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6 16:47:23

진무(백제)

관등 병관좌평(兵官佐平)
직위 좌장(左將)
성씨 진(眞)
이름 무(武)
생몰연도 ? ~ ?
1. 개요2. 생애
2.1. 좌장이 되다2.2. 고구려와의 전쟁2.3. 말년
3. 평가4.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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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 아신왕 대의 군인, 대신.

진무는 백제의 장군으로,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인 진(眞)씨 출신의 귀족이었다. 또한 아신왕의 외삼촌으로써 유력한 외척이기도 하였다.[1]

삼국사기의 아신왕본기에 진무에 대한 기록이 유난히 많이 남은 것으로 보아 아신왕의 심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 생애

2.1. 좌장이 되다

백제의 아신왕은 392년 말에 진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아신왕은 이듬해인 393년 정월에 동명묘를 배알한 후에 외삼촌인 진무를 좌장(左將)으로 삼아 군사 업무를 맡겼다. 좌장이란 곧 백제군에서 병관좌평에 다음가는 지위로, 병마의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위 군인이라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아신왕본기에 따르면 진무는 그 성품이 침착하고 용기가 있으면서도 뛰어난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진무는 능력과 성품이 훌륭하거니와 사람들 사이에서 인망도 있었고, 이 때문에 아신왕은 진무를 무척 신뢰했던 것 같다.

한편 최근에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라 아신왕이 숙부인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설이 대두하고 있는데, 아신왕이 즉위한 이후 군사업무를 총괄하게 된 진무 역시 이 일에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당시 백제의 왕비족으로 큰 권세를 누리고 있던 가문이 바로 진씨 가문이었는데, 진씨 가문의 일원인 진무가 아신왕의 즉위 이후에 좌장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진씨 가문도 곧 아신왕이 일으킨 정변에 동참했다는 뜻이 되기에 진무가 좌장이 된 일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2. 고구려와의 전쟁

393년 8월에 아신왕은 작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빼앗아간 관미성, 석현성 등 5성을 탈환하기 위해 진무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구려 남쪽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진무는 선봉이 되어 용감히 싸우며 날아드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관미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백제군의 공격을 막았고 곧 보급로가 끊겼으므로 진무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이에 대해 그저 장수를 보내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었다고 기록하였다고 간략히 기록했을 뿐이다. 아마도 진사왕 때에 빼앗은 교통로를 이용해 진무가 이끄는 백제군의 보급로를 공격해 끊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진무의 공격에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때 진무의 공격이 제법 강력했던 것 같다.

395년 8월에 아신왕은 좌장 진무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친히 7천 군사를 이끌고 패수에서 진을 치고 막으므로 백제군은 크게 패하여 8천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해 11월에 아신왕은 이에 복수하고자 친히 7천 군사를 이끌고 청목령으로 진격했으나 큰 눈이 내려 동사하는 병사들이 속출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결국 이듬해인 396년에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백제의 수도를 포위하고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은 후에 그 아우와 대신 10명을 잡아가는 등의 굴욕을 당하였다. 이 일은 비록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그 기록이 발견됨으로써 아신왕과 진무에게 큰 망신거리가 되었다.

2.3. 말년

398년 2월에 아신왕은 좌장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아 군사업무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그 대신에 사두로 하여금 좌장 직위를 맡게 하였다. 진무는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위가 좌평까지 오른 것을 보면 그가 아신왕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 일이 진무에 대한 아신왕의 불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진무가 번번히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자 아신왕이 진무를 좌평으로 임명해서 일선에서 밀어내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아 군사 통솔권을 맡겼다는 것이다.

이후 진무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407년에 아신왕의 뒤를 이은 전지왕 해구(解丘)를 새로 병관좌평으로 삼은 것을 보면 그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지왕이 해씨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그들을 왕비족으로 삼은 것을 보면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했던 진씨 가문이 오히려 광개토대왕에게 연전연패함에 따라 그 주도권이 점차 해씨 가문으로 넘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평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 성품이 침착하고 용맹하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하니 그 능력과 인품 만큼은 출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름 명장이라 불릴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운도 없는 것이 하필이면 당시 백제의 상대는 한국사 최고의 정복군주였던 광개토대왕이였다. 늘 패배하는 기록만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진무가 모셨던 아신왕 또한 그 출생과 능력이 비범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작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는 허구한날 고구려에 발리는 기록만 남아있으니 어찌보면 자신의 주군과 비슷한 운명을 걸었던 것 같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진무가 삼국사기 아신왕본기에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보니 광개토대왕을 주인공으로 다룬 여러 매체에서는 백제측의 비중있는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맣다.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 광개토태왕에서는 배우 정의갑이 연기하였다. 본작에서도 아신왕의 심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70화에서 고구려의 함정에 빠진 아신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고 고구려 장수인 황회와 격전을 벌인 끝에 장렬히 전사하는 등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허나 상술했듯 진무는 아신왕이 고구려에게 항복하는 396년[2]이후에도 활동한 기록이 있어 역사왜곡이다. 덤으로 황회는 가상인물.

[1] 삼국사기에서는 진무를 아신왕의 친구(親舅)라고 기록하였으나 삼국사절요에서는 명확하게 외숙(外叔)이라고 써져 있다. [2] 70화는 아신왕이 항복하기 직전 에피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