층 이상에게서 징수를 하려는 목적이 강했고, 때문에 보통 행정부나 왕가의 필요에 의해 유동적으로 신설되었다.

2. 역사

흔히 창문세의 원조가 영국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1303년 프랑스 왕국 필리프 4세가 왕권 강화 차원에서 고안된 여러 세원들 중 하나였다. 그 당시는 아주 잠깐 시행했다가 곧바로 폐지됐지만 나중에 군자금 확보를 위해 다시 시행된 바 있고 다른 여러 나라로도 퍼져나갔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696년 영국에서 시행된 창문세였다. 그 전에 집에 있는 난로를 가지고 세금을 매기는 난로세가 시행된 바 있는데 난로세는 1662년 찰스 2세가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난로 1개당 2실링씩 과세했다. 문제는 이게 소득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데다가 징수를 위해서는 징수원이 직접 집으로 들어가서 난로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반발이 심했다. 이에 윌리엄 3세가 난로세를 대체할 방법을 고심하다가 나온 게 바로 난로세를 폐지하고 창문세를 도입한 것. 당시에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유리의 대량생산은 무리였고 자연히 유리가 귀했다. 그래서 유리창은 곧 부유함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창문은 밖에서 세면 되니까 난로세와는 달리 징수원이 일일이 집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창문세는 유리창의 숫자에 따라 매겼는데, 창문세가 처음 도입되었던 1696년에는 모든 주택이 2실링씩, 창문 10개-20개의 주택은 추가 4실링, 21개 이상의 주택은 추가 8실링을 부과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1]. 그 이후 여러 차례 세율 및 구간이 조정되었고, 1766년부터 1825년까지는 여섯 개까지는 면세, 일곱 개부터 차등적으로 세금을 매겼다. 창문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금폭탄을 맞게 되는 꼴이라, 이에 사람들은 세금을 덜 내기 위해서 창문을 합판 등으로 가려서 숨기거나 아예 창문을 막아 창문의 숫자를 줄이는 꼼수를 쓰기에 이른다.[2] 이 창문세는 1851년 주택세의 도입으로 폐지되기 전까지 무려 150년 가까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영국의 중세 건물은 창문이 있어야 할 곳 몇 군데가 막혀 있는 채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창문세를 시행하던 시기 런던에서는 창문을 막아 놓느라 햇빛을 못 보고 캄캄하게 살아서 우울증을 호소하는 시민들이 많았고 또 각종 병균이 창궐하여 전염병이 만연하였는데,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이 창문을 막고 살다 보니 일조량이 부족하고 습도가 높아져서 병균의 온상이 된 탓에 전염병이 만연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다른 방식으로 창문세를 매겼는데, 그건 바로 창문의 수가 아닌 창문의 '폭'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었다. 당시의 미비한 건축기술로는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벽에 큰 구멍을 뚫고 창문을 내는 일이 어려웠고, 자연히 창문이 넓을수록 부유한 집이라는 점에서 착안하였던 것.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창문의 폭을 줄여서 출입문이라고 우겼고 폭을 좁게 낸 창문이 많은 건물들이 많아졌다. 프랑스식 건물 하면 흔히 떠올리는 '폭 좁은 창문'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 참고로 세금 문제로 터진걸로 잘 알려진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창문세는 사라지지 않았고 1926년에 폐지된다.

비슷한 시기 네덜란드에서도 창문세와 비슷한 과세 제도가 있었다. 어떻게 했냐 하면 부유한 사람은 넓은 집에 살 것이라는 판단 하에 집이 넓을수록 많은 세금을 매겼다. 그런데 그 기준이라는 것이 '도로에 면한 건물의 너비'였다. 그래서 세금을 한 푼이라도 덜 내고자 집을 높고 길게 지어 총면적은 유지하면서 과세의 기준이 되는 너비는 최대한 좁게 만든 기형적인 구조의 가옥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에서는 건물 너비 외에도 커튼,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의 수에도 세금을 매긴 바 있다고 언급한다. 다만 이 제도는 대도시에서만 적용되었으며, 현재는 폐지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도시 한정으로 도시내의 주택들에 대해 프랑스식인 창문의 폭과 네덜란드식인 도로에 닿은 건물 면적에 비례해 세금을 거뒀다. 덕분에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니예나 현재 오스만 제국에서 부유한 도시들 이던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구시가지, 알바니아의 베라트(Berat),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등에 남아있는 오스만 제국 시절의 주택들을 보면 1층은 좁은데, 2층, 3층을 아랫층이 버틸 수 있을만큼 확장을 시켜서 밑에서 볼때 역계단꼴인 집 구조를 볼 수 있다(...).

3. 기타

Warhammer(구판)의 진영인 제국(Warhammer)에서 창문세를 걷는 것이 고트렉과 펠릭스 시리즈에서 묘사되는데, 1990년대 대처의 인두세 부활 및 중세 영국, 프랑스의 창문세의 패러디로 추정된다. 설정상 창문세 시위를 카를 프란츠가 무력진압했는데, 이 영향을 받아서인지 햄탈워에서는 애완인간과 함께 카를 프란츠의 별명으로도 쓰이고 있다.


[1] Glantz, Andrew E. "A Tax on Light and Air: Impact of the Window Duty on Tax Administration and Architecture, 1696-1851." Penn History Review 15.2 (2008): 3. [2] 옛날에는 유리는 생산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여서 큰 하나의 판으로 된 유리를 생산하기 어려웠었다. 창문 트게 하는 건 안됐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