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0 10:06:34

군데샤푸르

준디샤부르에서 넘어옴
파일:사산 왕조 왕기.svg
사산 왕조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FFB31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CCC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FF0000><colcolor=#FFFB31> 역사 역사
정치 왕중왕 | 틀:역대 사산 제국 샤한샤 | 틀:역대 사산 제국 이집트 총독
도성 · 궁궐 이스타크르 | 크테시폰
행정구역 비샤푸르 | 군데샤푸르
사법 · 치안 불사 부대 | 사트라프 | 마르즈반
언어 페르시아어· 다리어
문화 타케 보스탄 | 팔라비 문자
종교 · 신화 조로아스터 교 | 마즈다크교 | 마니교 }}}}}}}}}}}}}}}

1. 개요

팔라비어 𐭥𐭧𐭩𐭠𐭭𐭣𐭩𐭥𐭪𐭱𐭧𐭯𐭥𐭧𐭥𐭩 [1]
페르시아어 گندی‌شاپور
아랍어 جنديسابور
시리아어 ܒܝܬ ܠܦܛ
영어 Gundeshapur

이란 서남부 후제스탄 지방의 유적. 데즈풀 동남쪽 10km 지점의 소도시 샤하바드 근처에 위치한다. 곤데샤푸르로도 표기되며, 의미는 여러 설이 있으나 '샤푸르 군대의 요새'란 뜻으로 추정된다. 샤푸르 1세 안티오크를 함락한 후 그 주민들을 이주시켜 세운 도시로, 사산 제국 ~ 초기 이슬람 제국 시기 후제스탄의 주도이자 에데사 니시비스와 함께 서아시아 지역의 주요 학문 중심지 중 하나였다. 특히 의학이 발달하였고, 현지 아시리아인 의사들은 지혜의 집 비마리스탄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만 9세기 이후 쇠퇴하였고, 주민들이 데즈풀 등으로 떠나며 버려졌다. 중요한 유적지임에도 제대로 조사나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폐허로 방치되어 있고, 많은 도자편들이 흩어져 있다.

2. 명칭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긴 명칭의 축약형 혹은 기존 명칭이 와전된 형태인 것은 분명하다. 군데-데즈-이 샤푸르 (샤푸르의 군사 요새), 웨흐-안디요크-샤푸르 (샤푸르의 안티오크보다 나음), 웬듀-샤푸르 (샤푸르가 얻음) 등의 설이 있다. 시리아어로는 베트 라파트 (ܒܝܬ ܠܦܛ), 그리스어로는 벤도사보라로 불렸다. 아랍어로는 샤푸르 군대란 뜻인 준디샤부르로 표기되었다.

3. 역사

253년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260년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은 후, 샤푸르 1세는 로마인 포로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여러 도시를 세운다. 그 일환으로 265년 비샤푸르에 이어 271년 슈쉬와 슈슈타르 사이에 군데샤푸르를 세우고 안티오크 출신 포로들을 이주시켰다. 이후 군데샤푸르는 빠르게 발전하여 후제스탄의 주도이자 샤한샤의 월동지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샤푸르는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녀가 대동한 두 그리스 학자들이 군데샤푸르에서 히포크라테스 의학을 가르쳤다 한다. 5세기 무렵 군데샤푸르는 슈쉬, 슈슈타르, 카르카드-레덴과 함께 후제스탄의 4대 도시 중 하나였다.

3.1. 서아시아 학문의 중심

4-5세기 들어 군데샤푸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인 아시리아인이 대거 유입되었다. 489년, 동로마 황제 제노의 네스토리우스파 박해로 서아시아의 신학과 과학의 중심지이던 에데사 학교가 폐쇄되자 아시리아인 학자들은 대거 사산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그중 신학 계열을 포함한 주류는 북메소포타미아 니시비스, 과학 계열 학자들은 후제스탄의 군데샤푸르에 정착했다. 529년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폐쇄된 아테네 학당의 학자들도 군데샤푸르에 유입되어 함께 의학, 수학, 천문학 분야에서 연구에 정진하였다. 5세기에 다수의 아시리아인이 정착한 후 군데샤푸르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대주교구가 설치되었다. 당시 의학의 중심지이던 에데사 출신 의사들은 군데샤푸르를 새로운 서아시아의 의학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6세기 중반의 샤한샤 호스로 1세는 동로마 제국이 박해한 그리스 철학자 및 네스토리우스파 아시리아인들을 수용, 군데샤푸르에 정착시키고 그리스어 및 시리아어 문헌들의 팔라비어 번역을 맡겼다. 이때 의학을 비롯해 천문학, 점성학, 철학, 공학 등의 서적이 번역되었다. 호스로는 또한 저명한 의사 보르주예를 인도로 보내 동방의 학자들을 초대하게 하였고, 초청된 힌두&중국 학자들은 기존 학문 계열 외에도 수학이나 약초학 및 각종 종교 분야의 지식을 전해주었다. 보르주예 본인도 인도의 판차탄트라를 번역한 켈릴레 베 뎀네를 지었고, 이는 후일 이슬람권에서 '칼릴라와 딤나'로 알려지게 된다. 즉, 군데샤푸르는 그리스 ~ 인도 학문을 집대성하였다.

군데샤푸르 대학의 의사들은 1대1 도제 양성식 수업을 하던 동로마 시절과 달리 다수의 교수가 다수의 제자를 가르치는 형식을 도입해 향후 의대 교육의 기반을 놓았다. 수업은 서아시아의 공용어이던 시리아어 (동부 아람어)로 진행되었고, 현대 의대처럼 강당과 병동 및 도서관 등이 존재했다. 638년 이슬람 제국군이 점령한 후, 군데샤푸르 대학은 이슬람 교육 기관으로 변모해 유지되었다. 832년 칼리파 알 마문이 지혜의 집을 설립했을 때에 그리스-페르시아-인도 학문을 섭렵한 군데샤푸르 학교 출신이 대거 참여했다.

3.2. 쇠퇴

다만 지혜의 집이 점차 발전하면서 군데샤푸르는 바그다드에 학문 주도권을 상실했고, 또한 조로아스터교와 네스토리우스파의 영향력이 농후했기에 쿠란과 대치되는 가르침이 있다고 여긴 알 무타와킬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었다.마지막 학장 사부르 빈 사흘이 869 사망한 후 군데샤푸르 대학에 대한 기록은 소멸한다.

대신에 행정적으로 연관된 서쪽의 수사 (슈쉬)에서 학문 발달했고, 앗 탈리비는 아바즈~파르스 일대에서 슈쉬가 의학에 있어 제일 뛰어나다고 기록했다. 중세 아랍 문헌에서 군데샤푸르는 슈쉬로 기록되어 있다. 대학 폐쇄 후 군데샤푸르의 주민들은 점차 로마군 포로들이 만든 다리가 있는 인근 데즈풀로 이주했다.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사파르 왕조의 창건자 야쿱 이븐 알 라이트가 876년부터 이곳에 머물다가 879년 사망하여 매장되기도 하였다. 이를 마지막으로 군데샤푸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20세기에야 재발견되었다. 팔레비 왕조 시기 과거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데즈풀에 존디샤푸르 대학이 세워졌다.


[1] 웨-안디옥-샤부르