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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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
지노 카펠로 Gino Cappel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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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0년 6월 2일 | |
이탈리아 왕국 파도바 | ||
사망 | 1990년 3월 28일 (향년 69세)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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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센터 포워드 | |
신체조건 | 180cm | 70kg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
칼초 파도바 (1938~1940) AC 밀란 (1940~1943) 칼초 파도바 (1944) 볼로냐 FC 1909 (1945~1956) 노바라 칼초 (1956~1958) C.R.A.L 트란비에리 (1958~1960) |
국가대표 | 11경기 3골 ( 이탈리아 / 1949~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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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고향팀 칼초 파도바의 유스팀에서 성장한 카펠로는 1938년에 프로 무대에 데뷔했고 1940년까지 파도바에서 뛰었다.카펠로는 1940년부터 세리에 A의 AC 밀란에서 3시즌을 뛰었지만 당시의 밀란은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카펠로는 3시즌간 74경기에 출전, 39골을 넣었다.
1942-43 시즌이 끝나고 세리에 A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중단되었고 이 시기에 카펠로는 잠시 파도바에 돌아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카펠로는 자신의 전성기를 보낼 볼로냐 FC 1909로 이적했고 11시즌동안 245경기 출전, 80골을 기록했다. 당시 볼로냐도 우승권과는 거리가 있었고 1954-55 시즌의 4위가 카펠로가 볼로냐에서 거둔 최고의 순위였다.
카펠로는 세리에 B로 막 강등된 노바라 칼초와 C.R.A.L 트란비에리에서 2시즌씩을 더 뛰고 1960년에 은퇴했다.
2.1.2. 국가대표
카펠로는 1949년 5월 22일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전에서 이탈리아 대표팀 데뷔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는 수페르가의 비극 이후 처음 치르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경기였고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3:1로 눌렀다.카펠로는 1950년 월드컵의 2경기에 모두 주전 센터 포워드로 뛰었지만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다. 카펠로는 1954년 월드컵에도 참가했고 벨기에전에 출전했다. 1954년 월드컵이 카펠로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였다.
2.2. 이후
카펠로는 1990년에 집에서 넘어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카펠로는 어린 시절부터 최고의 기술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기량을 발전시켜 결국 페이크를 섞은 볼 컨트롤, 일정하지 않은 템포로 당대 최고급의 기술을 가진 창의적인 포워드가 되었다.카펠로의 주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였지만 공격 포지션이라면 어느 곳이든 뛸 수 있었다. 그는 완전히 경기에서 사라져 있는듯 하다가 갑자기 나타나 원터치로 결정적인 슈팅이나 어시스트를 올리는 스타일의 포워드였다.
그러나 카펠로는 성격 절제가 잘 안 되는 단점이 있었다. 1948년에는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서, 1952년에는 심판 폭행으로 선수 자격 영구 박탈의 중징계를 당했다. 1948년의 징계는 1달 만에 풀렸지만 1952년의 징계는 1953년에 와서 조사를 거쳐 1년으로 경감되었다.
4. 수상
4.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