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Giulio Douhet[1]이탈리아 왕국의 군인, 항공전략 이론가이다. 독립된 군종으로서 공군의 지위 확립을 주장했고, 특히 폭격기에 의한 적군 기지의 섬멸을 강조했다.
오늘날 통용되는 제공권(항공우세), 항공력, 그리고 전략 폭격 개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세계 각국의 해군이 알프레드 마한을 시조로 추앙하듯이, 세계 여러 나라의 공군에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1869년 5월 30일에 이탈리아 왕국 캄파니아 주 카세르타에서 태어났다. 그 후 집안의 전통에 따라 이탈라아 북부 모데나의 군사 아카데미에 진학해 1888년에 이탈리아 왕국군의 포병 장교로 임관했다. 그 후 좀더 과학기술과 견문을 얻기 위해 토리노 공과 대학교에 입학했다.1900년 육군참모부로 배속받았으며 그곳에서 비행기를 접하고 비행기가 차후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는 혁신적인 생각이었는데, 대부분의 장교들은 비행기를 정찰용이나 연락용 혹은 아군의 포격이 목표물에 정확히 맞았는지를 확인하는 용도로만 썼고 공중에서의 전투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1차대전에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프랑스군의 명장 페르디낭 포슈 장군도 (초창기 한정으로) 비행기의 가치를 평가절하했을 정도. 이 점에서 줄리오 두헤는 일찌감치 항공기의 군사적 가치를 간파하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령으로 승진한 두헤는 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엄청난 소모전이었던 참호전의 타개에 골몰했다. 결국 그는 그 해결책으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항공기를 이용하여 적의 후방을 공격하자는 전략을 고안해냈다. 자신의 의견을 제출하는 과정에서 상관과 상당한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16년 9월에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에 갔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전략을 좀더 세밀하게 다듬었고 급기야 이탈리아 군이 카포레토 전투에서 대패하자 재평가를 받고 복귀했다. 그러나 두헤는 여전히 상관들의 태도가 자신이 감옥에 갇히기 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1918년 6월 군을 떠났다.
전쟁 후 베니토 무솔리니를 지지하여 항공국장에 임명되었지만 불과 몇개월 만에 사임했다. 공군의 중요성 홍보를 위해 강연,저술활동을 하던 중 1930년 2월 15일 로마 근교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