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1880년대의 독일 제국군/북독일 연방의 장성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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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제국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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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보병대장 지그문트 폰 프랑크 Siegmund von Pranck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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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Siegmund Freiherr von Pranckh 지그문트 폰 프랑크 남작[1] |
출생 | 1821년 7월 16일 |
바이에른 왕국 | |
사망 | 1888년 5월 8일 (향년 66세) |
독일 제국 | |
복무 |
바이에른 왕국군(1840년~1871년) 독일 제국군(1871년 ~ 1876년) |
최종계급 | 독일 제국군 보병대장 |
주요참전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
서훈 | 1871년 제정 2등급 철십자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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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그문트 폰 프랑크는 바이에른 왕국군의 군인이자, 독일 제국군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보병대장이다.2. 생애
1821년, 지그문트 폰 프랑크는 바이에른 왕국의 남작가에서 태어났다. 1840년 생도로서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하였다. 소위로 임관을 받고, 1849년 대위 계급장을 달고, 병참장교가 되었다. 이후 국방부에서 복무하다, 1865년 연대장이 되었다. 프랑크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상대로 싸웠지만, 바이에른 왕국군의 한계를 느꼈다. 이는 당시 국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도 느꼈다.루트비히 2세는 전투 경험으로 다져진 장군을 전쟁장관으로 앉히고 싶었고, 프랑크는 그의 기준에 맞았다. 프랑크는 1868년, 바이에른 왕국군에 아주 큰 변화를 가지고 왔다. 징병 관련하여 세가지 변화를 가지고 왔는데, 첫번째, 징병을 피하려는 행위를 막았으며, 두번째,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바꿨으며[2], 세번째 1년 복무 모병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예비군이라는 개념을 없앴으며, 뮌헨에 제1바이에른 왕립 군단[3], 뷔르츠부르크에 제2바이에른 왕립 군단을[4] 만들어 배치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생도 군단을 고등학교와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바이에른 왕국군은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크는 심각하게 피해를 받은 병력의 보충과 식량배급에 초점을 맞추었다. 프랑크는 프랑크푸르트 조약 체결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에는 바이에른 왕국이 북독일 연방에 소속되는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이 공적으로 100,000 탈러를 받았다. 1872년 프랑크는 또 한번 바이에른 왕국군에 개혁을 가져왔고, 1875년 전쟁장관 자리를 요제프 막시밀리안 폰 메일링거에게 넘겨주고 1876년 전역하였고, 1888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