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채선 陳彩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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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 1842년( 헌종 8) ~ ?[1] |
고향 | 전라북도 고창군 |
본관 | 여양 진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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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사실 정확히 알려져있는 인물은 아니다.[2] 알려진 바로는, 고창의 관기(기생)었다고 한다. 관기였던 진채선은 조선 후기 신분 제도가 약해진 때에 스승 신재효의 동리정사[3]에 들어가게 되며 소리를 배운다. 일종의 도제라고 이해하면 편하다.
이 후 스승이었던 신재효, 김세종과 함께 한양에서 열린 소리 대회였던 낙성연에 참여하여 장원을 거둔다. 이 때 불렀다고 알려진 노래는 춘향가, 방아타령, 성조가 이다. 여담으로 이 공연때는 남장을 하고 소리를 했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흥선 대원군의 눈에 들어 대령기생에 임명된다. 운현궁의 음악을 담당하는, 즉 궁녀가 된 것. 이 후 6년동안 운현궁에 머물고 1873년에 대원군이 실각하자 운현궁을 떠나 자취를 감추었다.
2. 여러가지 추측
워낙에 알려진 바가 잘 없는 인물이다보니, 여러 추측들이 많다. 사실 진채선의 이야기라고 알려진 이야기들이 거의 추측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나 스승인 신재효와의 관계나 대원군 실각 이후의 행적이 그렇다.더불어 진채선의 사진이라고 올라온 사진 역시 다른 사람의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1873년 이후에 사라진 사람이 버젓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적어도 사진 촬영기록이 남아있을 것인데 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개항기 조선에서의 사진 촬영은 적어도 1880년 이후에나 조금씩 활성화되었는데 진채선 같은 여류 예술가가 자신의 얼굴사진을 찍으려면 더 이후에 사진에 대한 개념이 널리 확산된 대한제국 시기 혹은 일제강점기 초기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1873년 흥선대원군 실각이후 사라진 사람의 사진이 존재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 사실이다. 강화도 조약 조차 1876년의 일이었다.
즉 현재 진채선의 사진은 그 출처가 명확히 파악되어야 진채선의 후반 인생도 고증될 수 있을 것이다.
2.1. 신재효와의 관계?
스물 네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돌아오니 귀경가세 귀경가세 도리화 귀경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흼도 흴샤 오얏꽃이 꽃 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고. 웃음 웃고 말을 하니 수렴궁의 해어환가 해어화 거동 보소 아리답고 고을시고 찬란하고 황홀하니 채색채자 분명하다 도세장연 기이한일 신선선자 그 아닌가 |
신재효가 진채선을 그리며 지었다고 알려진 단가, 도리화가이다. 신재효가 이것을 지을 시점에는 이미 진채선이 대령기생에 임명된 이후라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단가의 내용이 제자와 스승간의 노래라고만 보기에는 미묘해서 둘이 연인 관계가 아니었을까하는 추측이 많다. 아내를 세번이나 잃은 신재효에게 진채선이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라는 것. 사실 저 마지막 두 줄만 봐도 확실히 신재효에게 진채선은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다. 참고로 신재효와 진채선은 30살 차이다.
3. 대중 매체에서의 진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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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선 대원군의 실각 이후에는 기록이 없다.
[2]
신분부터 설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생의 딸이라는 설, 또 다른 설은 무당의 딸이었다는 설이다.
[3]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을 전문적으로 키워내던 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